한 시절의 시작과 끝을 전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
마티유 블라지
Start → 샤넬
가브리엘 샤넬은 여성을 억업하는 코르셋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편안한 여성복을 만든 최초의 디자이너다.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에 대한 갑론을박은 여전하지만, 브랜드의 시작점을 복기한다면 이번 컬렉션은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밝게 빛나는 행성들이 떠다니는 거대한 샤넬의 우주 속에서 쏟아져 나온 룩들은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 남성의 전통적인 복식을 샤넬의 비율로 재구성한 거친 마감의 수트 재킷과 셔츠, 그리고 유연한 드레이핑이 돋보이는 스커트와 드레스는 당장 입고 싶을 만큼 현실의 여성과 가까운 옷이었다. 언제나 타임리스한 스타일을 강조하는 샤넬의 가치를 담아 시간의 흔적이 깃든 빈티지한 2.55 백도 선보였다. 이 외에도 셔츠 안에 샤넬 체인으로 무게감을 더하거나 트위드에 자수 디테일을 장식하는 등, 샤넬의 익숙한 상징들은 마티유 블라지의 세계에서 현실감과 실용성을 유지한 채 다시 태어났다.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
Start → 발렌시아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격렬한 지각변동이 대부분 정리되면서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인 브랜드들이 유독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어깨가 무거웠던 사람을 꼽자면, 단연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일 거다. 뎀나가 발렌시아가에 남긴 선명한 인장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뒤덮을지, 기대와 우려를 한 몸에 받았을 거다. 피치올리는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단순히 오마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의 흔적을 다시 조립하는 방법을 택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건축적인 실루엣,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모터백, 뎀나의 버그 아이 선글라스를 조화롭게 이식한 컬렉션은 이전보다 확실히 고전적이고 우아하게 변모했다. 무엇보다 옷의 구조를 깊이 있게 탐구한 룩에서는 신체의 형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철학이 느껴졌다. 뎀나 팬들에게 만족스러운 쇼는 아니었겠지만, 브랜드의 유산을 되짚고 재정립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출발점이었다.
루이스 트로터
Start → 보테가 베네타
‘보테가 베네타의 언어는 인트레치아토입니다. 이는 하나의 은유이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두 조각이 함께 엮여 더 강해지고, 서로를 보완하며 완전체가 됩니다.’ 루이스 트로터는 보테가 베네타의 혁신적인 기법인 인트레치아토를 상징하는 ‘소프트 펑셔널리티(soft functionality)’를 컬렉션을 아우르는 핵심 주제로 삼았다. 재킷과 코트, 팬츠, 백과 슈즈에 이르기까지, 인트레치아토는 형태를 달리하며 다채롭게 활용됐다. 파도의 포말처럼 부드럽게 흩어지는 깃털 장식의 룩 또한 ‘소프트 펑셔널리티’라는 컬렉션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낸 요소였다. 루이스 트로터는 단순히 보이는 것뿐 아니라, 듣는 경험을 통해서도 주제를 느끼길 바랐다. 그는 스티브 맥퀸과 협업해 니나 시몬과 데이비드 보위가 각각 부른 ‘Wild is the Wind’를 하나의 듀엣처럼 엮어 청각적 인트레치아토를 완성했다. 이렇게 정교하고 촘촘하게 짠 컬렉션이라면, 앞으로 그의 여정이 더욱 견고하고 단단하게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잭 맥콜로&라자로 에르난데스
Start → 로에베
탐스럽게 익은 과일, 물과 땀에 흠뻑 젖은 낯선 얼굴들. 잭&라자로가 준비한 첫 번째 컬렉션의 티저는 뜨겁고 찬란한 여름의 장면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했다. 예고편만으로도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새로운 로에베는 색종이를 펼쳐놓은 듯한 명료한 색채와 그래픽적인 실루엣으로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비치 타월을 두른 듯한 드레스와 물에 빠진 옷을 대충 말려 구겨진 듯한 니트 톱은 마치 해변의 한 장면이 그대로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로에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예 정신은 유리로 만든 클러치백과 스프레이 프린팅 기법으로 마감한 가죽 드레스에 담아냈다. 또한 쇼의 시작부터 흘러나온 파칭카 보이즈의 사이키델릭한 음악은 컬렉션 전체에 리듬감을 부여하며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브랜드의 오랜 유산을 분명하게 활용한 쾌활하고 관능적인 컬렉션은 다음 시즌에 선보일 남성복을 기다려지게 한다.
시모네 벨로티
Start → 질 샌더
시모네 벨로티의 질 샌더 데뷔 쇼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바로 컬렉션의 시작을 연 모델 기네비어 반 시누스. 지금까지 꾸준히 회자되는 질 샌더 1996 S/S 캠페인의 주인공인 그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선연한 존재감으로 런웨이를 단숨에 장악했다. 간결하고 직선적인 룩들은 언뜻 그 시절의 옷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구겨진 주름과 거친 마감으로 의도적인 균열을 내고 슬릿이나 컷아웃, 투명한 소재를 사용해 은근하게 몸을 노출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변주를 더한 것이 눈에 띄었다. 질 샌더의 아카이브를 충실하게 반영한 컬렉션이었지만, 시모네 벨로티만의 고유한 색이 얼마나 명확하게 드러났는지는 아직 미지수.
듀란 랜팅크
Start → 장 폴 고티에
게스트 디자이너를 초청해 컬렉션을 꾸려오던 장 폴 고티에가 마침내 듀란 랜팅크를 자신의 후임 디자이너로 맞이했다. 패션계의 ‘앙팡 테리블’로 불리던 그가 동시대의 가장 재기 발랄한 디자이너에게 바통을 넘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파격적인 원뿔 모양 콘 브라를 만든 장 폴 고티에와 3D 프린팅으로 인체를 과장하고 왜곡하는 듀란 랜팅크는 분명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컬렉션의 이름은 ‘주니어(Junior)’로, 컬트적인 ‘주니어 고티에’ 라인의 오마주다. 트롱프뢰유 효과와 착시를 일으키는 기하학적인 프린트는 모두 장 폴 고티에의 아카이브에서 착안했다. 하지만 듀란 랜팅크는 한발 더 나아갔다. 형태를 부풀리고 비율을 재정의하는 것은 물론,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보디수트와 과감한 노출을 통해 장난스럽고 도발적인 컬렉션을 완성했다. 피날레에서 두 사람이 감격스럽게 포옹하는 모습을 보니 ‘주니어’라는 컬렉션 이름이 브랜드의 바통을 넘겨받은 듀란 랜팅크의 은근한 선언이자 다짐처럼 느껴졌다.
다리오 비탈레
Start → 베르사체
지난 시절의 패션을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낸 이는 다리오 비탈레였다. 그는 잔니 베르사체의 아카이브와 1980년대 패션에서 추출한 컬러, 글램 스타일을 조합해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했다. 상체를 과감히 드러낸 슬리브리스와 팝아트적인 프린트, 바지의 지퍼를 반쯤 내린 채 스타일링하거나 쇼츠를 돌돌 말아 올린 연출은 베르사체의 화려하고 관능적인 세계관이 드러나는 지점. 볼드한 네크리스, 커다란 버클 벨트, 가죽 베스트와 스트라이프 데님까지. 모두 잔니 베르사체가 브랜드를 이끌던 시절의 것과 꼭 닮아 있었다. 과거의 유산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베르사체의 본질을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다리오 비탈레의 컬렉션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룬 유의미한 쇼였다.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
End. 펜디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는 이번 컬렉션을 ‘로맨틱한 우아함과 여유로운 다채로움으로 풀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깃털처럼 가벼운 실루엣과 채도 높은 컬러 팔레트는 싱그러운 여름의 활기를 부여하는 데 힘을 보탰다. 여성과 남성의 룩은 디자인 정신을 공유한다. 서스펜더와 코르셋을 연상시키는 버튼홀 탭은 각각의 의상에 포인트를 더하고, 때로는 조절도 가능해 원하는 실루엣을 마음껏 연출할 수 있어 실용적이다. 이제껏 브랜드의 유산을 보존하고 끊임없이 재해석해온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가 메종의 명예회장으로 임명됐다. 브랜드 창립 10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에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그의 빈자리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대신한다. 2026년 2월 밀라노에서 열리는 2026 F/W 컬렉션에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첫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
로리스 메시나&시모네 리초
End. 써네이
이번 시즌 가장 충격적인 쇼는 단연 써네이였다. 그들은 2026 S/S 컬렉션을 라이브 경매 방식으로 진행했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쇼가 시작되자, 경매 대상이 다름 아닌 써네이 그 자체임이 밝혀졌다. 거대한 나무 상자 두 개 안에는 커다란 써네이 로고 간판과 두 디자이너가 들어 있었다. 한쪽에 서 있던 모델들은 입찰자를 흉내 내며 경매를 시작했고, 낙찰이 모두 끝나자 모델들은 무대 뒤로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한 두 디자이너는 오늘날 패션 산업의 메커니즘을 경매 형식으로 풍자하며 작별을 고했다. 소규모 브랜드와 젊은 디자이너들이 처한 현실과 그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시사한 써네이의 씁쓸했던 마지막 쇼.
Editor 이다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