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기로 했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걸어서 가는 줄 안다. 이번에는 버스 타고 갔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대표 경로를 훑으며 주요 명소를 돌아봤다. 잠깐 맛만 봤는데도 중세로 타임머신 타고 넘어간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는 시간이 쌓여 있었다.
산티아고에 간다. 칠레 말고 스페인 산티아고. 더 제대로 말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간다. 그렇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 그 산티아고다. 남들은 걸어서 간다지만, 일단 난 비행기 타고 간다. 비행기 타도 쉬운 여정은 아니다. 우선 한국에서 스페인 바로셀로나까지 14시간 30분 걸린다. 그곳에서 비행기 갈아타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또 2시간 정도 가야 도착한다. 이베리아반도 북쪽 끝은 이렇게 멀다. 멀지만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무려 9세기부터. 이번 여정의 테마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하지만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로 향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일정이 짧다. 들러야 할 곳도 많다. 그럼에도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긴 세월 수많은 사람을 걷게 한 무언가가 있는 곳이니까.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은 신앙적 순례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아 성찰의 여정으로도 확장했다. 매년 30만 명 이상 순례길을 걷는다. 신앙을 떠나 인류 문화유산이자 누군가의 버킷 리스트인 그 길을 마주하는 마음은 설렐 수밖에 없다.
두 눈으로 보기 전에 미리 공부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하나가 아니다.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 피레네산맥을 넘는 ‘프랑스길’이 대표적이다. 포르투갈에서 출발해 산티아고로 가는 ‘포르투갈길’, 스페인 북부 해안선을 따라 진행하는 ‘북쪽길’도 있다. 그 외에 ‘가장 오래된 순례길’로 알려진 ‘프리미티보길’이나 스페인 남부 세비야에서 출발하는 ‘은의 길’도 순례길이다. 왜 아니겠는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어지는 길은 무수히 많으니까. 그래서인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100km 떨어진 곳에서부터 걸으면 순례자 인증 도장을 받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걸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간다는 점이다. 그만큼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중요하다. 이쯤에서 왜 그곳으로 걷기 시작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 기원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지명에 의미가 있다. 우선 산티아고는 스페인어로 성 야고보를 뜻한다.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이자 사도 요한의 형. 그는 스페인이 기리는 수호 성자이기도 하다. 야고보가 예수 승천 후 스페인 지역에 전도하러 갔다는 전승에서 유래한다. 콤포스텔라는 ‘별빛이 내리는 들판’을 뜻한다. 한 수도승이 벌판에 별이 떨어져 가보니 그곳에서 야고보의 유해를 발견했고, 그 자리에 산티아고 대성당을 지었다는 이야기. 지금도 산티아고 대성당에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는 이야기. 물론 이 모든 건 전설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성지는 전설에서 기인해 사람들을 통해 실체를 띠게 마련이다. 우선 중세부터 순례자들이 산티아고를 향해 걸었다. 바티칸에서 로마, 예루살렘에 이어 3대 성지로도 공표했다. 지금도 사람들이 걷는다. 종교적 의미가 담기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엮이며, 자연경관이 다채로운 길. 산티아고 순례길이 1000년 넘게 이어진 이유다. 공부한 내용을 되새기다 보니 비행기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착륙했다. 별이 내리는 장면은 못 봤지만, 어느새 밤이었다.
“순례자에게 길과 알베르게는 거의 전부다.
하루 종일 길을 걷고, 알베르게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고전적 순례길, 프랑스길
아침부터 이동했다. 걷지 않고 버스 타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보러 왔지만 걸어가서 보진 않는다. 가야 할 곳이 많다. 일정도 빠듯하다. 나 같은 사람 많을 거다. 걷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수만 가지다. 그런 사람에겐 이런 여행도 나쁘지 않다. 언젠가 걸을 그날을 상상하며 순례길 분위기를 미리 접할 수 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버스 창가를 스치는 풍경을 바라봤다. 산을 오르던 버스가 멈춘 곳은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다.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 루고주에 있는 아주 작은 산촌 마을.
이 작은 마을을 첫 번째 방문지로 정한 이유는 분명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대표 구간인 프랑스길의 상징적 장소인 까닭이다. 오 세브레이로는 해발 약 1300m에 있는 고지대 마을이다. 안개가 자주 생겨 ‘운무의 마을’로도 불린다. 버스에서 내리자 별칭처럼 주변이 안개로 자욱하다. 한국에서부터 걱정하던 비도 내린다. 낯선 풍경에 어리둥절하던 내 옆으로 순례자 두 명이 지나갔다. 배낭을 메고 우비를 뒤집어쓴 채 등산 스틱을 짚으며 나아가는 순례자들. 9세기 순례자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현대적 순례자의 모습이다. 우비를 챙겨 입고 그들을 따라 마을로 들어섰다.
오 세브레이로는 팔로사(Paloza)라 불리는 전통 초가집을 보존해놓았다. 민속촌 초가집과 비슷해 신기했다. 과거 순례자는 이런 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테다. 지금도 초가집은 아니더라도,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가 있다. 순례자에게 길과 알베르게는 거의 전부다. 하루 종일 길을 걷고, 알베르게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오 세브레이로는 순례길의 풍경을 가장 오래된 모습으로 보여준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접하는 갈리시아 지역의 첫 번째 마을이라는 의미도 있다. 한 순례자가 비가 뚝뚝 떨어지는 우비를 챙기며 카페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벅찬 감정이 번진다. 프랑스길을 대표하는 첫 번째 장소로 왜 오 세브레이로를 찾았는지 명확해졌다. 비와 안개, 험준한 산길과 순례자, 초기 알베르게의 모습이 오 세브레이로를 특별하게 했다. 시간이 쌓인 장소 앞에선 언제나 숙연해진다.
다채로운 순례길, 포르투갈길
남쪽으로 향했다. 포르투갈길을 밟아보기 위해서다. 그 시작점은 포르탈레자 데 발렌사(Fortaleza de Valena)다. 웅장한 별 모양 요새가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을 내려다본다. 중세 요새 도시를 관통해 걸으니 고전적 순례길의 정취가 풍긴다. 곳곳마다 순례길의 방향을 표시하는 표지석도 감흥을 높인다. 노란 조개와 노란 화살표. 프랑스길에서도 본 이 표식은 포르투갈길에도 있다. 화살표 방향만 따라가면 결국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달한다. 오래전 이 길을 지난 순례자도, 관광하듯 온 나도 같은 표식을 보고 걷는다. 긴 시간을 관통하며 같은 경험을 한다는 점. 순례길의 의미가 어렴풋이 다가왔다.
이끼 긴 돌담과 돌길을 지나 요새 끝에 서면 미뉴강이 내려다보인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가르는 강이다. 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국제교. 19세기 말에 완공된 철제 2층 다리다. 차로도, 걸어서도 지나갈 수 있다. 나라와 나라를 건너 순례길에 오르는 느낌을 맛만 봤다. 언젠가 배낭을 메고 철길을 걸을 수 있을까. 국제교를 지나면 스페인 투이(Tui)에 다다른다. 포르투갈길에서 만나는 스페인 첫 도시다. 투이를 걷는다면 투이 대성당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12~13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대성당이다. 그동안 순례길에서 봐온 성당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소박한 성당도 저마다 특색과 성스러움이 있었지만, 역시 웅장함이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어쩌면 순례길은 성당과 성당을 잇는 길인지도 모른다.
포르투갈길은 두 가지 경로가 연결돼 있다. 포르투갈길과 포르투갈 해안길이다. 내륙으로 올라가다 서쪽에 바다가 있으니 해안길도 더한 느낌이다. 그 사이 해안 마을과 여러 도시도 거쳐 간다. 그런 점에서 포르투갈길은 프랑스길과 느낌이 사뭇 다르다. 프랑스길은 자연을 벗 삼아 수행하듯 걷는 데 집중한다. 반면 포르투갈길은 도시와 해안길이 어우러져 관광 성격도 스민다. 순례길을 품은 갈리시아 지역은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 게다가 갈리시아 남쪽은 알바리뇨 화이트 와인의 본산지다. 생굴이나 문어 요리 풀포, 각종 해산물 요리를 알바리뇨 화이트 와인과 함께 즐기는 호사를 만끽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바다 품은 포르투갈길의 특징이다.
“거대한 화강암이 쌓인 그 풍경은 인생의 장면으로 남았다.
걸어서 이곳에 도착했다면 그 광경에 눈물을 참기 힘들었을 게다.”
꼭 가봐야 할, 피스테라-무시아길
전통적인 순례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끝난다. 신앙적 이유로 시작된 순례니까. 하지만 이젠 자아 성찰의 의미로도 걷는다. 그렇기에 유럽 대륙의 서쪽 끝이 의미가 생긴다. 이왕 걸은 김에 땅끝까지 걷고 싶은 마음. 마침 스페인에서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Fisterra)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멀지 않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대륙의 끝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장 루트인 피스테라-무시아길이 생겨났다.
피스테라는 알겠는데 무시아는 뭘까. 무시아는 피스테라에서 30km 정도 떨어진 또 다른 땅끝이다. 게다가 종교적 전설도 품은 땅끝이다. 성모 마리아가 사도 야고보를 격려하기 위해 돌배를 타고 무시아에 도착했다는 전설. 무시아의 해안가에 가보니 전설처럼 돌배라고 여길 만한 거대한 화강암이 겹겹이 쌓여 있어 장관을 이룬다. 게다가 해안가 앞에 거대한 석상처럼 성당이 서 있어 영적인 풍경을 완성한다. 스페인 대표 땅끝 피스테라가 있는데도 무시아까지 걷는 이유로 충분했다. 거대한 화강암이 쌓인 그 풍경은 인생의 장면으로 남았다. 걸어서 이곳에 도착했다면 그 광경에 눈물을 참기 힘들었을 게다.
땅끝을 향하는 경로지만 땅끝만 있지 않다. 중간에 고즈넉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마을도 있다. 폰테 마세이라(Ponte maceira)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피스테라-무시아길을 걸으면 지나치는 마을이다. 그 사이 마을이야 많지만, 폰테 마세이라는 옛 모습을 간직한 곳이라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마을 가운데 탐브레강이 흐르고 그 위로 돌다리가 가로지른다. 돌다리 중간에 멈춰 주변을 돌아보면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세트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작은 성채, 석조 가옥, 제분소가 아기자기하게 놓인 풍경은 중세 정취에 흠뻑 젖어들게 한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접하는 아름다운 풍경은 기억 속에 더 깊게 새겨진다. 서쪽으로 더 걸었기에 얻을 수 있는 축복 같은 풍경들이다.
순례길의 완성,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드디어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이다. 첫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지만 다음 날 아침 다른 곳으로 떠났다. 순례길의 이모저모를 돌아보고 결국 순례자처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에 섰다. 별이 떨어져 사도 야고보의 유해를 찾은 장소이자 지금도 지하에 사도 야고보의 유해가 있는 곳. 전설의 시작이자 중심이며 지금은 산티아고 순례의 종착지. 이런 의미를 모르고 봐도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대성당. 대성당 앞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동안 관광처럼 다녀서 많이 못 본 순례자를 이곳에서 한꺼번에 만나는 느낌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바닥아 앉아 순례의 마지막을 기리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들은 걸었고, 나는 걷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기분은 알 순 없지만, 그들은 더없이 개운한 표정이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그 자체로 문화유산이다. 역사적 건축물로서 감상할 부분이 풍부하다. 대성당은 9세기 말에 건설하기 시작해 13세기 초에 완공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중심으로 고딕과 바로크 요소도 더했다. 대성당 안팎을 장식한 조각물만 보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스페인 성당의 특징은 장식물이 화려하다. 사실적이기도 하다. 스페인 갈리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성당을 보면서 공통적으로 느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그 완결판 같은 규모다. 로마네스크 조각의 걸작으로 통하는 ‘영광의 문’을 비롯해 순금과 은으로 장식한 대성당의 주제단, 외부의 각종 조각품들까지 감상할 것투성이다. 중세시대 건축물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역사적 보고로 다가온다. 물론 그냥 감상하기에도 황홀하다. 그 압도적 규모는 순례길의 종착지로서 근사한 절정을 선사한다.
“전 언젠가 다시 올 거예요. 이번에는 걸어서요.” 이번 여정에 함께한 후배가 말했다. 며칠 동안 인상적인 장면들이 기억에 새겨진 덕분일 테다. 난 다시 걸어서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찾고픈 마음은 분명했다. 스페인 갈리시아 지역이 마음에 들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장 유명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만 있지 않았다. 순례길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자연과 음식, 시간을 품은 도시가 있었다. 지면 관계상 소개하지 못한 장소가 수두룩하다. 그곳을 언젠가 다시 찬찬히 돌아보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그땐 지금보다 오래 걸어보기로 하면서.
Editor 김종훈
Images 스페인 갈리시아 관광청(Axencia Turismo de Galic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