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을 좋아한다면 꼭 한 번 제주에서 타봐야 한다. 섬이라는 특별한 공간은 모터사이클 타는 재미를 몇 곱절 증폭한다. 여러 번 가봤지만, 또 타러 갔다. 이번에는 그동안 경험한 적 없는 제주 깊숙한 숲길까지 나아갔다.
한 달 전부터 설렜다. 이런 경우 드물다. 팍팍한 직장 생활에, 쌓여가는 나이에 매사 심드렁해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설렜다. 제주에서 모터사이클을 탄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다. 처음에는 모터사이클을 탄다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다리 사이에 엔진을 끼고 도로를 달려 나가는 쾌감은 중독적이었다. 때로 바람을 가르고 비행하는 기분도 느꼈다. 좌우로 기울어지는 모터사이클은 수평과 수직 사이 또 다른 축으로도 움직이니까. 인간은 날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남자라면 어릴 때 누구나 비행 로봇, 아니 비행기라도 조종해서 날고 싶어 하잖나. 코흘리개의 꿈이었다는 걸 깨달은 지 이제 수십 년이 지났다. 그 꿈은, 모터사이클 타면서 어느 정도 대리 충족할 수 있었다. 모터사이클 탈 생각에 설레는 이유다.
그냥 타는 게 아닌 제주에서 탄다는 의미도 크다. 10년 동안 모터사이클을 타니 어디서 타느냐가 중요해졌다. 예전엔 그냥 타기만 해도 즐거웠다. 이젠 오래, 멀리, 낯선 장소에서 타야 더 즐겁다. 익숙해져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선호하는 주행 성향이 몸에 새겨져서다. 8년 전, 타고 또 타고 싶어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4개월 동안 모터사이클을 타면서 매번 새로운 곳으로 나아갔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쌓였지만 대신 오래, 멀리, 낯선 장소에서 타야 좀 탄 것 같은 성향으로 바뀌었다. 제주에서 모터사이클을 탄다는 건 오래, 멀리, 낯선 장소에서 탈 수 있다는 얘기다.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소풍 가기 전날 어린아이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아직도 이렇게 설렌다는 데 감사하며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제주에서 모터사이클을 처음 타는 건 아니다. 서너 번쯤 각기 다른 모터사이클, 각기 다른 방법으로 다녀왔다. 제주에서 모터사이클 타는 방법은 세 가지다. 우선 자기 모터사이클 타고 가기. 목포, 완도, 여수까지 타고 가서 여객선에 실어 제주로 넘어가는 방법이다. 지역마다 제주행 여객선을 운행한다. 대륙 횡단 후 야마하 SR400을 타고 여수까지 가서 넘어간 적이 있다. 두 번째는 운송업체를 이용해 자기 모터사이클을 제주로 보내서 타기. 비용은 들지만 몸 편하게 제주에서 ‘자기’ 모터사이클을 타고 즐길 수 있다. 마지막은 제주에서 모터사이클 대여해 타기. 예전에는 스쿠터 위주로 대여했지만, 요새는 대형 모터사이클도 대여해주는 곳이 늘었다. 인솔자가 있는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하니 더 알차게 즐길 수 있다. 물론 그만큼 비용은 더 든다. 이번에 내가 선택한 방식은 이 중에 없다. 제주 사는 지인에게 모터사이클을 빌려 타기로 했으니까. 특별한 경우니까 예외로 친다. 어떤 방식이든 상황에 맞춰 즐기면 그만이다. 탄다는 게 중요하니까.
제주 한 바퀴
김포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이내 제주 상공에 들어섰다. 창밖에는 낮게 깔린 구름과 파란 하늘, 오밀조밀한 제주시가 내려다보였다. 날씨 걱정이 사라졌다. 모터사이클 탈 때 날씨는 기분을 좌우한다. 아무리 모터사이클 타는 게 좋아도 비 맞으면서 타는 건 고역이다. 유라시아 대륙 횡단할 때 평생 맞을 비를 다 맞고 탔다. 날씨만 좋으면 뭘 해도 즐거운 법이다. 비행기가 하강하자 설레는 마음이 진해졌다. 얼마 만에 찾은 제주인가. BMW 모토라드 R 18 배거를 타러 제주에 방문한 게 2년 전이었나. 그렇게 따지면 오랜만은 아닌데, 기분은 10년은 지난 듯했다.
제주에서 모터사이클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 있다. 모터사이클은 자유롭게 타며 즐겨야 제맛이지만, 장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특히 제주라는 특별한 장소라면 더욱. 한정된 기간에 맘껏 즐기려면 코스가 중요하다. 나라에서 인정한 공인 코스는 아니지만, 유경험자 입장에서 추천하는 코스가 있다. 섬 외곽으로 한 바퀴 돌기. 제주에서 처음 모터사이클 타면 이 이상 좋은 코스를 찾기 힘들다.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는 공통점이 있다. 물길 옆 도로다. 물길 따라 도로 만들어 구불거리고, 물이 있기에 풍광도 좋다. 제주는 섬이다. 아예 사방이 물이다. 그러니까 지도 그리는 마음으로 섬 외곽을 한 바퀴 도는 것만큼 매력적인 코스는 없다. 단,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국은 우측 통행이다. 도로에서 바다 풍경을 보다 가깝게 두고 달리려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야 한다. 하나 더 말하자면, 내비게이션보다 도로표지판 보면서 해안도로를 찾아 도는 게 좋다. 내비게이션은 빨리 갈 수 있는 일주도로로 안내한다. 제주까지 와서 굳이 일반도로를 달릴 이유는 없다. 제주의 근사한 해안가를 훑듯 달리면 외국 부럽지 않다. 애월에서 대정으로, 대정에서 서귀포로, 서귀포에서 성산으로, 성산에서 김녕으로. 지역마다 해안 풍경이 달라져 지루할 틈이 없다. 익히 알려진 명소가 아닌 제주 해안의 고즈넉한 풍경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모터사이클과 함께한다. 모터사이클 타는 사람이라면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처음이라면 감격할 거다. 다들 그랬다. 한 바퀴 돌아본 지난 여정을 곱씹으며 미소 지을 때쯤 비행기가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이번에는 제주 한 바퀴를 돌진 않기로 했다. 여러 번 돌았으니까. 물론 매번 돌아도 짜릿하지만, 더 흥미로운 모험이 기다렸다. 제주의 길을 날것 그대로 진하게 즐길 기회가 생겼다. 제주 오프로드 라이딩이다. 무작정 흙길로 돌진할 순 없다. 인솔자가 필요하다. 모터사이클 타는 지인이 제주로 내려와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매달 제주로 넘어가 모터사이클 타더니 이젠 아예 제주에서 살기로 했다. 집도 구하고, 오래된 모터사이클도 여러 대 챙겨놓았다. 이번 여정은 그의 새 출발을 응원하는 의미도 있다. 제주행 축하 퍼레이드랄까.
그랬는데 도착 하루 전에 그가 다리를 다쳤다. 응원은 할 수 있지만, 함께 모터사이클을 탈 순 없었다. 이대로 제주 오프로드 라이딩이 무산되나 싶었다. 하지만 모터사이클 타는 사람의 마음은 모터사이클 타는 사람이 아는 법이다. 새로운 모험 가이드를 섭외해놓았다. 지인이 제주에 내려갈 때마다 함께 모터사이클을 타던, 역시 제주가 좋아 제주로 넘어온 장신의 만화가였다. 둘 다 오래된 모터사이클을 좋아하고, 제주 흙길도 많이 다녔다. 이렇게 모험은 계속된다.
정글 탐험처럼
베이스캠프는 김녕에 있다. 북으로 가면 김녕해수욕장이, 남으로 가면 곧 자연 속 임도가 펼쳐진다. 내가 탈 모터사이클은 혼다 에이프 100이다. 125cc도 되지 않는 작고 오래된 모터사이클. 왕년의 인기 모델이었다. 작고 오래됐지만 더 좋았다. 제주에선 고급스럽고 커다란 모터사이클이 딱히 필요 없다. 특히 흙길을 쏘다니려면 다루기 편한 작은 모델이 좋다. 넘어져도 부담 적은 오래된 모터사이클라면 더욱. 에이프 100은 휠 크기를 키워 흙길 주행에 알맞게 커스텀해놓은 상태였다. 킥 스타터를 밟아 시동을 걸었다. 제법 카랑한 배기음으로 내 부름에 화답했다. 역시 못지않게 오래된 혼다 SL 230을 탄 인솔자가 출발했다. 그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살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셈이다. 이럴 때면 언제나 헬멧 속에선 절로 환호성이 터진다. 카우보이의 추임새처럼 그렇게.
제주의 임도는 마치 정글 같았다. 원래는 길이 있었는데 여름내 풀이 자라 길을 지운 곳이 태반이다. 혼자라면 절대 가지 못할 풀숲을 헤치며 나아갔다. 모두 앞에서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인솔자 덕분이다. 풀뿐만 아니라 돌도 많았다. 제주가 화산섬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길에 차이는 돌은 물론이거니와 땅에 박힌 돌 때문에 시종일관 우당탕탕 달려야 했다. 성능 좋은 서스펜션도 아니다. 금세 한계를 드러내 엉덩이에 충격을 안겼다. 툭툭 부딪칠 때마다 핸들이 이리저리 튀기도 했다. 그럼에도 작고 오래된 에이프 100은 생각보다 잘 나아갔다. 미끄러져도 차체가 가벼우니 바닥에 발 한 번 구르고 균형을 다잡으면 그뿐이다. 그 일련의 과정 자체가 짜릿했다. 매끈한 도로를 달릴 때는 느낄 수 없는 모험심을 자극한다.
모터사이클로 굳이 왜 흙길을 타?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매끈한 도로만 타도 달릴 곳은 많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대신 모터사이클로 흙길 타면 짜릿함이 몇 곱절 증가한다. 세 시간 도로에서 타야 느낄 충족감을 흙길에선 30분만 달려도 느낄 수 있다. 모터사이클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지나치는 자연 풍경에 감탄한다. 내겐 유라시아 대륙 횡단 때 겪은 흙길이 떠오르는 연상작용도 일으킨다. 추억을 곱씹는 나만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한참 흙길 밟고 들어가 자연 깊숙한 곳에서 멈췄다. 아무도 없고, 누구도 오지 않을 법한 곳. 임도를 달리며 마주하는 풍경은 확실히 도로를 달릴 때와는 감흥이 다르다. 엔진을 끄고 땀을 식히는 순간, 자연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도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모험의 쾌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오가는 여정이, 고요한 자연 속에서 느끼는 감상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 가방에 챙겨 온 음료수는 또 어찌나 상쾌한지. 음료수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가 달라진 셈이다. 모터사이클이 인도한 특별한 순간이다.
“역시 모터사이클 타기 잘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모터사이클을 타지 않았다면 평생 가보지 못할 곳을 가봤으니까.
평생 못 볼 풍경을 눈에 담았으니까. 그만큼 내 삶 또한 조금 확장했다.”
완벽한 순간
다른 지역 임도로 넘어가는 길에 일이 터졌다. 펑처가 생겼다. 튜브가 들어간 타이어라 바로 대처할 수 없었다. 보통 때라면 망연자실했겠지만, 제주에 사는 인솔자가 내 앞에 있었다. 곧바로 지인의 또 다른 모터사이클을 수배했다. (되도록 피하고 싶은) 모터사이클 하나에 남자 둘이 같이 타는 경험을 했지만, 모험이 끝나지 않는다는 데 의의를 뒀다. 또 다른 모험의 동반자는 스즈키 DR200 제벨. 역시 긴 세월을 버텨낸 오래된 모터사이클이다. 에이프 100보다 오프로드를 더 잘 달리는 모델이어서 든든했다.
DR200 제벨과는 근사한 숲속을 탐험하고, 오름도 가까이서 바라봤다. 흙길 재밌게 타라고 만든 모델답게 거침없이 나아갔다. 내륙으로 들어가니 비가 좀 내렸지만, 오히려 시원하게 땀을 식혀줬다. 잠깐이라면 빗속을 달려야만 느낄 수 있는 쾌감도 있다. 이렇게 모험하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해안도로를 훑기로 했다. 제주에서 모터사이클 타면서 해안도로를 지나칠 순 없는 법이니까.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현무암이 호방한 무늬를 수놓은 제주만의 해안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 광경 속으로 저공비행하듯 달려 나갔다. 빨리 달릴 필요도 없었다. 해안선 따라 굽이치는 길의 리듬을 느낄 뿐이다. 툴툴거리는 배기음은 근사한 배경음악으로 손색없었다. 뭘 더 하고 덜 할 필요 없이 완벽한 순간. 서정적인 풍경 속을 모터사이클 타고 달리는 내 모습이 3인칭으로 그려졌다. 그럴 때가 있다. 모터사이클 위에서 앞을 바라보지만 전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순간. 모터사이클 위에서 완벽한 시간을 보낸다는 증거다. 이번 제주 오프로드 라이딩은 그렇게 완벽한 순간으로 남았다. 역시 모터사이클 타기 잘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모터사이클을 타지 않았다면 평생 가보지 못할 곳을 가봤으니까. 평생 못 볼 풍경을 눈에 담았으니까. 그만큼 내 삶 또한 조금 확장했다. 확장했다고 믿는다.
Editor 김종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