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화 시대에 고속 주행의 성지인 아우토반의 지배자는 누가 될 것인가.
포르쉐 타이칸 터보 크로스 투리스모를 타고 아우토반을 달리니 답은 분명해졌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속담이 있다. 똑같은 물건이나 상황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고 다른 해석을 내린다는 뜻이다. 캠핑은 좋은데 오가는 길의 정체가 싫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는 도구일 뿐 자율주행 기술로 운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 운전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정체만 아니라면 캠핑이나 여행, 심지어 시승을 위한 장거리 주행까지 반기는 편이다. 특히 여행의 즐거움은 계획을 세울 때의 설렘부터 오가는 길의 모든 여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를 타고 평가하는 것이 업무인 자동차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에 감사할 때가 많다. 시승할 때마다 차를 구입해 사용할 소비자의 일상과 비슷하게 복잡한 시내와 한적한 국도, 고속도로를 골고루 달리려 한다. 최근에는 서울을 출발해 우리나라 동북쪽 끝인 강원도 고성군을 왕복하는 길을 자주 다닌다. 왕복 약 470km, 촬영을 위해 움직인 것까지 합치면 대체로 500km 이상의 거리다. 같은 코스를 비슷한 시간대에 동급의 경쟁 모델로 달리면 비교하기도 쉽다. 연비와 성능, 소음 같은 기본기에 장거리 주행에서 오는 피로감까지 종합적으로 차에 대해 알 수 있다. 

이 코스에서 가장 아쉬운 건 차의 진짜 성능이 드러나는 고속 주행 평가다. 차의 종류와 목적에 따라 정해지는 최고속도는 개발 단계부터 아주 중요하다. 움직이는 물체인 자동차의 운동에너지는 차의 무게가 늘어나거나 속도가 빨라지면 커진다. 특히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최고속도가 빨라지면 안정적인 차를 만들기가 훨씬 어렵다. 공기저항을 뚫고 차를 밀어낼 동력원의 성능이나 큰 운동에너지 때문에 좌우나 앞뒤 기울어짐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할 서스펜션과 어떤 속도에서도 안정적으로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까지 많은 부분이 좋아야 한다. 가끔 우리나라에서 최고속도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최고속도 100km/h인 차로 80km/h로 달리는 것보다 최고속도 200km/h인 차로 80km/h로 달릴 때가 훨씬 조용하고 편안하며 안전하다. 차의 한계가 높을수록 그 아래 영역에서 안정감은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빠르게 달린다는 것은 높은 출력뿐만 아니라 튼튼한 뼈대와 잘 조율된 서스펜션, 노면과 바람의 소리를 막아주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사고가 났을 때를 대비해 피해를 줄일 안전장비도 잘 갖춰야 한다. 독일이 세계 자동차 산업의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유일의 속도 무제한, 무료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얼굴의 포르쉐

지난 5월, 아우토반을 달릴 기회가 있었다. 포르쉐 전기차 워크숍에 참석하며 마칸 일렉트릭과 파나메라 하이브리드 등을 생산하는 공장과 드라이빙센터가 있는 독일 동부 라이프치히를 출발해 본사가 있는 슈투트가르트까지 약 460km를 달렸다. 시승차는 포르쉐의 첫 순수 전기차 타이칸 터보의 왜건형 크로스오버 모델인 크로스 투리스모였다. 정식 명칭은 타이칸 터보 크로스 투리스모(이하 크로스 투리스모). 리어 해치 도어와 트렁크가 넉넉해 일주일이 넘는 출장 기간 동안 두 명분의 짐을 쉽게 실을 수 있었다. 21인치 에어로 디자인 휠, 가변식 라이트 컨트롤이 포함된 파노라믹 루프 시스템, 리어 액슬 스티어링, 포르쉐 액티브 라이드와 부메스터 3D 하이엔드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 등 거의 모든 옵션이 들어간 차다. 국내 기준으로 예상 판매 가격은 2억7520만원.

크로스 투리스모의 특징은 아우토반을 지배하는 파워다. 앞뒤 듀얼 모터는 기본 출력 707마력, 론치 컨트롤을 쓰면 최대 884마력을 발휘한다. 105kWh의 대형 배터리를 얹은 공차 중량이 2320kg으로 가벼운 차는 아니다. 하지만 최대 90.8kgf·m라는 무지막지한 토크로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 가속에 걸리는 시간은 단 2.8초면 족하다. 그러면서도 에어 서스펜션을 최대로 높이면 최저지상고가 178mm로 올라가 어지간한 비포장도로는 쉽게 지날 수 있다. 그야말로 두 얼굴의 포르쉐다. 차와 모터사이클로 달리는 것 자체를 즐기는 입장에서 아우토반은 짜릿함 그 자체다. 독일 전국을 동서남북으로 잇는 152개 노선에 전체 약 1만5000km 구간 중 70%가 속도 무제한 구간이다. 권장 속도는 130km/h인데, 중요한 건 달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명확한 룰이다. 속도가 느린 차는 오른쪽 차로로 빠지고, 속도가 빠른 차는 반드시 왼쪽으로 추월한다. 특히 1차로는 무제한 속도 영역이므로 거의 비워져 있거나 자기보다 빠른 차가 뒤에 있으면 대부분 2차로로 비켜준다. 차종에 따라 차로를 지정한 우리와는 차이가 명확하다. 아우토반을 보고 독재자 히틀러가 만든 도로라는 비난은 절반쯤 맞다.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논의해 1913년 첫 자동차 전용도로가 만들어졌고, 1932년 쾰른과 본을 잇는 20km 구간이 첫 아우토반이 되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와 나치 정권은 기존에 진행하던 아우토반 건설을 키우는 대규모 토목 산업을 실업 해소와 경제 부흥의 상징으로 선전했다. 그럼에도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완성된 구간은 3800km 정도로, 현행 약 1만5000km에 비하면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클래식 포르쉐와 최신식 포르쉐.
클래식 포르쉐와 최신식 포르쉐.

라이프치히에 있는 포르쉐 익스피리언스 센터를 출발해 바로 A14 아우토반에 올랐다. 독일은 전체적으로 도로의 제한속도가 높다. 도심 안쪽이 50km/h인 점은 우리와 같은데 외곽 지역은 왕복 2차로라고 해도 100km/h다. 그 덕분에 아우토반에 진입하는 시간도 짧고 거의 무료 도로여서 톨게이트 앞 정체도 없다. 아우토반에 딸린 휴게소는 두 종류로 우리처럼 식당과 화장실, 넓은 주차 공간과 피크닉 공간 등을 갖춘 정식 휴게소와 졸음 쉼터 같은 간이 휴게소가 있다. 정식 휴게소는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1유로를 내야 하지만 간이 휴게소는 무료라 그런지 멈춘 차들이 매우 많았다. 700마력이 넘는 포르쉐를 타고 아우토반을 달리면, ‘차와 도로 모두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떤 속도 영역에서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니 추월이 매우 쉬울뿐더러 전자적으로 속도 제한이 걸리는 250km/h 에서도 안정적이다. 처음에는 속도계 숫자가 200을 넘을 때마다 자연스레 긴장하게 되지만, 30분쯤 지난 후에는 낮게 깔린 차체와 빠르게 노면 진동을 흡수하는 서스펜션 덕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시속 180km로 달리면서도 옆 사람과 대화할 정도로 바람 소리와 노면 소음 등을 억제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국내에서 시승할 때보다 아우토반에서 타니 크로스 투리스모의 장점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차이는 도로 성능이 받쳐주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 세계 모든 도로는 설계속도와 제한속도가 다른데, 아우토반은 직선 구간이 길고, 코너의 곡선 반경이 매우 크며, 방호벽이나 갓길, 다리 이음매 등의 규정도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제한속도가 가장 높은 곳은 세종포천 고속도로의 남안성 분기점부터 용인 분기점까지 31.1km 구간이다. 여기는 설계속도가 시속 140km이고 제한속도는 시속 120km다. 도로의 경사도를 낮추고 차로 폭도 3.5~3.75m 이상, 제동거리도 설계속도 기준으로 285m 이상을 확보하도록 만들었다. 아우토반은 기본적으로 이 기준을 적용해 만든 데다 대다수 이용자가 룰을 정확하게 지키기에 무제한 속도가 가능한 것이다.

전통을 지키면서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품은 실내.
전통을 지키면서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품은 실내.

포르쉐의 포부

포르쉐 충전 라운지에 도착했다. 배터리 잔량이 8%가 남은 상태에서 81% 채워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0분. 화장실에 다녀온 후 음료수 하나 마신 시간보다 짧았다. 신형 타이칸은 최대 충전 속도가 320kW인데, 실제로 배터리 잔량 10%부터 286kW로 채워지기 시작해 50% 정도까지 310~318kW를 유지해 양산 전기차 중 가장 빠른 충전 속도를 보여줬다. 이렇게 빠른 충전 속도는 전체 여행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는 효과가 있어 중요하다. 전기차의 1회 충전 시 주행 가능 거리는 최근 500km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이보다 더 멀리 달리려면 배터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배터리 팩이 커져 실내 공간이 손해를 보고, 차의 무게가 늘어나 충돌 안전 등에서도 단점이 생긴다.

가변식으로 밝기를 조절하는 파노라믹 루프 시스템.
가변식으로 밝기를 조절하는 파노라믹 루프 시스템.

포르쉐는 적당한 크기의 배터리로 500km 이상 주행 가능 거리를 확보하고, 빠른 충전으로 시간을 줄이는 전략을 택했다. 최종 목적지인 슈투트가르트의 포르쉐 박물관까지 5시간 30분 조금 넘게 걸렸는데, 중간에 휴게소에서 두 번, 충전소에서 멈춘 1시간 30분을 제외하면 실제 달린 시간은 4시간 정도다. 그 시간 동안 480km를 달렸으니 평균속도는 약 120km로 꽤 빠르게 달린 셈이다.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독일의 아우토반을 처음 달린 때는 1997년이었다.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취재를 위해 갔던 9월, 수동변속기를 단 소형 해치백을 빌려 아우토반에 올랐다. 5단 기어를 넣고 터질 듯한 엔진 소리에도 차는 시속 180km를 넘지 못했고, 1차로는 감히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성역이었다.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그 아우토반을 최신 포르쉐로, 그것도 전기차인 크로스 투리스모로 달리니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아우토반을 달리는 차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줄이기 위해 무제한 구간을 줄이려는 시도가 있다. 그런 점에서 배출가스가 전혀 없는 전기차의 시대는 아우토반을 그대로 유지하는 명분이 된다. 어쩌면 포르쉐의 전동화 계획은 환경보호와 함께 스포츠카 브랜드의 특성을 그대로 지킬 수 있는, 절묘한 타협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번 여정에서 10년 정도의 가까운 미래는 예측할 수 있었다. 순수 전기차, 혹은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얹은 포르쉐들이 아우토반 1차로를 점령한 모습. 전동화 시대에도 ‘아우토반의 황제’라는 포르쉐의 타이틀은 유효하다.

CREDIT INFO

Editor 김종훈
Words 이동희(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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