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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지은 건축가

재미 건축가 김태수는 1991년부터 젊은 건축가들에게 여행 장학금을 주는 ‘김태수 해외건축여행 장학제’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장윤규, 나은중, 이치훈 등 보통 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건축가를 포함해 33명의 건축가가 건축 여행을 다녀왔다. 건축 여행 장학금은 북미나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선진 장학금인데, 그걸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될 때쯤인 1990년대에 만들어 매년 이어왔다. 창작자가 만드는 건 창작물만이 아니다. 미래를 위한 모든 긍정적 시도 역시 한 창작자가 후대에게 보내는 귀한 선물이다. 장학제 30주년 기념집 <포트폴리오와 여행> 발간을 기념해 한국에 온 김태수를 만났다.

UpdatedOn May 07, 2024

재단을 만들어 젊은 건축가를 지원한다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올리셨습니까?
미국에서도 작품들을 인정받고, 그런 면에서 내가 젊은 한국 건축가들의 자신감을 향상시켜주는 역할을 생각했어요. 1980년대에 운 좋게도 과천 현대미술관 건축을 맡았잖아요. 그때 천안 교보 연수원 건물도 했고요. 그 건물이 좋아요. 오너가 괴팍한 사람이라 나중에 디자이너들은 힘들었지만 아이디어는 아주 좋은 건물이에요. 그때는 한국에서 건축을 하면 외국으로 돈을 보내기가 힘들었어요. 정부에서도 한국에 사무실을 내라고 하고요. 우리가 할 일이 많아서.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울에 사무실을 하나 냈어요. 그때 (한국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생각했어요. ‘내가 한국에서 돈도 버는데 이걸로 한국의 젊은 사람이나 한국 건축계를 위해 뭘 좀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시작한 게 이 프로젝트예요.

젊은이를 지원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 왜 여행이었나요?
그때만 해도 여행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1990년대에 미국에 오려면 내가 미 국무성에 ‘이 사람은 우리 회사가 주는 상을 받았으니 비자를 내달라’고 해야 했어요. 우리나라가 외국에서 신용을 덜 받았던 거죠. 영어권 국가에 비자 없이는 못 갔던 거고. 그때 한국 학생들에게 비자를 주는 것도 의미가 있었어요. 그리고 미국에는 대학마다 그런(여행 관련) 장학제도가 많아요. 졸업할 때 베스트 디자이너를 뽑아서 ‘트래블링 펠로십’을 주는 거예요. ‘로마상’을 비롯해 무척 권위 있는 상도 있고요.

졸업 후 ‘그랜드 투어’를 지원해주는 개념이군요.
그렇기 때문에 나도 (한국에서 얻은 수익으로) 한국 젊은이가 외국을 여행하고, 외국 건물을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돈도 돈이지만 여러 이유로 젊은 학생들이 건축을 보러 외국 여행을 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도 쉽지 않으니까요.
포트폴리오를 우리에게 보내면 심사한 다음 내가 한국에 와 면접 심사를 해서 그중 한 명에게 상을 주는 제도였어요.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한국에도 젊은 건축가에게 주는 상이 많이 생겼다고 하대요. 45세 이하까지 건축가 작품을 선정해서 전시해주는 상도 있고요. 그런 상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보기엔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사람 중 좋은 사람을 뽑아서 선정해주는 거지만. 내 취지는 조금 달랐어요.

어떻게 달랐습니까?
말하자면, (그런 상은) 이미 꽃핀 사람들 중에서 어느 꽃이 아름다웠는지 뽑는 거예요. 그에 비하면 내 아이디어는 싹이 트기 전이지만 싹이 나오려 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이 싹이 정말 좋은 꽃이 될 수 있을지, (그걸 보겠다는) 아이디어였어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지원한 사람이나, 사무실에 들어간 지 몇 년 안 된 사람, 이런 사람들 중 앞으로 꽃이 필 수 있는 사람이 있나(를 찾아보겠다는), 그런 취지입니다. 그러니까 ‘히트 앤드 미스’가 있죠. 이번에 돌아보니 수상자 30여 명 중 한 20명이 건축에 종사하고 있더군요. 아주 놀랍게 성공한 거라고. 나의 첫 번째 것을 누군가 인정해준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수상 기준 중 흥미로운 게, ‘한 번씩은 비서울대 출신을 뽑는다’는 규칙이었습니다. 소장님께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셨는데도요. 흥미롭고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서울대 거참 이상해. 내가 지금 서울대학을 좀 이야기하려는데, 서울대학 졸업했어요?

아닙니다. 서울대 안 나왔습니다.
오케이, 그럼 잘됐어요. 수상을 시작하고 몇 년 동안은 서울대학 졸업한 사람이 몇 명 수상하더라고요. 나중에는 서울대학 출신이 없어요. 나는 절대로 (지원자의) 학교 같은 거 안 보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지원자의 70~80%가 서울대가 아니에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서울대에서 ‘이 상이 굉장히 받기 어렵다’고 알려졌다더군요. 서울대학 졸업한 사람들의 멘털이 어떤가 하니, 이 사회에서 서울대학 들어가면 이미 특권층이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 떨어지는 걸, 포트폴리오를 제출해서 뽑히지 않는 걸 겁내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서울대학에 가서도 “너희들은 건축가가 된다는 면에서는 좀 불행하다”고 그랬어요.
 


“나의 첫 번째 것을 누군가 인정해준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서울대학도 건축도 모릅니다만, 왜일까요?
아니 한국에서 서울대학에 들어가면 이미 특권을 따낸 것같이 생각하는데, 건축가란 무슨 대학교 그런 거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발견해서 자기의 도구를 만들어서 (그 도구로)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좀 엉뚱하고, 정말 모험을 할 줄 알고, 그런 ‘오드 볼’이 되어야 하는데, 서울대학 들어간 사람들은 안 그렇죠. 그 반대 아니에요. 안전한 데로만 가려고 하고. 그래서 건축가가 되려면 너희들은 불행하다고 한 거예요. 상 받은 사람 중에서도 서울대학 졸업한 사람은 20%가 안 돼요.

소장님께서도 다양한 건축 여행에서 많은 경험을 얻으셨습니까?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작품 들을 보러 여행 많이 했죠. 대학 졸업하자마자 여행을 더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했고요. (건축 여행을) 가서 뭔가를 배운다는 것보다도, 내가 믿고 좋아하는 것을 갖고 있다가 그곳에 가서 보고 ‘이 건물이 내게 좋은지 나쁜지’를 생각해보는 거예요. 객관적인 게 아니라 주관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건축과 비춰 보는 거죠. 그곳에 가서 ‘건축을 어떻게 만드느냐’ ‘이 건물의 어떤 게 좋으니까 이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는 거예요. 아주 조그마한 건물이라도 가서 보고는 ‘내가 이때까지 생각했던 게 있는데 이 건물을 보니 그 생각이 기가 막히게 구현됐구나’ 등의 생각을 할 수 있죠. 그래서 자기가 믿는 걸 더 강화하는 것, 그런 경험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소장님도 자신이 믿는 걸 강화했던 경험이 있으세요?
내가 미국을 1961년에 갔어요. 우리나라 현대 건축 초기거든요. 김수근, 김중업, 두 분이 정말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건물을 몇 개 짓기 시작하고 그럴 때, 한국 건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럴 때 내가 대학을 다니고 졸업했는데, 내가 굉장히 열의가 있었나 봐요. 젊은 친구들과 건축 잡지를 만들었는데 내가 한국을 떠나니 그것도 끊어졌어요. 그때는 건축 교육이라는 게 미비할 때였는데 내가 예일대학에서 좋은 선생을 만났어요. 그분의 지도가 새로운 내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어요. 그때 느낀 것이 굉장히 중요했죠.

어떤 걸 느끼셨습니까?
그때 클래스메이트 중에 나중에 아주 유명해진 친구들이 많았어요. 노먼 포스터 같은, 그런 친구들이 그야말로 우리 클래스를 휘어잡았지. 나는 한국에서 바로 온 사람이었고요. 그래서 학기 중에도 고생했죠. ‘어떻게 해야 뭔가 할 수 있나’ 싶고. 남의 것 흉내 내봐야 별것 없고. 한 번은 무슨 프로젝트를 하는데, 내가 뉴욕에 있는 시그램 빌딩을 가보니까 참 마음에 들더라고요.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건축 언어에 기반을 두고 만든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것을 기반으로 학교에서 설계를 했거든요. 그때 다른 아이들은 굉장히 조각적으로 설계해서, ‘나는 창의력이 없구나, 그리고 기반도 없어서 다른 아이들처럼 재미있는 걸 못 하는구나’ 싶어서 굉장히 고민을 했어요.

그때가 에로 사리넨의 건축처럼 눈에 띄고 화려한 게 유행하던 때죠?
아 그럴 때죠. 사리넨. 건축 많이 아시네. 그럴 때라 하루는 내가 (설계 작업을 하다가) 모든 걸 다 바꿨어요. 밤을 새워서 조각같이 다 바꿔본 거예요. 그랬더니 선생이 와서 너 뭐 하느냐고 물어봤어요. 내가 안 되는 영어로, “다른 아이들은 다 눈에 띄는 걸 만드는데, 나는 창의력이 모자란 것 같아서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만들고 싶어 바꿔봤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학생들 보고 다 오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칭찬해주었나요?
“이 학생이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내가 보니 굉장히 섬세하고 미적 감각이 있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뭔가 해보려고 애쓰는 게 보여서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엉뚱하게 다 바꿔놔서 왜 그런지 물어봤더니 ‘다른 아이들처럼 해보고 싶어서’라고 하더라”고 말했어요. 그렇게 (남을 따라) 하는 것이 건축이 되는 길이 아니란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건축이란 옳고 그른 게 없고, 충실하게 자기의 기반으로부터 뭔가를 만들어나가야 앞으로 너만의 뭔가를 만들 수가 있단 말이었어요. 저널리스트라면 자기 목소리가 있어야 하고, 작곡가라면 자기 소리가 있어야 하듯, 건축가도 자신만의 툴(도구)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죠. 어떤 툴이 좋고 어떤 툴이 나쁜 건 아니에요. 그저 다른 사람의 툴을 빌리지는 말아야 해요. 자기만의 툴을 만들어야지. 그때 내가 며칠 동안 고생해서 생각했던 걸 끝냈어요. 내가 하던 걸로 돌아갔죠.

소장님에게 ‘내가 하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영국이나 캐나다에서 온 아이들은 서양 문화의 깊은 지식을 배운 사람들이에요. 그때 우리는 전혀 안 배웠거든요. 그러면 어디서 내 것을 찾아서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게 내가 한국전쟁 때 잠깐 살았던 경상남도 함양의 칠원 풍경이었어요. 그 초가 풍경 이미지가 자꾸 나한테서 (건축 결과물로) 나오더라고요. 한국 초가집 지붕들의 반복되는 모습, 단순한 재료, 모노톤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힘 있는 이미지. 한국 돌담의 레이어나 시퀀스. ‘이건 내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나만이 본 풍경을 건축에 반영하는 걸) 시작한 것 같아요. 선생님의 ‘다른 사람 말고 너만이 가진 걸 찾아라’라는 이야기처럼 해본 거죠. 그래서 예일대학 졸업 작품으로 하우징 프로젝트를 할 때 내 마음속 시골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만들었어요. 그게 내가 생각할 때 나의 첫 작품이었죠. 내가 내 도구로 만든 작품. 그때 졸업생이 18명쯤 있었는데 그중 3명을 뽑아 전시했고, 제 것도 들어갔어요. 그때 자신감이 생긴 거예요.

분야를 넘어 이른바 창작하는 모든 사람에게 무척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젊은 건축가나 뭐 다른 분야나, 외국의 평가를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어디 상을 받았다거나, 외국의 유명한 누가 인정했다거나. 정말 자신이 만든 것이 되어야만 진실하고 좋은 예술도 만들 수 있고, 계속되는 우리 자신의 것을 만들 수 있어요. 우리 건축가들도 외국 누구와 비교한다든지, 외국 어디의 인증을 받았다든지, 그런 것에 치중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야겠죠. 그런 날이 올 거예요.

저도 건축 여행을 좋아합니다. 저 같은 아마추어가 건축 여행을 할 때 ‘이런 걸 보면 좋다’ 같은 팁이 있을까요?
글쎄요, 어려운 질문인데. 내가 가본 곳 중 아직도 인상이 굉장히 깊게 남아 있는 곳이 있어요. 내가 건축하니까 할 수 없이 인상에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카이로 남쪽 사카라에 아주 오래된 이집트 고건축들이 있어요. 기원전 5000년쯤에 지은 게 남아 있다고 하니 건축으로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이에요. 그런데 이 집을 보면 벌써부터 인간이 뭔가를 만들 때 그냥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 걸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아치를 봐도 그렇고 기둥 쓴 걸 봐도 그렇고. 그때가 약 7000년 전이겠죠? 거기 뭔가 지을 때부터 그냥 짓지 않고 아름답게 지어보겠다는 욕심, 그게 건축이에요. 그냥 집을 짓지는 않겠다는 인간의 기본적 욕심이 7000년 전 사카라 건물에 담겨 있다고요. 건물을 지을 때 그냥 지으려면 아무나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사람이 먹고살 게 충족되면 좀 더 아름다운 걸 원하게 돼요. 그 아름다운 게 뭐냐, 그게 질문인 거죠.


“거기 뭔가 지을 때부터 그냥 짓지 않고
아름답게 지어보겠다는 욕심, 그게 건축이에요.”


그렇죠, 아름다움을 향한 본능이 있죠.
아름답게 만들어보겠다는 본능이 있다면 자기에게 가장 충실해야 해요. 뭘 만들어도 뭔가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야 하고. 나는 복잡한 걸 싫어해요. 아이들도 소박하게 키웠어요. 우리 세대는 전쟁도 있었고, (기존 세대가) 거치지 않은 걸 겪으니 나만의 것이 나타났죠. 그런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옛날이야기지만 그런 면에서 젊은 시절 함께 일하셨던 필립 존슨과는 잘 맞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건축을 어떻게 만드는지 그런 건 잘 배웠어요. 디테일 같은 것. 그 사람이 디테일이 좋거든요. 루이스 칸 건물을 보면 그 사람도 굉장히 고전적인 아이디어에 기반을 둬서 건물을 만들어요. 코너를 처리하는 방식 같은 면에서. 미스 반데어로에도 마찬가지고. 필립 존슨도 보면 건물 디테일은 새로운데 건축의 기본인 기둥 같은 것들은 클래식했어요. 두 재료를 어떻게 사용한다든지, 그런 걸 배우며 신나게 했죠. 필립 존슨과 함께한 약 5년 동안 큰 건물을 많이 만들었어요. 제가 한국의 현대미술관 현상 설계가 선정되기 전까지 내 작품으로는 큰 걸 못 해봤거든요. 초등학교나 해군 훈련 센터 같은 건 약 1000~1500평 정도인데 미술관은 약 1만 평이었습니다. 당시 젊은 건축가에게는 엄청난 일이었죠. 그래도 그때 필립 존슨과 해봤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어요. 제가 현대미술관에서 당시 구현한 디테일이 그때 한국에서는 높은 수준이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필립 존슨과는 어떤 게 안 맞으셨습니까? 회고록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필립 존슨이 예쁜 걸 좋아해서요?
그 사람은 미국에서도 굉장히 상류층 집안 출신이거든요. 건축적인 기본, 기본적인 뿌리는 없는 사람이에요. 유행에 따라서 처음에는 모더니즘 같은 걸로 아주 좋은 걸 했죠. 나 있을 때만 해도 괜찮았어요. MOMA도 하고 예일대학의 타워도 짓고. 그러다 개발업자들이 그에게 큰 건물을 맡겼어요. 그럴 때 ‘클래식하게 해달라’고 하면 그걸 다 해주는 식으로 원하는 걸 다 해주다가 자기 평판을 망쳤죠.

소장님은 1970년대부터 미국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아시아 남자가 미국 동부에서 자리 잡는 게 어렵지는 않았습니까?
그렇죠. 내가 미국에 갔을 때인 1960~70년대만 해도 동양 사람이 아주 적었어요. 중하류층 사람들은 인종차별도 심했죠. 아파트를 구할 때 전화로는 있다고 했는데 우리가 가면 “없어졌다”고 하던 때예요. 일화를 하나 이야기한다면, 내가 운이 좋아서 하트퍼드로 올라가 상을 받아서 지역 신문에 나오고, 그다음에도 경쟁해서 뽑힌 게 신문에 나오는 식으로 알려졌어요. 그래서 프레젠테이션에 가면 저를 아는 사람이 있죠. 조금 상류층 커뮤니티에 가면 그 사람들은 인종적 편견이 없어요. 한 번 그럴 때 프레젠테이션을 가서 인터뷰를 했더니 끝나고 엔지니어가 이렇게 말해줬어요. “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반도 못 알아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에게 열의를 보여줬어요. 당신이 저 일을 맡을 겁니다.” 그게 미국 사람의 사고방식이에요. 좋은 점이죠. 그들은 리스크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적어도 상류층이라면. 저 사람들이 봤을 때 동양 남자가 왔는데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그의 이야기를 다 이해는 못 하겠지만 상은 좀 받았고 말하는 게 기운차다면, 우리는 리스크를 감수하겠다. 그런 거예요. 내 아이디어는 ‘내가 생각하는 마음을 그대로 그냥 이야기하기’였어요. 그러면 어떤 때는 되고 어떤 때는 안 되고.

소장님도 리스크를 감수한 면이 있죠. 그 옛날에 그 공부를 하신 건데, 한국에 오셨다면 엘리트 건축가로 더 편하게 지내실 수 있었을 텐데요.
하트퍼드에 사무실을 내기 전에 한국에 몇 개월 있어봤어요. 정말 한국에 있을 건지 미국에 있을 건지 한번 보려고. 1969년이면 박정희 대통령이 있던 때고 경제도 제대로 될 때가 아니었거든요. 내가 건축가 김수근 씨와 잘 알았어요. 그때 그분이 했던 이야기가 있어요. 나는 지금 정치적으로 좋은 입장에 있어서 일이 많지만 한국에는 일이 없다고. 당신은 미국에서 이름도 있고 좀 더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으니 미국에서 좀 해보고, 들어오려면 그다음에 일을 해서 들어오는 게 가장 나을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미국에서 성공한다면 한국 젊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굉장히 클 거라고도 하고. 김중업 씨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건축이라는 건 한 번 일을 시작하면 금방 떠나지 못해요. 그러다 보니 그냥 미국에 머물게 된 거죠.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건축 활동을 하신 것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까? 미국에서의 작업으로 한국에서 현대미술관 같은 대형 건축을 하시고, 한국에서의 경험이 미국에서 하시는 일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프로그레시브 아키텍처>의 평론가가 나를 두고 ‘(한미) 두 군데에서 작품을 하는데 양쪽 작업이 모두 편안해 보인다’고 한 적이 있어요. 저는 땅을 보면 바로 아이디어가 생각나요. 한국에 오면 한국의 풍경이나 주변을 보면서 건축 아이디어를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는 미국의 풍경 특징이 있고요. 내 건축의 기본 아이디어는 대지와 주위의 조화를 바탕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 건축이라도 대지에 가장 적합한 건축을 하는 것이니 (건축이 땅에) 편안하게 맞는 거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릴 때 본 함양 칠원의 풍경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할까요?
그 이미지가 나 자신과 맞으니 그 이미지가 내게 온 거겠죠. 그 단순성, 장식이 없는 것, 모노톤, 그런 것들이 나 자신에게 편안했던 것일 테니까. 자기를 안다면 자신에게 편안해져야 해요. 자신이 있으면 그렇게 되고요. 그렇지 않으면 자꾸 곁눈질을 하죠. 저 사람 작품, 이 사람 작품처럼 남의 것을 보려 하고.

구술집에서 해주신 말씀 중 ‘(자신에 대해) 바보처럼 완고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 것과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이 말씀에 무척 동의했습니다.
좋든 그렇지 않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믿어야 해요.

소장님은 젊은 시절부터 자기 자신을 100% 믿으셨나요?
돌이켜보면 예일대학에서 공부할 때, 우리 교수가 이야기해주고 내가 몇 개월 동안 그 고통을 겪으면서 생기지 않았나 생각해요. 자기를 믿는 게.

건축 분야를 넘어 이른바 ‘크리에이티브’ 영역에 젊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요즘 젊은 창작자들도 나름 고생을 합니다. 선배 창작자로서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나요?
‘하이 컬처’ 부문에서 이야기한다면, 외국 사람이 한국을 인정한다는 사실에 민감해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한국의 건축계는 ‘프리츠커 상을 한국인이 왜 못 받냐’는 말을 하는데, 그거하고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프리츠커라는 건 미국에서 몇몇 건축가들이 모여서 하는 거예요. 걔네들이 한국을 뭘 알아요?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니까 뽑고 그러는 건데, 그런 것에 관심 좀 안 가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자신이 어떤 작품이 좋은지 나쁜지 몰라요? 우리 자신도 뭐가 좋고 나쁜지를 모르면 좋은 걸 어떻게 만들어요. 우리 자신이 한국에서 뭐가 좋은지를 알아야죠. 우리가 올라갈수록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외국의 영향에 너무 민감하지 말아야죠.

건축가로 오래 활동하시다 보니 건축 설계의 도구 변화도 실감하실 듯합니다. 이제 손에서 컴퓨터로 작업하는 시대가 되었을 텐데요, 도구가 변하면 건축 결과물도 바뀝니까?
그게 걱정이에요. 노인의 마음에서 나오는 걱정이랄까. 나는 아직도 옛날 방식으로 스케치하고 모형 만드는 방식으로 작업해요.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로 도면을 만들고 3D로 작업하죠. 나는 건축이나 예술을 시각적으로만 접근하려는 마음과는 잘 안 맞아요. 뭔가 만드는 건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해야죠. 나는 늘 이야기해요. (이 건축에서) “너의 아이디어는 무엇이니?” 시각화 전에 아이디어가 명료해야 시각화된 게 좋죠. 컴퓨터로는 예쁘고 멋있는 비주얼을 나타낼 수 있어요. 그런 게 요즘의 기풍이잖아요. 건축도 마찬가지예요. 젊은 사람들은 다 컴퓨터로 하니까. 컴퓨터로 하면 별 형태를 다 만들 수 있으니까. 그 앞에서 물어봐요. “너의 아이디어는 무엇이니? 이 (형태의)기반에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니?” 그 질문을 안 하고 모양만 잡는 경우가 있어요. 모양은 패션같이 ‘컴 앤 고’ 하는 거예요.

무척 동의합니다.
내 나이가 지금 80이 넘었습니다. 내가 건축을 시작할 때는 클래식 모더니즘이 있었는가 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있고, 그다음에 뭐도 있고 뭐도 있는 식으로 자꾸 바뀌는 거예요. 그중에서도 강한 아이디어가 없다면 형태는 사라지고요. 어떤 예술이든 마찬가지예요. 어떤 강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 창작물이 남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젊은 아이들은 “그는 옛날 식이야”라고 해요. 나도 말하죠. 오케이. 내가 옛날 식이야.(웃음)

소장님께서 작업하신 건물 중 어떤 걸 가장 좋아하세요?
다들 내 집을 좋아해요. 우리 집을 지을 때 나는 돈이 많지 않았죠. 어떻게 하면 우리 네 식구가 살 수 있는 작은 집을 값싸게 지을 수 있나 생각하며 지은 게 그 집이었어요. 그러니까 단순하고 수수하고 소박했죠. 어떻게 땅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도 뭔가 아이디어가 있는 집을 만들려고 했어요. 한국의 미닫이 같은 요소를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좋아해요. 미들베리 초등학교도 좋고,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도 좋아요.

창작자가 창작물로만 후대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장님께서는 한국 최초로 미국에서 건축가로 자리 잡으셨고, 젊은 건축가들에게 여행이라는 귀중한 기회이자 선물을 30년 넘게 주셨습니다. 그 역시 아주 훌륭한 업적이라 생각합니다만, 소장님 본인은 어떤 건축가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음, 나는 자신을 대단한 뭔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걸 신경 쓰지도 않고요. 나는 자신에게 정직하려 했어요. 한 10년 전인가, 어느 서울대학 교수가 내게 “(한국 사회에) 어떤 충언을 해주고 싶냐”고 물었을 때도 그랬어요. 정직해야 한다고. 그때는 우리나라에 부패가 많았거든요. 이제 한국의 부패는 많이 없어진 걸로 알고 있지만.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지만 주변을 기웃거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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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박찬용
Photography 송시영

2024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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