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FASHION MORE+

GRUNGE 2.0

그때와 같고도 다른 요즘 시대의 그런지코어.

UpdatedOn January 05, 2024

/upload/arena/article/202401/thumb/55218-528737-sample.jpg

처음 밴드 티셔츠를 사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려 보이는 이미지 탓에 나는 언제나 강하고 세 보이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살았다. 그래서 그 방편으로 가죽 소재의 옷들을 마구 사들일 때가 있었다. 가죽 바지, 가죽 재킷, 가죽 코트, 가죽 부츠 등 다양한 종류로. 이왕이면 너무 새것보단 자연스럽게 태닝된 헌것으로. 그리고 그와 함께 입고 싶었던 건 바로 너바나의 밴드 티셔츠였다. 음악도 물론 좋았지만 심드렁한 태도 속에 반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커트 코베인의 모습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를 상징하는 티셔츠를 입으면 나도 왠지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치기 어린 마음이 그때는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런 생각이 희미해질 때쯤, 우연히 세컨드 핸드 숍에 들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각각의 사연들이 짙게 묻은 티셔츠들 중 너바나의 밴드 티셔츠를 발견했다. 오래전 투어 콘서트의 굿즈라 가격이 매우 비싸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지만, 집에 돌아와 온라인 마켓 그레일드에서 미친 듯이 검색했다. 적게는 1백 달러부터 많게는 6천~7천 달러를 웃도는 것까지. 천차만별의 가격대를 실감하다 결국 또 포기하고 말았다.

음악은 언제나 패션과 뗄 수 없는 장르다. 마돈나, 데이비드 보위 등 유명 뮤지션들의 스타일은 통념을 깨고 새로운 패션 스타일을 개척하는 혁명적인 역할도 종종 해왔다. 그런지 룩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지는 하드록, 펑크, 헤비메탈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좀 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사운드로, 기성 사회에 반기를 든 반항적인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됐다. 그런지 음악과 패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었다. 빛바랜 프린트 티셔츠, 플란넬 셔츠, 찢어진 청바지와 헐렁한 카디건, 가죽 부츠 등 다양한 질감을 혼합하는 특유의 무심한 스타일링은 자연스럽지만 멋스러웠다. 그렇게 음악과 일맥상통하는 그의 패션은 세상을 향한 또 다른 발언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패션의 유행은 손쉽게 바뀌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스키니한 실루엣, 화려한 장식이 넘실대며 그런지 룩은 자취를 감췄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고 코로나19가 몰고 온 패션의 암흑기를 통과한 뒤, 드디어 그런지 룩이 돌아올 조짐이 보였다. 1990년대 패션이 인기를 끌면서 인스타그램과 텀블러에선 지난 시절의 아이콘들을 아카이빙한 계정이 생겨났고, 그런지 룩을 대표하는 커트 코베인, 조니 뎁과 케이트 모스, 크리스 코넬 등의 스타일이 다시금 언급됐다. 콰이어트 럭셔리, 올드머니와 같은 이상한 별칭이 통용되는 세상에 그런지 룩이 돌아와 별나고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펼치길 바랐다.

나의 바람대로 그런지 룩은 이전보다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방시는 길이와 소재, 패턴이 모두 다른 옷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레이어링해 그런지코어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또한 구찌에서는 성글게 늘어진 니트와 기다란 체크 스커트를 매치해 성별의 경계를 허문 룩을 선보였다. 특유의 섹슈얼한 요소를 더한 디스퀘어드2는 실키한 레이스 슬립 톱과 플란넬 체크 셔츠를 매치한 룩을 완성했으며, 마르지엘라는 늘어진 미키마우스 티셔츠에 체크 쇼츠와 라텍스 쇼츠를 겹쳐 입은 후, 헤드피스를 씌워 전위적인 느낌을 더했다. 이 밖에도 에곤랩, 디젤, 루이 비통 등의 브랜드에서 과거의 전형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현대적인 변형으로 새롭게 완성한 다채로운 그런지 룩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지 정신은 젊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젊은 세대가 토로하는 불안과 불만, 그리고 갈망 또한 품고 있다. 오늘날에 보이는 이러한 기조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반발심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뭐든 꿈틀대고 움트는 일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 희망적이다. 그저 진실된 마음과 유효한 의심을 품고 자유롭게 나아가면 그뿐.

너바나와 함께 그런지 록을 주류의 음악으로 만든 펄 잼의 데뷔 앨범 <TEN>.

너바나와 함께 그런지 록을 주류의 음악으로 만든 펄 잼의 데뷔 앨범 <TEN>.

너바나와 함께 그런지 록을 주류의 음악으로 만든 펄 잼의 데뷔 앨범 <TEN>.

그런지 음악의 열풍을 몰고 온 너바나의 정규 2집 <NEVERMIND>.

그런지 음악의 열풍을 몰고 온 너바나의 정규 2집 <NEVERMIND>.

그런지 음악의 열풍을 몰고 온 너바나의 정규 2집 <NEVERMIND>.

3 / 10
/upload/arena/article/202401/thumb/55218-528741-sample.jpg

그런지 룩을 대표하는 아이코닉한 인물들을 주로 업로드해 젊은 세대의 인기를 끌고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들. (왼쪽부터) @1990archives @kurt.cobain.content @reels.grunge

그런지 룩을 대표하는 아이코닉한 인물들을 주로 업로드해 젊은 세대의 인기를 끌고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들.
(왼쪽부터) @1990archives @kurt.cobain.content @reels.grunge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이다솔
Photography 쇼비트, 인스타그램

2024년 01월호

MOST POPULAR

  • 1
    MOOD FOR BLACK
  • 2
    TAKE 3
  • 3
    신세경이 쓰는 향 다 알려줌
  • 4
    제주 판타지
  • 5
    Your Scent, Your Style

RELATED STORIES

  • FASHION

    건조한 겨울로부터 당신의 헤어를 케어해 줄 방법

    건조하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철에도 건강하고 윤기 나는 헤어와 두피를 유지하기 위한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과 제품을 소개한다.

  • FASHION

    보트를 탄 샤넬

    샤넬 J12가 브랜드 최초로 보트 레이스의 타이틀 스폰서 겸 공식 타임키핑 파트너로 활동한다. 기대되는 2025 샤넬 J12 보트 레이스에 대하여.

  • FASHION

    Radiant Innovation

    글로벌 출시 10주년을 맞이한 아이코스가 스티브 아오키와 만났다. 페스티벌의 에너지를 입은 아이코스 X 스티브 아오키 10주년 한정판 시리즈.

  • FASHION

    GET READY WITH ME

    반짝이는 연말을 위한 휘황하고 찬란한 준비물.

  • FASHION

    WELCOME TO SILKY WAY

    지난 10월 10일, 에르메스는 무한한 우주에 실크의 매력과 상상력을 더한 특별한 여정을 펼쳤다. 약간의 힌트만 남긴 비밀스러운 밤, 단 하루 펼쳐진 브리드 드 갤럭시(Brides de Galaxy)를 위해 서울을 찾은 에르메스 남성 실크 스카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프 과노(Christophe Goineau)와 이 여정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눴다.

MORE FROM ARENA

  • VIDEO

    하니가 아닌 안희연

  • REPORTS

    소녀들의 자취방

    우주소녀가 첫 정규 앨범 활동을 마친 여름의 끝자락. 휴식기에 접어든 엑시, 성소, 은서, 설아, 미기 다섯을 망원동 자취방에서 만났다.

  • ARTICLE

    Country Road

  • FASHION

    Young & Elegance

    2022 S/S 시즌 밀란 패션 위크에서 마주한 신선한 여름의 낭만, 고고한 우아함이 깃든 인상적인 쇼 2.

  • LIFE

    '만찢남' 오타니의 약점은?

    오타니 쇼헤이는 현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다. 그는 메이저그리에서도 돋보이는 거구에 훈훈한 얼굴, 호감 가는 인상에 투수와 타자 모두 일류 수준에 도달한 이도류의 정점, 160km/h 강속구를 던지고 신기록을 경신 중인 홈런왕이다. 이 완벽한 남자의 습관은 쓰레기를 줍는 것이라 한다. 그에게도 분명 약점은 있을 것이다.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