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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의 도구와 언어

<거미집>으로 돌아온 김지운이 말하는 자신의 영화적 도구와 영화적 언어.

UpdatedOn September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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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시드니 영화제부터 평론가들의 호평이 들려왔습니다. 우아하고도 독특한 코미디라며 초기작인 <조용한 가족> <반칙왕>을 언급하더군요.
작년에 후반 작업이 끝났고 영화제를 먼저 가게 되었어요. 출연 배우들이 정말 잘했어요. 앙상블, 연기의 합이 좋은 작품입니다. 외국 영화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연기력 뛰어난 배우들 여럿이 합을 맞추는 영화를 늘 만들고 싶었거든요.

특유의 은은하게 곱씹을수록 웃긴 우아한 유머로 이해하면 될까요?
저는 그런 게 웃겨요. 웃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겠는 상황이요. 작정하고 웃기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고요. 항상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없는 뉘앙스가 충돌하거나 미묘한 게 웃음 포인트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걸로 제 영화의 유머 코드를 만들어요.영화적 전략이 아니라 저는 진짜 그런 게 재미있거든요. <거미집>도 그런 식으로 깨알 같은 잔재미가 도처에 깔려 있어요. 그걸 잘 따라가시면 계속 웃음이 터지실 거고요. <조용한 가족>도 그렇고, <반칙왕>이나 <달콤한 인생>이나 제 웃음 코드를 두고 키득키득 혹은 킥킥이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거미집>도 그 연장선에 있어요. 오랜만에 선보이는 앙상블 코미디 영화이고, 아수라장 소동극이 일어난다는 지점 때문에 <조용한 가족>을 많이 언급하세요.

작품마다 장르가 변화하는 게 놀랍습니다. 매번 장르를 달리하고 변화할 때, 힘들지는 않으세요? 전작에서 깨닫고 배운 것을 또다시 써먹을 수 없고 맨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셈인데.
힘든 것보다 오히려 같은 거, 했던 거를 반복하는 그 지루함과 무료함이 더 힘들어요. 저도 제 영화에 대해서 새로운 걸 한다는 점에서 계속 궁금하거든요. 결과만 보면 이번엔 잘했네, 실패했네 이러는데, 내가 궁금하고 보고 싶고,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늘 궁금한 거, 그게 저의 절박한 지점이에요. 성공하고 히트할까, 하는 것보다 정말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새로운 영화적 소재와 장르를 만나서 또 어떤 이상한 영화가 나올까? 기대하거든요. 그 기대감에 영화를 만드는 에너지가, 그다음 영화는 뭘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되더군요.

나를 어디까지 멀리 보낼 수 있나, 라는 생각으로 도전하시는 걸까요?
제 안에 뭐가 더 들어 있는지 보려고 하는 생각도 있어요. 멀리 간다는 거, 움직임이 느껴진다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내 안에 또 다른 새로운 게 뭐가 있나, 어떤 것들을 갖고 있나 이런 것이 궁금한 거죠.

영화로 만들기 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하고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모르시나요?
그렇죠. 발견이 안 되죠. 시나리오를 썼는데도 진짜 모르겠고 이게 맞나? 하는 지점이 있어요.
촬영장에 가서 사람들을 앉혀놓고 서로 대사를 주고받다 보면 순간 서서히 올라오는 감정이 있잖아요. 그걸 느끼면서 이거는 이렇게 해야 되는구나, 그때 답을 얻을 때가 많아요.

현장에서 순발력 있게 직관적 판단이 된다면 재능 아닐까요?
재능이라기보다 오히려 재능이 없는 것일 수도 있어요. 시나리오에서 다른 사람들은 뻔히 다 미리 보는데 왜 너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못 보고 현장 가서 보느냐, 이럴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면 감독님이 도구로 삼는 게 텍스트가 아니라 화가처럼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영화 주간 GV를 진행하며 같은 영화(아녜스 바르다의 <행복>)를 보았는데 내레이션 서사에 갇히지 않고 영화를 이미지 그 자체로 이해하시는 모습 때문에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자막 없는 외국 영화를 많이 봤어요. 영화 속 미장센, 인물이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 걸까? 언어로는 이해를 못하면서 계속 그걸 집중해서 보게 되니까요.

한국어 자막 없이 보신 건가요?
없었어요. 만약 자막이 있었더라도 글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던 4~5세 때라 봐도 몰랐을 거예요. 아버지가 영화광이셔서 밤늦게 <주말의 명화> <토요극장> <토요명화> 이런 것을 둘이서 같이 봤어요. 아버지랑 저만요. 가족 중에 두 사람만, 가장 집안의 연장자, 가장 나이 어린 저만 깨어 있는 채로 그 밤에 계속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거예요. 아버님이 워낙 영화광이셨고, 아주 어릴 때부터 같이 영화를 보면서 대사 없이 영상 언어에 익숙해질 수 있었어요. 저희 아버님이 이 세상을 책을 통해서 아신 분이었어요. 영화를 보면서 당신이 책을 통해 얻은 정보와 지식을 계속 저한테 말씀해주셨어요. 스티브 매퀸이 레이싱광이고,악역 전문 리처드 위드마크가 사실은 지적이고, 셜리 템플이 유엔 명예대사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누구랑 만났다 헤어지고 스캔들, 가십도요, 그러다 보니 세상 어떤 것보다도 영화와 배우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어요. 저희집이 만화 가게도 했거든요. 어릴 때는 만화를 좋아해서 직접 그리기까지 했는데, 말풍선에 대사를 써야 해서 한글을 배웠어요. 그 당시에는 학교에 한글을 깨우치고 들어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저는 학교 가기 전 나만의 만화를 그리고 싶어서 한글을 조금씩 익혔어요. 아버지가 동네 유지라서 저희 집에서 배급 밀가루, 국수를 나눠줬어요. 다들 오셔서 밀가루나 국수를 받아서 산동네로 다시 올라가셨거든요. 그걸 지켜봤어요. 또 그때는 문맹이 흔하던 시절이라 아버님이 사법 서사를 하셨는데 이력서나 사유서 같은 것들을 대신 써주고, 돈을 받으셨어요. 글을 모르니, 서류 작업을 할 수 없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자막이 없거나 더빙이 안 되어 있는데도 지루하지 않으셨나요?
전혀. 오히려 집중을 하게 되는 거죠. 화면 속 사람 표정이 더 선명하게 보이죠. 감각이라는 것은 언뜻 주어진 정보가 많으면 다른 감각에 소홀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종합적으로 정보가 많으면 훨씬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또 다른 부분은 약화되기도 해요. 특히 영화는 텍스트보다 감독이 영상에 집중해서 모든 것을 영상으로 얘기하죠. 어렸을 때부터 화면 속 인물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고 어떤 상황인가, 이런 것들을 알 수 있었어요. 집에 오는 사람들도 다양하니까 그분들 표정을 보면 저 사람이 어떤 상황이고, 감정 상태가 어떻다는 걸 일찍 눈치챘죠. 사람들이 진짜 하고 싶은 말과, 막상 입에서 나온 말이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고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저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이런 것들, 내뱉는 말의 그 이면을 많이 생각했어요.
저는 필름 스쿨에서 영화를 전공한 게 아니에요. 어렸을 때 봤던 외국 영화들, 석 달 정도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봤던 영화들을 통해서 영화를 이해하고 배웠어요. 영화는 영상으로, 이미지로 얘기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구나, 일찌감치 깨쳤어요.
영화라는 매체를 다른 장르와 구분 짓는 건, 시간의 지속성, 흐름 안에서 영상으로 얘기를 전달하는 것, 그걸 언어화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화면을 움직이지 않고 정지된 채 두어도 시간성이 생기죠. 미술은 이미지를 쓰는 건 같지만 시간이 배제돼 있어요.그런 의미에서 영상이 갖는 시간성은 영화를 다른 매체, 다른 예술 장르와 가장 구별되게 해주죠. 정해진 시간 안에서 어떤 감정 또는 어떠한 말을 전달할 것인가? 그게 감독이 하는 일이에요.

영화의 언어를 일찌감치 깨달으셨군요.
영화의 언어에 대해서 얘기하다 보니까 생각나는데, <거미집>이 특히 한국어를 통해서만 얻는 영화적 쾌감이 강렬한 작품이거든요. 부커상도 인터내셔널은 번역가한테 상을 주잖아요. <거미집>의 언어 대사는 전문 번역 진짜 잘하는 사람, 우리말의 뉘앙스를 고스란히 영어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번역을 맡은 달시 파켓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번역 작업 중, <거미집>이 가장 어려운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어를 아는 분만이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으니 <거미집>은 해외 평보다 국내 평이 더 좋을 거란 생각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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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집> 속 김 감독은 결말을 바꾸면 걸작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혹시 감독님도 다 찍었는데 후반 작업 중 다시 찍고 싶은 적이 있으셨나요?
많죠. 그럼요. 계속 그런 아쉬운 장면이 마음에 항상 있어요. 남들은 모르지만 나한테는 항상 아쉬움이 있죠. 내가 제대로 했나 스스로 고민도 되고, 실제로 아쉬운 것도 있고요. 이걸 더 했어야, 더 갔어야 되는지, 아니면 어떤 지원이 더 있어야 되는데 제 자신과 외부에 대한 뭔가 아쉬움이 남고, 내가 타협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죠. 상업적으로 타협했다기보다 시간에 쫓기고, 예산도 한정적이라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찾는 것이 감독이잖아요. 그러니 항상 최상의 것을 할 수는 없어요. 60분 안에 최고로 할 수 있는 건 집을 지어봐, 또는 그림을 그려봐처럼 주어진 조건 안에서 해야 되고요. 그래서 (시간이나 자원이 무한히 주어졌을 때처럼 ) 최상의 것은 나올 수 없어요.
그럼에도 이런 부족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해냈네 뭐 이런 감정도 있고요.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기쁨인가요?
찍을 때 보람을 느낄 때가 있고 아니면 편집을 했는데 그런 순간이 바로 올 때도 있고요. 관객 반응이나 평단 반응이 좋으면 그러기도 해요.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 시절, 아스널이 축구를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한다는 평을 많이 받았어요. 그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축구의) 정의를 물었더니 3~4분간 공이 끊이지 않고 계속 유려하게 흘러가는 걸 아름다운 축구, 아트 사커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저도 그래요. 3~4분간 정말 아름답고 유려하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퀀스가 한 영화에 세 번 정도 있으면 저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 영화가 좀 갑갑하든 이해가 안 되든, 그런 걸 다 떠나서 그런 순간이 세 번 이상 있다면 무조건 좋은 영화라고 여겨요. 오락 영화든 예술 영화든 또는 성공한 영화든 실패한 영화든 간예요.

감독님 영화 속 몇몇 시퀀스가 떠오르네요. 폐쇄된 공간이나 차 안 등에서, 이걸 어떻게 찍었는지 메이킹을 봐야 이해되는 장면들이요. 제한과 제약이 있으면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연구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과감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나와요. 그냥 촬영 환경에 맞춰서 그 안에서 찍으면 그만인데, 어떤 결핍 상태, 조건이 좋지 않을 때 오히려 악조건을 돌파하기 위해 창의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액션 장면, 새로운 공간이 주어졌을 때 돌파구를 많이 찾아냈어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귀시장, 황야의 질주 신, 오프닝의 기차 신, <인랑>의 지하 수로 액션 누구도 이전에는 시도를 안 한 거였죠. 결국에는 아이러니하게 예산, 환경, 시간 이런 것에 오히려 쫓기고 부족할 때 창의적인 돌파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하나의 미션이 되는 거죠.

실크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영상이 우아하게 펼쳐지다가 순간 거칠고 날것의 액션 신이 이어지는 갑작스러운 질감의 변화는 가장 영화적인 선택의 결과물일까요?
폭력성이란 느닷없을 때 훨신 더 강력한 효과를 줄 수 있어요. 폭력의 본질을 제가 그렇게 보거든요. 폭력의 반대편에 대화가 있는데, 대화란 주거니받거니 예측할 수 있잖아요. 상대가 흥분하면 내가 진정시키고, 이 사람이 날 건드리면 내가 그에 반응하는데 폭력은 일방적이고, 느닷없고, 예측불허예요. 그게 가장 적나라하게 폭력을 본질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죠. 저는 사회에 만연한 억압과 폭력을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고요. 고등학교 때 태권도부를 가입했는데 선배들이 거의 폭력배 같았어요. 선배들이 가르치거나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긴데, 규율, 기강 잡는다며 자연스럽게 저희에게 폭력을 행사했어요. 겨우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어쨌든 한국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폭력을 저는 온몸으로 관통해서 체득한 셈이에요. 학교에서도 구타가 너무 일상적이었고 다들 그걸 당연시하며 버텼으니까요.

1998년에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 후, 햇수로 25년이 되셨습니다. 올해 5월 칸 영화제 프레스 회견에서 영화감독이란 직업은 시한폭탄을 안고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데요. 25년 동안 시한폭탄을 안고 일을 어떻게 계속하셨나요?
계약이 되어 있어서. 혼자 밥 먹기 싫은데 현장에 오면 밥 차가 있어서.(웃음) 그간 술꾼들 얘기를 많이 했어요. 술꾼들이 술을 마시듯, 현재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이제 술을 마시게 된다는 얘기요. 일을 안 하고 있으면 무의미하니까 일하다 죽더라도 그 무의미한 상태보다는 영화를 만드는 게 좋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계속 만드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계속 영화가 궁금하고, 또 영화를 만들어내는 내가 궁금하고요. 그런 궁금증, 호기심을 계속 놓지 않는 것, 늙지 않은 것 덕분에 계속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영화를 만들 때마다 그 답을 찾으시나요?
답이 나올 때도 있고요. 찾으려는데 못 찾는 경우도 있고 매번 달라요. 질문을 한두 가지만 하지는 않으니까 영화 한 편 만들 때 대략 수십 가지를 하니까 그중 답이 있기도 하죠.

현장에서 감독은 모든 걸 이끌고 짧은 시간 안에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 판단에 따른 결과에도 책임을 져야 하고요. 굉장한 중압감이 있을 듯합니다.
감독이란 무척 고독한 직업이에요. <거미집>에서도 감독이 깨달음을 얻어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걸 믿고 가자. 누구한테도 들을 수 없고,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니까. 내 말이 맞을지 다른 사람의 말이 맞을지 누가 틀릴지 모르는 거니까. 내 안에서 몽글몽글 일어나는 것을 그냥 믿어보자. 감독은 그것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더 외로울 수도, 또 다른 이들보다 훨신 더 큰 성취를 얻을 수도 있고요.

가공의 인물이지만, 자기 확신을 완벽히 충전한 상태로 현장에 가는 게 도전이겠어요.
그렇죠. 스필버그 같은 천재 감독도 촬영장 갈 때 도망가고 싶다는 얘기를 하니까 저 같은 미물이야 뭐.

감독님 자신의 모습이 <거미집> 주인공인 김 감독에 많이 투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이 그래요. 실제로 직접 현장에서 했던 말도 있고, 현장을 경험하면서 계속 화두처럼 곱씹었던 말도 있고요.

그럼 현실과 극의 경계가 조금 더 모호해진 작품일까요?
영화감독으로서, 감독의 정체성 면에서는 그럴 수 있어요. 1998년부터 영화감독을 한 지 25년이 되었는데, 25년이라는 시간을 돌아봤을 때 이런 게 필요해서 <거미집>을 의식적으로 만든 건 아니에요. 팬데믹을 거치면서 영화가 무엇인지, 나한테 어떤 의미였고, 또 한국 영화는, 선배들이 만든 한국 영화는 무엇이 있었고 나한테 영화란 어떤 존재인지. 영화 시장이, 플랫폼의 등장으로 점점 쪼그라들고 있는데 나는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감독이란 어떤 존재인지 고민한 것들이 <거미집>에 자연스레 투영되었어요.

감독님은 코로나 시기에 어떠셨나요?
아무것도 못 했죠. 프랑스 TV 채널 카날 플뤼스랑 시리즈를 준비하며 남자 주인공 가스파르 울리엘 캐스팅 직전이었어요. 리딩 다 하고, 촬영지 헌팅까지 다 하고 나서 코로나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는데, 가스파르의 비극적 스키장 사고 사망으로, 아무것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그때가 25년 동안 유일하게 딱 1년을 쉰 시기였어요. 한 해도 안 쉬고 영화를 찍다가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처음으로 멈춰보았어요.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모든 게 멈춘 시기였잖아요. 앞으로 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극장이 사라지는 건가 싶기도 했고요. 제가 데뷔할 때 백남준 선생님의 말씀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어떤 게임에 못 들어갈 것 같으면, 네가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그 룰을 직접 정해라.” 그래서 정말 새로운 영화, 나만 할 수 있는 영화를 할 수 있었어요. 제가 백수로 10년을 넘게 지냈거든요. 누님이 연극을 하다 보니 유명 감독님도 많이 아셨고, 현장 가서 영화를 배우라고 해서 그럴 마음도 있었어요. 그걸 멈추게 한 게 스페셜리스트가 되어라, 남들과 똑같이 가지 말라는 백남준 선생님의 말씀이었어요.

앞으로 어떤 영화, 어떤 장르에 또 도전하실 건가요?
순간순간 하고 싶은 게 떠오르는 편이고, 장기적 플랜을 미리 세우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거미집> 대사에도 나오는데 뭔가 맨 처음에 흐릿한 것이 있고, 그게 잔상으로 남아 있어요. 점점 안으로 갖고 들어와서 형태가 선명해질 때까지 기다리거든요. 어떤 인상이나 이유 모르게 나를 사로잡는 것이 구체적으로 될 때까지요. 그 기다림 끝에 신기할 정도로 선명해지는 게 제 다음 작품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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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이 추천하는, 가을에 볼 만한 아름답고 서늘한 영화 best 5

1. <행복> 아녜스 바르다 1965
결말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전히 먼 곳을 보며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주변을 살핀다. 과연 그가 이번에는 행복에 안주할 것인가. 
2. <달콤한 내세> 아톰 에고이안 1997
눈 덮인 빙판이 깨져 아이들이 탄 버스가 잠겼고, 그 균열 위로 사람들의 어두운 심연이 드러난다.
3. <행잉록에서의 소풍> 피터 위어 1975
은유와 암시,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은 실종.
4. <천상의 피조물> 피터 잭슨 1994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에 등장한 이방인(20대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열정적이고도 거친 줄리엣)으로 시작된 파국.
5. <결혼 이야기> 노아 바움백 2019
아름다운 결별을 바랐으나 결국 관계의 끝에서 산산조각 처참하게 부스러지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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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Words 김나희
Editor 박찬용
Photography 표기식

202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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