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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은의 숭고한 이야기

늦게 피는 꽃이 화려하다. 김혜은은 30대 중반에 배우로 데뷔했다. 그전에는 기상 캐스터였고, 더 오래전에는 가수였다. 책임과 열정, 즐거움과 자유를 좇으며 살아온 김혜은의 숭고한 이야기다.

UpdatedOn October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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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는 보테가 베네타 by 육스, 시계는 불가리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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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터틀넥 니트는 로샤스 제품.

배우 김혜은은 목표를 달성하며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여요?

네, 꿈을 꾸고, 도전하고, 성취하는 사람으로 보여요.
안 해본 캐릭터에 도전하려는 것 때문에 그런가요?

연기적으로도 그래요. 그리고 소프라노, 기상 캐스터, 배우 각기 다른 세계에 도전했고, 일정한 성취를 거뒀잖아요. 최고가 된다는 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업에 도전하고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꿈을 이뤘다고 봐요.
좋은 질문이네요. 그건 지금 제가 고민하는 주제예요. 나는 꿈을 이루고 있나? 이루고 있는 중이라서 행복한가? 저 스스로 물어요. 지나고 보니 어릴 때부터 멀리 내다보며 살았어요. 스물네 살 노래를 할 때 10년 뒤를 예상해봤는데,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금전적 지원을 되갚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때 가세가 기울었어요. 노래를 고집하는 건 몹쓸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나중에 부모님께 갚을 자신이 있다면 눈 질끈 감고 했을 텐데 그건 도리가 아니었어요. 그만두는 게 합리적이었죠. 그리고 언론 고시를 뒤늦게 준비했어요. 방송사 시험을 보고 청주 MBC 아나운서로 입사했고, 서울 MBC에서 연락이 와 기상 캐스터를 시작했어요.

회사 밖은 전쟁터라고들 하죠. 독립이 쉽지 않았겠어요.
회사 재직 중에 카메오로 드라마에서 연기를 몇 번 했는데 무척 재밌었어요. 그래서 연기 과외 선생님에게 연기를 계속해보면 어떨지 고민 상담도 했었죠. 그때 연기 학원에서 아나운서 공채 시험 준비하는 수험생을 가르쳤는데요. 운명처럼 MBC 프로덕션에서 저에게 <아현동 마님>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소속사도 없을 때였는데, 어떻게 알고 저에게 연락했는지 물어봤죠. 그러자 성악과 출신을 찾고 있었다더군요. 그러니까 제가 성악을 안 했으면, 기상 캐스터를 안 했다면 배우가 안 됐을 거예요.

배우는 다른 직업과 다른가요?
제가 10년 뒤를 내다본다고 했잖아요. 배우는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전망이 좋아요. 제가 건강하게만 잘 살아 있다면요.

하지만 안정감이 다르죠. 조직에선 ‘따박따박’ 월급이 들어오는데, 배우는 고정소득 없는 개인사업자잖아요.
그야말로 광야죠. 저는 개인사업자로 광야에서 생존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쉬운 길만 선택하고 싶었어요. 월급 따박따박 받으며 살고 싶었죠. 처음부터 배우를 꿈꾼 건 아니에요.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고, 나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느꼈죠. 그래도 눌러앉는 것보단 도전하며 사는 게 낫다는 생각에 과감한 선택을 해왔어요. 대단한 꿈을 갖고 살아온 건 아니에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업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편 아닌가요?
업에 대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생각을 자주 하는데, 제 유전 인자 중에 덜렁거리는 면이 있어요. 매번 빠뜨리고, 잃어버리는 성격인데 연기만큼은 조금이라도 놓치면 난리가 나요. 집중한 분야에서는 완벽주의자예요. 노래할 때도 그랬고, 기상 캐스터 할 때도 그랬어요. 일기예보에서 리드 멘트라고 오프닝이 있어요. 그걸 캐스터가 직접 써요. 저는 리드 멘트를 스물네 시간 고민했어요.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어요. 그러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어요. 시간이 지나니 안 해본 멘트도 없고 더 잘할 자신도 없었어요. 일할 때 평범한 걸 싫어하는 성향이에요. 그래서 열심히 했고, 그걸 회사가 인정해줬죠.

그럼 연기에서 발견한 만족은 무엇이었나요?
배우를 하면서 기분 좋을 때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을 때예요. 두세 번 그런 적이 있어요. 그게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밀회> <이태원 클라쓰>였어요. 제 역할은 김혜은 아니면 떠오르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 감사해요. 배우는 그만의 아이덴티티 때문에 캐스팅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서 대체 불가한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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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드러난 원피스는 블루마린, 챙이 넓은 모자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도전하며 사는 게 낫다는 생각에 과감한 선택을 해왔어요.
대단한 꿈을 갖고 살아온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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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색 투피스는 아크리스, 반지는 불가리 제품.

소프라노, 기상 캐스터, 배우 모두 대체 불가한 존재가 되기 위한 도전 아니었나요?
글쎄요. 그건 예술가의 꿈 아닐까요. 지금도 마리아 칼라스와 같이 대단히 독보적인 인물 중에 대체 가능한 소프라노는 없어요. 음색이 다르고 음악성도 다르기 때문이죠. 그 외 실력이 비슷한 가수라면 얼마든 다른 가수가 할 수 있어요. 배우는 좀 달라요. 외모부터 다르잖아요. 이 배우가 아니라 다른 배우가 하면 완전 다른 역할이 되거든요.

제 오해일 수도 있는데, 배우님은 본인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해온 것 같아요. 무대에 오르는 것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본인을 알리는 자리죠.
운명인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노래를 했고, 항상 무대 위에 있었어요. 그 후로 신기하게도 목을 사용하는 일을 해온 거죠.

연기는 뭐가 달라요?
연기 공부를 해보니 노래하고 비슷해요. 연기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잖아요. 노래도 같은 맥락이에요. 말하듯이 노래하라고 하거든요. 대본에는 대사를 노래하듯이 하라고 해요. 그러니 비슷하죠. 제가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연기한다기보다는 배우가 직업이다 보니까 완벽주의자가 되는 것 같아요. 홍보도 잘해야 하고, 연기도 잘해야 하고, 대본 분석도 잘해야 하는 거죠. 제 직업에 있어서만큼은 잘하고 싶어요. 그래서 기자님 질문이 와닿는다고 한 거예요. 제 나이대 배우들은 연기를 묻어나오듯 하잖아요. 하는 듯 안 하는 듯 그렇게 연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저는 30대 중반에 늦게 데뷔했고, 역할을 마다할 처지도 아니었어요. 불러주는 게 고마워 계속 연기했으니 필모그래피가 많이 쌓였어요.

그건 직업적인 책임감인가요?
배우는 대중의 관심을 받는 직업이잖아요. 대중에 대한 책임을 저버릴 수는 없어요.

도전만이 중압감을 해소하고 자유로움을 선사하지 않을까요?
네, 도전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제 자신을 깨부수는 도전을 해야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할 거 아니에요. 실패도 감내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도전하기에 제 작품 중에는 실패한 것도 있고, 본의 아니게 칭찬받은 작품도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양찬미 선생이 성공한 도전이겠죠? 양찬미는 이전의 강한 캐릭터와는 달리 털털하고 쿨하고 웃기는 누나였어요. 배우 김혜은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죠. 이런 도전이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죠.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숙제죠. 제가 하면 안전하다 싶은 배역들이 있어요. 기존에 해봤던 비슷한 역할은 안전하지만 재미는 별로 없죠. 그런데 안 해본 새로운 캐릭터가 주어지면 굉장히 긴장되고 불안해요. 우리는 반응이 어떨지 연기하고 방송하기 전까지는 몰라요. 모르니까 도전하고 열심히 사는 거죠. 조심하는 배우가 있고 조심하지 않는 배우가 있는데요. 저는 조심하지 않는 편이에요. 50대가 되니까. 이제는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나. 주변에서 걱정해주더군요.

양찬미는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준비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처음 캐릭터 잡을 때 힘들었어요. 양찬미는 무뚝뚝하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츤데레’ 선생님이거든요. 정이 느껴지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했죠.

이전까지 본인이 생각한 자신의 모습은 어땠나요?
맏며느리에 장녀라 늘 책임이 컸어요. 저는 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열심히만 살아온 것 같아요. 작품에서도 역할을 제안받으면 마다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고 선택하며 살고, 배역도 제가 하고 싶은 역할을 연기하고 싶어요.

그럼 무엇이 부러워요?
연기 잘하는 사람이 제일 부러워요.

본인 연기를 평가하면 어때요? 박한 편인가요?
박하죠. 꼴보기 싫을 때가 많고, 저 정도밖에 못하나 싶을 때도 많아요. <해운대 연인들>이 있는데, 그 작품에 출연하면서 배우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저 연기 되게 잘했어요. 에너지가 고갈되거나, 연기 못하겠다 싶을 때는 그 작품을 다시 봐요. ‘사람들이 아무도 너를 모를 때에도, 아무도 박수 안 쳐줄 때도 너 저렇게 연기했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마음을 다잡아요. 무식하게 연기했을 때가 참 그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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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원피스는 코스모마리에, 반지는 불가리, 하이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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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은 뮈글러, 하의는 로샤스 제품.

직장인은 번아웃 얘기를 자주 해요. 조금만 힘들어도 번아웃이 온 것 같다고들 하죠. 배우님은 다작을 했으니 번아웃이 올 만도 해요.
번아웃 와서 1년 쉬고 출연한 작품이 <더 로드:1의 비극>이에요. 그때 충전하고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어요. 최선을 다한 사람만 번아웃이 온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오히려 번아웃된 연기가 호평받을 때가 있어요. 인생은 그런 것 같아요. 지친 상태로 뭘 하잖아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감기 걸려서 힘이 없는 상태에서 노래를 했는데, 교수님은 힘 빼고 하니까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해요. 힘주고 잘하려고 노력했을 때는 내 만족은 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거예요. 인생이 그래요. 집중하지 않기로 했어요. 열심히 했다는 거, 그래서 잘했다는 게 전부 내 생각이더라고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재떨이로 최민식 선배 때리는 장면도 4시간 실신하고 일어나서 찍은 장면이에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요?
두 모금 피우니까 머리가 핑 돌더라고요. 그날 담배를 몇 갑은 피운 것 같아요. 담배 연기만 뿜다가 구토하고 실신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나이트클럽 빌린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어요. 빨리 촬영 끝내고 나가야 하니까. 옷만 갈아입고 지친 상태로 그 신을 찍은 거예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찍은 신이에요. 전 그 장면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인생이 그렇다니까요.

힘을 빼면 솔직해지고, 솔직해지면 진심이 더 드러나는 것 같아요. 연기도 그렇지 않나요?
연기는 솔직한 사람이 잘해요. 자기 포장 잘하는 배우가 뜰 수는 있지만 연기 잘하는 배우들은 진실하기 때문에 잘하는 거예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연기를 잘할 수 없어요. 왜냐면 연기를 잘하려면 자신감이 필요하고, 진실로 뚫고 나갈 힘이 바로 자신감이거든요.

진실함을 지키는 건 신념이죠. 하지만 신념을 지키며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비빌 언덕이라도 있어야 신념도 갖고 살 수 있으니까요.
제아무리 본질에 맞서고 감추려 해도 결국 대중 앞에서 연기하는 사람은 본질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부끄럽지만 잘 압니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거죠. 내가 나를 몰라도, 나를 텍스트 안에 넣으면 객관화가 되거든요. 솔직하게 사는 삶이 멋있어요. 그런 사람이 연기도 잘하고.

그럼 진정성을 담아 결과물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물을 대중이 알아주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해요?
이 일을 16년 정도 했는데요. 연기를 못하지 않는 배우라면 작품 잘 만날 경우 그다음부터는 그 사람의 삶에 연기가 더해져서 그 배우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건강한 삶과 작품으로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다 보면 누구든 때가 오지 않을까요.

배우님도 틀을 깨는 시도를 많이 해왔어요. 도전에서 만족하는 지점이 있을 테고, 도전 이후에 얻는 만족감도 있을 거예요.
작품으로 상을 받으면 만족할 수밖에 없잖아요. 인정받은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작품이 잘되면,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양찬미를 사랑해주시는 팬들을 보면 굉장히 기뻐요. 배우로서 보람을 느끼고요. 드문 경우인데 제 연기가 마음에 들 때 제일 기뻐요. 제가 봐도 제 연기가 괜찮았을 때. 그때는 누가 칭찬해주지 않아도 좋아요.

꿈을 좇으려면 열정이 필요하겠죠. 하지만 사람인지라 열정이 소진될 수도 있어요. 꿈을 놓칠 수는 없고 열정은 떨어졌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궤도 수정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들려요. 열정이 떨어졌다는 건 재미가 없다는 소리죠. 꿈과 열정은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에요. 잘 안 풀리는 시간이 적체되다 보면 열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이걸 진짜 좋아하는지부터 다시 봐야죠. 냉정하게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해요. 저도 항상 그 고민을 해요. 드라마 캐릭터에 빠져서 이 역할은 내가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해도 못한 경우가 많아요.

하고 싶은 역할만 하고 살 수는 없어요.
맞아요. 만약 원하는 역할을 전부 할 수 있었더라면 배우가 안 됐을 거예요. 연기하다 보면 고생하는 경우가 있어요. 특히 정신적으로 힘든 역할을 맡았을 때요. 마음이 괴로워도 배우이기에 도전해야 하죠.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다 보면 또 하나의 인생을 얻는 기분이에요. 그렇게 인간적으로 성숙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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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는 자크뮈스, 주얼리는 빡스 제품.

“연기를 잘하려면 자신감이 필요하고,
 진실로 뚫고 나갈 힘이 바로 자신감이거든요.”

<에스엠라운지>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조진혁
Photography 김참
Stylist 김보라
Hair 차차(정샘물)
Make-up 파니(정샘물)

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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