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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을 갖는다는 것

정치인도 사업가도 연예인도 운동선수도 진정성을 이야기한다. 광고에서도, 영화에서도, 진정성이 중요하단다.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데이터에 기반해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진정성 있게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성이 화두인 시대에 진정성을 갖기 어려운 이유를 말한다.

UpdatedOn February 15, 2022


취향의 시대가 저물었다. 고급스러운 사물로 남다름을 강조하던 시대가 지나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취향은 중요하다. 나를 알아가고, 드러내는 방법이니까. 취향 존중은 ‘패시브’가 됐다. 개개인의 취향을 그러려니 하는 것은 기본값이고. 남의 취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익명 게시판에서나 논할 뿐, 현실에선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된다. 저 취향 참 별로라고 말해도 안 된다. 싫어도 싫다고 하면 안 된다. 남들이 다 싫다고 하면 물에 술 탄 듯 그제야 혐오를 표현해야 된다. 비겁하지 않냐고? 겁쟁이들의 시대다. 아이러니한 것은 취향 이후 중요한 키워드로 진정성이 부상했다는 점이다. 진정성은 진실됨이고, 마음을 다함이다. 겁쟁이들의 시대에 진실된 목소리를 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 목소리가 남이 듣기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일 수도 있다. 주장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진 않다. 주장은 믿음의 영역이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정치적 이슈나 예민한 이슈에선 진심을 토로하기 어려운, 아니 위험하다. 진심은 익명 게시판에나 새겨진다.

다시, 진정성이 중요해진 이유를 들여다보자. 과거의 우리는 너무 속고 살았다. 정보는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 일방통행이었다. 위에서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 했다. 정보가 탈중앙화된 지금은 정보를 취사선택한다. 유튜브에서 부동산 하락론자의 달콤한 주장을 몇 편 보면, 그와 같은 주장의 부동산 콘텐츠들이 제공된다. 정치적 이슈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것만 들으며 비몽사몽 사는 게 어렵지 않다. 주장의 근거는 처절한 사연이고, 누군가가 실제 겪었다고 믿으면 주장에는 진정성이 생긴다. 부동산 하락론자의 영상과 소셜미디어, 커뮤니티만 접하면 나는 서울 아파트값이 하락할 거란 주장을 진심으로 믿고 떠들고 다닐 거다. 다행인 점은 내가 축구 영상만 본다는 거고, 축구 선수의 진정성만 의심한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멍청하지도, 현명하지도 않다. 얄팍한 지혜와 평범한 경험을 기반으로 정보의 포화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며 살아간다. 스팸이나 피싱에 낚이는 것 외에도 일상에서 우리를 속이려 드는 것들은 너무 많다. 용역 단가가 낮아졌다며 지난번보다 싼값을 제시하는 클라이언트나, 조금만 도와달라더니 일은 내가 다 하게 생긴 경우라든가, 회사가 적자라며 연봉 동결을 선언하고 새 차를 타고 나타난 대표를 보는 일. 뭐 우리 회사 사례는 아니지만 그런 경우가 있다는 ‘카더라’다. 하여튼 그리하여 시대정신인 진정성은 용기와 믿음이 결합된 가치라 하겠다.

시대정신은 브랜드에게 방향성으로 작용한다. 슬로건이 무엇이든 핵심은 진정성이다. 소비자가 착한 소비를 지향하는 트렌드를 보이자, 브랜드는 사회적 메시지나 책임을 담은 브랜드 액티비즘을 전개했다. 브랜드 액티비즘의 핵심 역시 진정성이다. 착한 소비의 대상이 되려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진정성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동시대 가치를 브랜드가 소통하는 방식은 이렇다. 39세와 19세를 MZ세대라는 하나의 ‘신세대’ 집단으로 묶은 다음 MZ세대와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하겠다고 하거나, 지속가능성을 위해 무려 플라스틱 빨대만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체벌 금지 법제화가 이루어진 지 10년이 넘은 지금 체벌을 금지하고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는 학생들의 주장을 담은 광고를 만드는 식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이 사실에 근거했는지, 현실적인 고민이 담겼는지와는 별개로 현재 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믿고’, 문제를 ‘용기’ 있게 꼬집으며 우리는 ‘진정성’ 있는 브랜드라고 말한다.

사업을 벌이고, 경제활동을 펼쳐나가는 주체들은 어떤가. 그들 역시 진정성을 언급한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고, 내가 만든 서비스와 상품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며, 사업의 근간은 진정성이라고 말한다. 조직문화 컨설턴트들도 대기업의 높은 퇴사율을 낮추기 위한 방법으로 비슷한 맥락의 해답을 제시한다. 과중한 업무에 대한 보상은 연봉이나 회사 내 휴식 시설이 아닌 성취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에서 보람과 성취를 느끼는 직원은 업무 효율이 높고 퇴사 확률이 낮다. 반박하고 싶지만 맞는 말이라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밖에선 진정성이 더 중요한 듯 보인다. 최근 인터뷰한 창작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진정성이었다. 그들이야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 작업에 진정성을 담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연기자든 가수든, 작가든 하나같이 비슷하다. 억지로 하면 티 난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싫어하는 것도 해야 하지 않을까. 창작과 사업을 병행하는 디자이너들은 균형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일을 지속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것들도 있다며…. 디자이너들의 말이 현실적으로 들렸다. 성공한 CEO나 스타트업 종사자들, 창작자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어디서 진정성을 펼쳐야 할까. 회사에서 언제 신뢰와 용기를 보여야 할까. 돈 벌기 위해 ‘그냥’ 출근하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격언은 이미 영화 에서 찰리 채플린이 80여 년 전에 했다. 지난 80년 넘는 세월 동안 전쟁도 했고, 이념도 달라졌고, 사회 시스템도 바뀌었고, 경제도 성장했다. 별의별 일이 다 있었는데, 그럼에도 아직 진정성을 가질 만큼 좋아하는 일을 못 찾은 사람이 많다. 공채가 줄어든 요즘 어렵게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진정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건 위선이다. 이 회사가, 이 직무가 좋진 않지만 해야만 하니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실망한 경우도 있다. 싫지만 관둘 수 없는 경우는 셀 수도 없고. 가족의 누군가 다쳤다거나, 자식이 대학 수험생이 됐다거나, 대출 당겨서 매입한 상가가 갑자기 무너졌다거나 등등. 대출의 인질이 되어 함부로 경제활동을 중단할 수 없는 직장인은 많다. 그들 앞에서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다. 수입이 적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성공한 사람만 하는 소리다. 수입이 계속 적으면 가난해지고 미안해진다. 스스로에게도 가족에게도. ‘지금 즐거우면 된다. 현재에 충실하자’는 말은 부족한 위로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은 더 멀게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발견할 여유가 없었을 수도, 이것저것 해봤지만 뭘 해도 즐겁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재미를 느낀 일이 있지만 재능이 없어 관둔 경우도 있을 테고. 30대 후반에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고민하는 것은 괴롭다. 10대 때 하던 고민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인생의 갈피를 못 정했다. 유유부단하다고? 그럼 안 되나? 괴로운 건 본인인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못 찾은 사람들, 미워도 다시 한번 출근하는 사람들,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진정성’은 사치다. 호화로운 물건으로 자신의 ‘취향’ 을 드러내던 사람들을 보며 느낀 괴리와 다르지 않다. 진정성을 갖기 어렵지만 진정성을 갖기 싫다고 말할 수도 없다. 겁쟁이들의 시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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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조진혁

2022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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