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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이상한 서바이벌

오디션 방송은 승자만이 주목받는 건 아니다. 승자가 아니어도 프로그램이 끝난 뒤 오래 기억되는 인물은 따로 있다. MBC <극한데뷔 야생돌>은 소속사의 힘, 팬 투표 영향력 등 외부 세력을 배제하니 캐릭터의 순수성만 남았다. 자극적인 콘셉트와 달리 실체는 예능에 충실한 오디션이다. <극한데뷔 야생돌>을 보며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순기능이 무엇인지 되짚는다.

UpdatedOn November 12, 2021


‘우린 정말 생존경쟁을 좋아할까? 마지막 하나의 생존자를 보며 손뼉을 치는 일이 정말 즐거운 걸까….’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노제가 속한 웨이비가 첫 번째 탈락을 하자 신화의 김동완이 본인 계정의 SNS에 남긴 글이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광팬’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당락의 스트레스가 사라진다면 경연 프로그램의 긴장감 조성은 어떤 것으로 대체할 것인가? 작정하고 생각하면 방법이 나오기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대답이 쉽지 않다. 누군가의 꿈을 담보로 ‘생존’을 즐겼던 일이 업보처럼 돌아온 상황이기 때문이다.

<슈퍼스타K>는 성공의 대가로 잘게 조각당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파편에 목숨을 잃었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은 <댄싱9>, 록을 하고 싶은 사람은 <슈퍼밴드>, 랩으로 성공하고 싶다면 <쇼미더머니>, 뮤지컬 배우를 꿈꾼다면 <팬텀싱어>, 트로트 스타가 되고 싶다면 <내일은 미스트롯>, 국악을 전공했다면 <풍류대장>에 나가면 되니까. 다양한 장르의 세분화만큼 포맷의 변주도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거나 기회를 받지 못한 이들의 재도전을 위해 <싱 어게인>이 등장했고, 오래된 명곡을 잘 해석하는 신인을 뽑기 위해 <새가수>가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서바이벌’ 폭풍이 가장 거세게 휘몰아친 곳은 ‘케이팝’이다. 2014년을 기점으로 유튜브와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한 케이팝 시장에서 방송사가 기획한 ‘서바이벌 오디션’은 자연스러운 관문으로 전제되었다. 소위 3대 기획사의 대표들이 방송국과 함께 주최한 공개 오디션 <K팝 스타>는 지원자와 심사위원 모두에게 권위와 명성을 부여했고, 각 기획사에서 데뷔만 기다리고 있던 ‘연습생’들을 모아 선거 형태로 최종 데뷔조를 선발하는 <프로듀스 101>은 음악과 방송 양쪽 업계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연출자는 그런 과열된 반응을 제어하지 못하고, 참가자와 시청자를 동시에 기만하는 ‘순위 조작’이라는 자충수를 두며 파멸했다. <더 유닛> <아이돌 학교> <믹스나인> <언더 나인틴> 등 <프로듀스 101>이 만든 피로는 그것을 모방하며 생겨난 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투표 방식을 선택한 오디션이 스스로 신뢰를 무너트리면서 케이팝 서바이벌에도 위기설이 제기되었다. 2020년 하이브와 CJ가 함께 만든 <아이랜드>는 방시혁, 비, 지코 등이 프로듀서, 트레이너로 참여하면서 ‘NEXT BTS’라는 빅카드로 상황을 극복하려 했고, 2021년 JYP와 P NATION이 손을 잡고 만든 <라우드>는 두 명의 성공한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그들의 ‘안목’을 앞세웠다. 그러나 <아이랜드>와 <라우드>는 글로벌 아이돌 그룹의 데뷔 자체에 목적이 있는 만큼, ‘케이팝 서바이벌 오디션’이 방송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니 올가을 첫 방송을 시작한 <극한데뷔 야생돌>은 ‘케이팝 서바이벌’이 사상 최고로 인기 없는 시대에 등장한 프로그램인 셈이다.

시청자들은 가끔 방송의 기획 의도를 일부러 오인한다. 어설픈 완성도의 방송에 대충 만족하며 보는 것보단 계획에 실패하는 방송을 놀리며 보는 쪽이 더 유희가 크기 때문이다. <극한데뷔 야생돌>은 위에서 열거한 모든 오디션의 모습을 조금씩 취하고 있다. 케이팝 산업 속 아이돌 근로자의 인권과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시점에 갑자기 <싱 어게인>처럼 그들의 이름을 모조리 빼앗아 번호로 만들었고,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아이돌과 팬의 만남을 설계하는 시대에 <강철부대>와 <가짜사나이>가 구르는 갯벌로 출연자들을 보내놓고 ‘약육강식’ ‘강한 사자 새끼만이 살아남는다’를 외쳤다. ‘잘 팔리는’ 키워드를 억지로 조합한 결과 모든 담론을 아득하게 초월해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이 프로그램은 더 이상 케이팝도 아니고 서바이벌도 아니고 오디션도 아닌 한 편의 콩트 코미디처럼 보인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출연자 대부분이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해 한 번쯤 얼굴을 비췄거나, 이미 데뷔 경험이 있는 아이돌 멤버라는 사실마저 알고 나면, 이 프로그램이 ‘아이돌 연습생’ ‘서바이벌 참가자’라는 미완의 신분을 하나의 직업으로 대우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건가?’ <극한데뷔 야생돌>의 코미디적 가치는 방송을 구성하는 모든 의문스러운 요소에서 비롯된다. 4면이 모두 LED 스크린인 초대형 스튜디오에 김종국, 차태현, 이현이, 이선빈, 인피니트 성규, 브레이브 걸스 유정이 앉아 있다. 스크린에서는 시시각각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린다. 어떤 조합인지 파악이 불가능한 여섯 명의 패널들은 그런 스튜디오에 앉아 영상에 대한 코멘터리를 쉴 새 없이 뱉어야 한다. 가끔은 웃기고 대개는 의미 없는 공허한 말들이다. 그들이 보는 화면 속엔 쓸데없이 웅장하게 촬영된 절벽, 갯벌, 오프로드가 ‘드론샷’으로 등장한다. 마흔다섯 명의 남자 아이돌 연습생은 그 공간에서 갑자기 내려진 지시에 따라 기합을 내지르며 질주한다.

<극한데뷔 야생돌>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코치는 보컬 트레이너나 안무가가 아니다. 유명한 헬스 트레이너와 유도 국가대표였던 조준호와 조준현이다. 출연자들은 당황한다. 오지에 떨어져서 갑자기 네 발로 달리고, 통나무를 쉼 없이 뛰어넘어야 하니까. 체력에 자신 있는 출연자들은 좋은 결과에 뿌듯함을 느끼다가도 ‘이것이 과연 케이팝 아이돌 데뷔와 어떤 상관이 있는 걸까’ 하는 찜찜한 의문이 얼굴에 드러난다. ‘이 체력적 한계를 뛰어넘어야 아이돌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트레이너의 기합도 어딘가 이상하다. ‘정말 그런가요?’ 출연자들은 ‘특전사’가 아니기에 저런 기합을 들어도 대부분 적당히 포기한다. 그 점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이뿐만이 아니다. 총 300점 만점의 체력평가를 얼렁뚱땅 끝내고 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비주얼 평가’라는 것을 실시한다. 이제껏 그 어떤 오디션에서도 ‘비주얼 평가’ 같은 걸 대놓고 한 적은 없었다. 저건 춤이나 노래보다도 절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한 기준 아닌가! 하지만 주변에 있는 거라고는 바위와 풀 몇 포기가 다인 척박한 공간에서 화보 촬영이 시작된다. 배경은 벌판인데 모두 언젠가 어느 스튜디오에서 경험해본 듯한 포즈를 취한다. 밧줄로 자신의 손목을 포박하는 ‘케이팝 남자 아이돌’의 시그너처 콘셉트가 등장하고, 땀자국이 누렇게 흐른 얼굴로 맹수 같은 표정을 지을 땐 ‘어른들이 미안해’ 하며 눈물이 흐른다….

‘체력’과 ‘비주얼’ 평가를 마치고 나자 드디어 ‘케이팝 서바이벌’에 어울리는 ‘랩’ ‘댄스’ ‘보컬’ 평가가 시작된다. 심사위원으로 타이거 JK, 리아 킴, 성규가 등장하는데 이것도 너무 웃기다. 밖에서 다들 너무 고생을 하고 있고… 또 방송적으로 너무 늦은 등장이기에 시청자들은 이미 이 방송에서 데뷔할 케이팝 아이돌이 누구인지 크게 궁금하지 않다. 매 순간 이 조악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용을 쓰는 출연자 개개인의 모습을 시청하며 웃고 즐길 뿐이다. 글로벌 투표를 진행하고 있긴 하지만, 프로그램 자체에서 실행하는 테스트가 더욱 크게 반영되는 공정함 역시 프로그램을 가볍게 즐기는 데 큰 몫을 했다. 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해도 그 이후의 삶이 성공으로 보장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기존 업계의 선례 역시 과열된 경쟁을 막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게 의도를 했든 하지 않았든, ‘야생’과 ‘생존’이란 키워드를 내세우며 많은 우려 속에 방영을 시작한 <극한데뷔 야생돌>은 예능적 유희라는 방송의 본위를 달성했다.

과연 케이팝 오디션 프로그램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현재는 ‘제2의 BTS’를 만들고 싶은 자본의 열망과,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들의 낮은 신뢰가 결합해 그 수명을 쉽게 점칠 수 없는 과도기적 상태다. 대중은 늘 새로운 얼굴을 기다린다. 그리고 동시에 경험을 통해 그 방식이 불공정하거나 잔인해지는 것을 더는 원치 않는다. <프로듀스 101> <믹스나인> 등을 제작한 한동철 PD의 <방과후 설렘>, 하이브와 CJ의 두 번째 합작 서바이벌 <아이랜드 2>가 곧 방영을 앞두고 있다. ‘참가자의 꿈을 위한다’는 메시지의 위선을 통해 흥행에 목을 매는 것보다, 누가 봐도 ‘재미있고 좋은 방송’을 만들겠다는 연출가의 절제된 의지가 모두에게 더 큰 가치를 가져올 거라 생각한다. <극한데뷔 야생돌>을 보며 살짝 경험해보니 그리 어려운 것도,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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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조진혁
WORDS 복길(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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