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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의 서스펜스와 휴머니즘

<킹덤>에서는 누구도 배고프지 않은 세상을, <시그널>에서는 누구도 억울하지 않은 세상을 바랐다. 치밀한 장르물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김은희 작가는 늘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그리며 이야기를 써왔다. 그런 이야기를 쓰는 힘에 대해 묻자 그는 답했다. “아직 그런 세상이 오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지금 한국에서 가장 독보적인 드라마 작가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UpdatedOn January 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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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링 코트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남성지 <아레나>에서 한 해 활약이 두드러진 남자들에게 수여한 상을 드릴 수 있어서 뜻깊다. 여성 수상자가 <아레나> 커버를 한 것은 15년 역사상 최초다.
최초의 여성 수상자 커버라는 건 몰랐는데 영광이다. 한 해 마지막에 선물 같은 상을 주셔서 감사하다. 화보 촬영이라는 색다른 경험을 한 것도 좋았다. 오랜만에 멋진 옷도 입어보고.

성 역할의 구분이 없어지는 시대다. 배우자인 장항준 감독님이 <라디오스타>에서 “김은희 작가가 우리 집의 경제적, 도덕적 가장”이라고 말씀하신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남자가 해야 할 일, 여자가 해야 할 일이란 없으니까 서로 잘하는 부분을 담당하게 된 거다. 우리 남편은 살림을 되게 좋아하거든. ‘집돌이’에 요리 잘하고, 물건을 싸게 구매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타입이다. 난 설거지를 좋아해서, 남편이 요리를 해주면 내가 설거지한다. 둘 다 설거지를 좋아했으면 곤란했을 텐데 말이지.(웃음) 난 일하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남편은 집에서 살림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럼 너는 나가서 일해”라고 하게 된 거다. 집안의 대소사를 섬세하게 잘 챙겨준다.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보기 드문 남편이다. 물론 김은희 작가님도 보기 드문 배우자고.
남편은 인간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다. 이를테면 팀에서 누구 한 명이 모가 나거나 해서 남들이 꺼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장항준은 “얜 그래서 재미있어” 이런 식으로 코믹한 캐릭터로 승화시켜서 다른 사람들도 결국 그를 좋아하게 만든다. 그런 점이 참 멋있었다. 그런 긍정적인 면을 배우고 싶었지. 남편으로서도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사실 결혼은 웃겨서 한 거다. 내 주변에 이렇게 웃긴 사람은 처음이었거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얼굴도 좀 볼 걸 그랬나 싶다.(웃음)

<킹덤>엔 빛나는 순간이 많지만, 시즌2 엔딩을 향해 달려가면서 중전이 최종 빌런으로 변모할 때 굉장히 짜릿했다. 조학주가 아닌 중전이라는 어린 여성을 최종 빌런으로 설정한 이유는 뭔가?
<킹덤>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었다. 그 시대에는 왕족이라 해도 여성은 아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높은 계급임에도 낮은 위치라는 역설이 있었지. 중전의 나이를 어리게 설정한 건 당시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정략적 결혼이 많았으니, 그런 불합리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킹덤>은 계급에 대한 이야기니 결국 억눌렸던 것들이 폭발해야 하는데, 조학주처럼 왕좌 빼고는 다 가진 사람은 그렇게까지 폭주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전은 왕자까지 손에 넣었지만 결국 택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 차별받고 억눌려온 이의 폭주를 보여주기 위해선 중전을 최종 빌런으로 삼는 게 좀비물에 맞겠다고 생각했다. 계급이 낮은 의녀 서비와 다른 선택을 하며 다른 결말을 맞는 대비도 보여주고 싶었고.

스핀오프 <킹덤: 아신전>과 시즌3는 ‘한’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 밝혔다. 배우 전지현이 연기할 아신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킹덤> 시즌1이 배고픔, <킹덤> 시즌2에서는 피와 혈통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킹덤> 시즌3는 ‘한’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이전 시리즈가 지배 계급의 선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번엔 가진 게 없는 자들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지. 가장 최하위 계급이 주역이 되는 이야기다. 아신은 한을 강하게 품은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런 그가 주체적으로 나서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이 훌륭한 기획의 시작이 궁금하다. 어떻게 좀비라는 소재에서 군중의 배고픔을, 연민의 감정을 포착했나? 그리고 그걸 어떻게 조선 시대에 이식할 생각을 했나?
짠하잖아. 뭐 하나 먹겠다고 여기저기 찢겨가며 창자 부여잡고 뛰어오는 게. 오죽 배가 고팠으면 그랬겠나. 다른 감정이 모두 거세된 채 식욕만 쫓는 존재. 민중의 배고픔을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장르적 소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현대에도 부조리한 일이 많지만 최근엔 기아나 기근보다는 다이어트, 섭식장애가 더 두드러지는 시대니, 조선 시대가 적절하겠다고 생각했고. 장항준이 남편이기 전에 스승이었는데, 같은 걸 다르게 보는 트레이닝을 많이 했다. 영화를 보다가도 “근데 이건 이럴 수도 있지 않아?”라고 말해본달지. 그런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작가님의 작품은 치밀한 장르물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결국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근원적 관심을 두는 것 같다. 모두가 배고프지 않은 세상을 추구하는 <킹덤>, 미제 사건을 두 시간대에서 추적하며 진실을 밝히는 <시그널> 등.
실제의 나는 불의를 보면 피해 가는 겁 많은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그럴 거다. 자신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싶은 거. 사실 무섭잖아. 자신의 안전을 위해 불의를 못 본 척 넘어가는 이가 있다 해도 그를 욕하고 싶진 않다. 정의로운 일을 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니. 어쩌면 그래서 내 작품의 주인공들에게 그런 일들을 시키는 게 아닐까? 그리고 사람들도 그렇기에 오히려 좋아해주시는 게 아닐까? 내가 이런 이야기들을 자꾸 쓰게 되는 건 아직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깊어 보인다.
작가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없으면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씨네마운틴>에서 장항준 감독이 “자녀에게 주식을 어떻게 양도하면 불법은 아니지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같은 이야기를 했더니 김은희 작가가 “내가 쓰는 이야기의 내용이 그런 걸 하지 말자인데 그러면 안 돼”라고 거절했다는 에피소드가 인상 깊었다.
예전에 어떤 감독님이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더라. 그런데 그 감독님이 “나는 맨날 저렇게 잘사는 사람들 욕하는 맛에 살았는데,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사람들을 욕하지 못할 거 아니야”라고 거절한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와닿은 적이 있다. 나도 참 뒷담화하는 맛으로 사는데, 그걸 못 하는 건 싫다.(웃음) 나는 정의롭다기보단 투덜대는 사람이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세상이란 어떤 것인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 <킹덤>의 세계라면 모두가 배고프지 않은 세상, <시그널>의 세계라면 죄를 지으면 그만큼 벌 받는, 유전무죄가 아닌 세상. 당연한 것이 지켜지고, 나와 다른 이에 대한 배려가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 우리 딸 같은 평범한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겠지. 우리 모두 BTS가 될 수는 없으니까. 특출난 존재가 아니어도 잘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방송에서 따님이 “모두가 죽는 결말의 글을 쓰곤 한다”고 하신 걸 보니 상당히 비범해 보이는데… 작가를 꿈꾸나?
물론 내게는 굉장히 특별한 아이지.(웃음) 이제 중3 올라가는데, 감독이 되고 싶다고 했다가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 우리를 닮았으면 이과 쪽은 아닐 거고, 책 읽기를 좋아하니 그러는 것 같다. 꿈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가. 작가가 되겠다면 응원할 거다.

어마어마한 롤모델을 어머니로 둔 셈이네.
제일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딸이다. 오래가야 할 텐데 걱정이다.(웃음) 딸이 내 작품을 좋아해주고 응원해주는 모습을 볼 때면 참 힘이 난다.

어린 시절 어떤 작품을 보며 자랐나?
세계문학전집을 탐독했다. <로빈 후드> 같은 활극,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복수극. 그 전집에 수많은 장르의 이야기들이 있었지. 드라마는 <여명의 눈동자> <서울의 달>, MBC 주말극 중 <그대 그리고 나>. 영화 <대부>도 좋아하고, 감독은 제임스 캐머런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작품들을 좋아한다. 어릴 적에 참 가난했는데, 처음으로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영화가 <E.T.>였다. 그때 정말 눈물 콧물 다 빼면서 봤는데. 그리고 <터미네이터>를 보며 극본을 써보는 훈련을 해서 그 두 편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나는 늘 뒷이야기가 궁금하고, 긴장감 있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희망적인 좀비물을 써볼 순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썼다. 나는 세상을 좀 더
살고 싶은 곳으로 그려보고 싶다.”

 

대중을 사로잡는 뛰어난 스토리텔러다. 이야기를 쓸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건 뭔가?
새로움. 자가 복제를 하진 않는지 끊임없이 경계한다. 한 발짝이라도 조금 더 새로운 이야기를 하자. 그리고 재미.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재미없는 이야기는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내게 맡겨진 일주일에 두 시간 남짓 동안, 시청자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봤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떡밥 회수’를 다 하는 작가로 유명한데, 어떻게 플롯을 짜나?
그거 하느라고 죽겠다. 어차피 그 많은 시청자들을 속일 수는 없다. 반전의 재미보다 중요한 건 캐릭터의 개연성을 지키는 거다. 이야기를 너무 자극적으로 풀면 캐릭터가 무너지기 쉽거든.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는 다 캐릭터가 살아 있었다. 철저하게 취재하고 조사해 캐릭터를 만들곤 한다. 자료 조사가 충분히 하고 쓴 부분과 머리로만 쓴 대본은 확연히 다르다. 막연히 국립공원 레인저들은 이럴 거야, 라면서 쓰면 딱 나 같은 캐릭터만 나오더라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어떻게 하나?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회의를 하는 것이다. 나 혼자 안고 있어봤자 답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남들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으며 대화하다 보면 이런 걸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되짚어보게 될 때가 있거든. 후배들한테도 막히면 회의를 하라고 이야기한다.

산을 배경으로 국립공원 레인저들이 나오는 드라마 <지리산>은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같이 일하는 작가들과 배우 주지훈이 “사람을 살리고 싶다더니 왜 자꾸 죽여”라고 하는데, 초반 기획 의도는 그랬다.(웃음) 더 거슬러 올라가면 <킹덤>을 쓰기 위해 답사를 다니며 우리나라 자연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의 산을 지키며 조난자를 살리는 국립공원의 레인저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취재차 지리산에 처음 가봤다. 사실 산을 본격적으로 타본 건 처음이었는데, 중간에 너무 지쳐서 일행과 떨어져 조난을 당한 거다. 대피소에 머물다 레인저의 구조를 받았다. 역시나 산을 타지 말았어야 했다.(웃음)

작가님의 작품은 로맨스가 주된 서사가 아니다. 사랑에 관심이 없는 까닭은 뭔가?
일국의 왕자가 나라에 역병이 퍼지고 있는데 사랑 타령을 하면 되겠나? 누군가는 전쟁통인데도 사랑을 하겠지만 그게 주인공일 때 매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한다. 더 긴박한 일들이 펼쳐지니까. 사랑에 관심이 없는 건 글쎄,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불타오르는 사랑,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다. 나의 배우자는 정말 좋은 친구이자 잘되길 바라는 스승이지만, 그를 못 본다고 미칠 것 같지는 않으니까.

팬데믹 시대에 역병을 그린 <킹덤> 시즌2는 동시대적 공명이 있었다. 2020년을 돌아봤을 때, 가장 기대 이상이었던, 혹은 기대 이하였던 순간은?
전자는 <킹덤> 시즌2에 대한 반응. 후자는… 없다. 드라마에서만 벌어졌으면 하는 팬데믹이 현실로 일어났기에 두렵고 암울했던 해였지만, ‘우리 주변에 사명감을 지니고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구나’라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된 해이기도 하거든.

현실이 디스토피아가 되어갈수록 사람들은 좀비라는 소재에 더 열광하는 것 같다. 작가님은 왜 좀비물을 쓰고 싶었나?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좀비물을 좋아하는 건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 군상의 본성이 잘 표현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약탈자가, 누군가는 보호자가,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는 리더가 되기도 하지. 다만 나는 좀비물을 디스토피아 엔딩으로 끝맺고 싶진 않았다. 어떤 작품을 볼 때 “내가 쓴다면”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나는 좀비물을 정말 좋아하면서도 늘 아쉬웠던 건 열심히 도망쳐 왔는데 그곳에서도 좀비가 출몰한다는 거다. 어떻게 저런 데서 살아, 희망이 없다. 좀 더 희망적인 좀비물을 그려볼 순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썼다. 내게 아이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는데, 나는 세상을 좀 더 살고 싶은 곳으로 그려보고 싶다.

작가님이 <킹덤> 세계관의 인물이라면 어땠을까?
범팔이겠지 뭐.(웃음) 이름 없는 인물이라면 나는 달리기도 잘 못하고 의지가 강한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그럴 바엔 제일 먼저 물리는 편을 택하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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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코트·팬츠 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터틀넥 니트 톱 에디터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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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링 코트·팬츠 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터틀넥 니트 톱 에디터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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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미어 소재의 더블브레스트 코트·팬츠 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터틀넥 니트 톱 에디터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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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FEATURE EDITOR 이예지
FASHION EDITOR 이상
FASHION ASSISTANT 김지현
PHOTOGRAPHY 레스
HAIR&MAKE-UP 이은혜

202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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