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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서 레전드로

데드맨은 영혼이 없으니 맞아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필살기를 당해도 좀비처럼 깨어나 영웅을 굴복시켰다. 침대에서 레슬링을 연마하던 우리는 정의가 무너졌다며 좌절했다.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어떻게 생긴 건진 알았다. 근육질의 밝고 쾌활한 아저씨다. 정의란 강하고, 절대적이며, 악당은 비열하고 오만한 것임을 프로레슬링을 보며 체득했다. 오컬트 캐릭터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느 안티테제가 그렇듯 관중을, 아이들을 매혹시켰다. 그런 언더테이커가 지난 11월 20일 은퇴했다. 빌런에서 레전드가 된 그의 커리어를 짚는다.

UpdatedOn December 29, 2020

공포에 매혹된 건 왜였을까? AFKN으로 프로레슬링을 보던 미취학 시절, 언더테이커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형광색 천지였던 쾌활한 프로레슬링 세계에 등장한 음침한 분위기의 언더테이커는 쉽게 이겼고, 내가 알던 권선징악의 세계는 무너졌다. 그는 데스밸리에서 온 장의사라는 설정이었고, 기존 악당들과 달리 비열하지 않았다. 기괴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영웅들을 처단했고, 생매장했으니 악당임은 분명하나 미워할 순 없었다. 미워하기에는 너무 무서웠으니까.

언더테이커라는 안티테제를 다루기에 앞서 프로레슬링이 액션 콘텐츠로서 대중문화와 호흡해왔음을 강조해야겠다. 프로레슬링이 시대를 대변하거나, 그럴 필요도 없지만 시대의 정서는 자연스레 담아왔다. 프로레슬링은 대중을 상대하는 엔터테인먼트 장사인 만큼 시청률을 올릴 자극적인 콘텐츠, 티켓과 티셔츠를 팔아줄 슈퍼스타가 필요했다. 40년 넘게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으니 프로레슬링에는 그 시대의 콘텐츠 트렌드가 담길 수밖에 없다.

언더테이커의 데뷔 시기는 팍스 아메리카의 인기가 고점을 찍은 직후다. <코만도>의 근육맨은 <토탈 리콜>에서 셔츠를 입고 나와 반전의 서사에 웃고 울었고, <람보>의 그린베레는 탈옥을 시도하거나, <록키5>에서 제자와 주먹 다툼을 하던 시절이다. 미소 냉전 구도가 희미해지자, 선악 대립 구도가 시청률을 보장하지 않음을 눈치 빠른 콘텐츠 기획자들이 알아챘다. 때마침 프로레슬링 주 시청자였던 어린이들은 하이틴이 되었고, 그들은 선량하기만 한 캐릭터에 염증을 느꼈다. 어른용, 청소년용, 어린이용으로 구분되던 콘텐츠의 질과 성격도 그 구분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애도 어른도 볼 수 있는 콘텐츠가 잘 팔렸다.

1991년 <WWF 서바이버 시리즈>에서 리얼 아메리칸 헐크 호건이 오컬트 캐릭터 언터테이커에게 패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팍스 아메리카 시대의 종언이라 할 상징적인 경기였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걸프전의 여파로 다시 리얼 아메리칸 헐크 호건의 인기가 잠깐 치솟았다. 1993년 헐크 호건이 타 단체로 이적한 뒤 프로레슬링 업계는 선역과 악역의 구분이 사라진 안티 히어로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 다른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도 명확한 선과 악의 구분이 사라졌다. 악당이 되려면 필요충분조건이 성립되어야만 가능한 시대였다.

1990년대 중반 WWF는 성인 방송을 표방한 WWF 애티튜드 시대를 개막한다. 이 시기 언더테이커는 더 어두워진다. 죽음의 계곡에서 온 장의사라는 동화 같은 설정에서, 사이비 교주라는 <그것이 알고 싶다> 분위기로 탈바꿈하며, 오컬트 요소를 업그레이드했다. 스타일도 조금 달라졌다. 반소매에서 민소매로 바꿨고, 문신이 늘었으며, 턱수염을 길렀다. 곱슬머리를 길게 폈고, 반묶음을 시도했다. 퍼포먼스도 자극적으로 변했다. 이미 장의사 기믹으로 생매장과 ‘관짝밀봉’ 퍼포먼스를 보인 바 있는데, 사이비 교주 기믹으로는 교수형과 화형 퍼포먼스를 펼치며 갈 데까지 간다. 교주라서 신도들도 거느렸다. 장의사 시절에는 매니저 폴 베어러만 대동했지만, 사이비 교주가 된 이후에는 ‘미니스트리 오브 다크니스’라는 어둠의 자식들을 신도로 삼고 거대한 악역 집단을 구성했다. 장의사 기믹이 현실과 동떨어진 오컬트라면, 사이비 교주 기믹은 미국 내 실제 사이비 종교 집단을 연상시키며 팬들에게 보다 현실적인 공포감을 선사했다.

죽음을 소재로 삼은 것은 언더테이커만이 아니라 시대가 그러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중문화 기저에는 염세주의가 빠르게 확산됐다. MTV에선 그런지 붐이 일었고, 상실과 허무주의가 트렌디 영화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음울은 시대의 정서요, 죽음은 구원이고, 자극은 삶이었다. 콘텐츠는 리얼리티를 표방했고, 리얼리티는 자극적인 내용으로 시청자를 쿡쿡 찌르며,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콘텐츠는 자극을 향해 치달아야만 했다. 뉴스에선 실제 자동차 추격전이 생방송으로 중계됐고, 경찰의 검거 실황을 다룬 리얼리티 쇼 <Cops>나, 장모와 사위가 결혼하는 <제리 스프링거 쇼> 등 저속함을 벗 삼은 자극적인 방송이 대세를 이뤘다.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프로레슬링 또한 자극의 강도를 높여야만 했다. 욕설이 난무하고, 외설적인 연출과 막장 캐릭터를 앞세워 흥행을 이끌었다. 선량하기만 한 캐릭터는 바보 취급을 당했고, 팍스 아메리카 시대의 유산은 우스꽝스럽게 비하됐다. 언더테이커의 흉악한 퍼포먼스와 유혈이 낭자한 경기는 외려 경외의 대상이었다.

TV 쇼는 2000년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반전된다. 여전히 리얼리티 쇼가 강세를 이루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인기를 끌었지만 염세주의는 쇠퇴했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관계 지향 리얼리티 쇼였다. TV 쇼는 다양한 군상을 모아놓고 그들이 관계 맺고 해체하는 과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선량한 인물의 지루한 활동보다는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 스타가 됐다. 이 시기 영국의 <빅브라더> 시리즈나, 패리스 힐튼의 <심플 라이프> 등 관계 위주의 리얼리티 쇼들이 범람했다. 안티고네가 스타로 이어지는 리얼리티 쇼의 문법은 한동안 계속됐다.

프로레슬링도 다르지 않았다. 오만방자하고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유를 외치는 선수가 인기를 끌며 선역을 맡았고, 규칙에 충실하고, 평등을 외치는 윤리적인 악역이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언더테이커는 부상을 입고 9개월간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2000년 <WWF 저지먼트 데이>에서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다. 언더테이커는 선글라스와 두건을 쓰고, 할리 데이비슨을 탄 ‘아메리칸 배드 애스(American Bad Ass)’, 즉 폭주족이 되어 돌아왔다. 리얼리티의 시대에 언더테이커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맡지 않았다. 실제 라이딩을 즐기는 자신의 캐릭터를 바탕으로 폭주족 캐릭터를 만들었다. 당시 프로레슬러들은 허무맹랑한 캐릭터보다 현실과 쇼의 경계를 허무는 사실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다. 선과 악이 뚜렷하거나, 자극만 지향하던 시대의 캐릭터보다 실제 자신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가 더욱 입체적으로 보였다. 더 록은 현실에서도 거만하고, 유머러스할 것 같았고. 트리플 에이치는 현실에서도 한 성격 할 것 같았다. 실제 자신의 성격을 바탕으로 연기하고,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점은 당시 리얼리티 쇼와 같은 맥락이다.

2010년대에 이르자 더 이상 팬들은 TV 쇼만 보고 선수를 판단하지 않았다. TV 밖에서의 모습에 더 관심을 보였다. TV 쇼에선 악랄한 선수도 인스타그램에선 마트에 가고, 자신의 브이로그를 공유했다. 대중은 작품만큼이나 작품 외 것, 작가의 의도를 중요히 여기기 시작한다. 작가의 소셜 미디어에서 드러난 성향과 작품이 지향하는 철학이 다르다면 그 작품은 진정성에 어긋난다는 평가를 받는다.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과정, 의도와 목적까지 도마에 올랐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 진정성은 콘텐츠의 전부다.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콘텐츠는 인정받지 못 한다. 대중은 꾸며진 것, 가짜 리얼리티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과거 프로레슬링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평가절하됐지만, 이제는 잘 짜여진 고스톱 드라마라고 불린다. 아마추어 레슬러가 프로가 되기 위해 연기와 기술을 배우는 WWE 산하의 NXT라는 신예 발굴 리얼리티 쇼가 인기를 끈 것도 그 때문이다. 시청자는 레슬링 팬이 선수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응원한다. 여기서는 불편한 관계나, 미운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고, 있더라도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는다. 그게 현실의 인간관계니까.

2010년대 언더테이커는 전과 같지 않았다. 장의사 기믹을 되살리며 링에 헌신했지만, 날렵한 움직임을 구사하기에는 몸이 버티지 못했다. 50대에 접어들며 파트타임 레슬러로 포지션을 바꿨다. 레슬매니아나 서바이벌 시리즈 같은 굵직한 이벤트에만 참여했다. 그럼에도 선수와 팬들은 30년간 한 단체에 투신했고, 매 경기 최선을 다한 그에게 존경을 보냈다.

지난 11월 언더테이커는 자신이 데뷔한 서바이벌 시리즈에서 은퇴식을 진행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캐릭터에 몰입했다. 그는 공포의 제왕이었고, 쿨한 폭주족이었으며, 진정한 프로였다. 하지만 팬들 중에는 장의사 프로레슬러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짐에서 운동하는 노장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헌신에, 진정성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은퇴식 이후 백스테이지에서 포착된 언데테이커의 감정적인 모습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더테이커의 백스테이지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그가 박수받지 않고, 모두를 침묵하게 만드는 공포의 존재로 영원히 남기를 바란다. 공포는 시대를 초월하는 매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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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조진혁

202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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