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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를 하라

패션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거다. 원로도 신인도 모두모두 한자리에 모여 쇼를 하라, 쇼를. <br><br> [2007년 5월호]

UpdatedOn April 18, 2007

 어둠 속에서 바라본 패션쇼장은 사람들의 머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꼴이 꼭 갯바위에 붙은 따개비 더미 같다. 그 사이에 솟대바위처럼 솟은 조명이 무리 사이를 홍해 가르듯 갈라놓는다. 그 오만한 빛이 모델들의 고양이 같은 발걸음과 윤나는 거죽을 훑어내리면 난반사된 빛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으려는 한떼의 평론가들과 기자들의 손이 분주해진다.
본디 기자의 성향이란 것이 그렇다. 뭐 하나를 보면 잘게 채친 후 매운 양념으로 버무리기를 즐긴다. 잘 학습된 연산법이거나 무조건반사 같은 일종의 강박이다. 패션쇼장은 이런 기자들의 습성이 최고조로 들끓는 곳이다. 기자들은 6개월 동안 밤마다 숫돌에 갈고 물을 먹인 비평의 칼을 옷섶에 하나씩 품고 어두운 쇼장에 자객처럼 숨어든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복면 대신 환한 미소를 띤다는 거지만. 결국 속을 뒤집으면 초록은 동색이다. 이런 상황이니 매 시즌 언론에 자신의 신작을 공개하는 디자이너의 속은 오죽할까?
컬렉션을 향한 비난의 칼 중 가장 날 센 것이 ‘모방’ 논의다.
특히 글로벌 컬렉션이 끝나고 두 달 후에 치러지는 서울컬렉션은 제대로 도마 위에 올리기 좋은 횟감이다. 누가 누구의 쇼를 베꼈네, 의상의 실루엣은 누구의 것과 똑같고, 쇼 진행 방식은 누구의 것과 쌍둥이네 하는 등의 일차원적인 비교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서울컬렉션이란 말이다. 밀란·파리·뉴욕의 캣워크를 취재하고 돌아온 기자들의 머리에 아로새겨진 잔상을 잣대로 총구를 겨누기엔 매우 적당한 과녁임에 틀림없다. 서양 복식에 기초한 컬렉션의 참고 교재가 서구의 디자이너일 수밖에 없다는 점,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가 독창적으로 트렌드를 이끌어나갈 만한 시장 형성이 요원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방’과 ‘창의’라는 두개의 줄기를 적확하게 분리하는 것 자체가 생선살 바르듯 간단한 문제는 아닌데 말이다.
지난 3월 말, 마침내 서울컬렉션의 방아쇠는 당겨졌고 비난은 현실이 되었다. 이번 서울컬렉션은 남성복과 여성복의 날짜를 달리한 첫 시도로 박수를 받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축축한 이끼처럼 채 마르지 않은 비릿함이 진동했다. 이틀이라는 최단 기간의 컬렉션, 그 기간만큼이나 대폭 줄어든 중견 디자이너의 쇼, 참가 디자이너 11명 중 신인급이 80퍼센트라는 점, 그 신인 중에서 평단의 기대를 한몸에 받을 만한 루키가 없었다는 점, 세계적인 컬렉션의 모사작이라는 평가와 신인의 객기를 억누르지 못한 자격 미달의 쇼라는 헛헛한 비평의 쳇바퀴…. 실제로 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고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밀어 넣고 성의를 다해 지켜본 컬렉션의 풍경은 형 잃은 아우의 속내처럼 서늘했다.
하지만 남성복의 일신우일신을 바라는 입장에서 음지의 축축함만을 쥐어짤 노릇만은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나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했고 그 두 가지 열쇠로 대한민국 남성복 컬렉션의 또 다른 양지를 보았다. 그 하나는 거대 내셔널 브랜드가 컬렉션에 나란히 등장했다는 것이다. 자본이 확보된 거대 브랜드에서 스타 디자이너를 키우는 것은 스타 디자이너가 거대 브랜드로 자성하는 것에 비해 방법론적 우위에 있다. 금전적인 파워가 확보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패션쇼도, 옷의 작품성을 널리 펼쳐 알리는 것도 요원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든든한 영주를 가진 내셔널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미래에 기대를 걸어본다. 우리는 본의 한상혁이든 한상혁의 본이든, 장형태의 엠비오든 엠비오의 장형태든, 뭐든 받아들일 것이다. 버버리 프로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나 디올 옴므의 에디 슬리먼처럼 작가주의와 실용주의의 양 줄타기에 능한, 발바닥에 굳은살이 깊이 박인 장인으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솔직히 말하면 디자이너 한상혁의 런웨이를 보면서 희망을 마주한 것도 사실이다. 그의 쇼는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나았고 그리고 이번 네 번째 쇼는 마음을 슬쩍 건드리기까지 했다. 폴 스미스의 무대 디자인과 모스키노의 쇼 콘텐츠를 그대로 응용한 것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피카소가 고야의 그림을 베꼈다고 해서 표절이라 말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쇼는 한국의 30대 정서를 녹여 ‘오로지 그답게’ 연출했으므로 상관없다. 응용과 모사를 나누는 예민한 잣대를 드리운다고 해도 나는 이 젊은 한국 디자이너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을 뿐이다.
두 번째는, 디자이너 장광효의 존재감이다. 송지오·김서룡· 정욱준·홍승완… 그간 서울컬렉션에 무게감을 더했던 동지들의 부재를 못내 아쉬워했던 그는 이번 컬렉션에서 아비의 모습으로 모두를 아울렀다. 대한민국 남성복 컬렉션이 대가족화되려면 신실하게 한길을 가는 아비가 필요하다. 이번 서울 컬렉션에서 나는 디자이너 장광효의 ‘아비된 마음’을 엿보았다. 다른 길을 택한 후배들에 대한 격려를 담은 그의 패션쇼 머리글을 읽으면서 대한민국 남성복 컬렉션의 조정 키를 잡은 대선장에게 묵직한 박수를 보냈다.
이 칼럼의 끝을 디자이너 장광효의 글로 마무리하려 한다. 그의 마음은 남성 패션의 중흥을 바라는 <아레나>의 마음과 닮아 있다. 그와 <아레나>가 바라는 건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하다.
패션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거다.
원로도 신인도 모두모두 한자리에 모여 쇼를 하라, 쇼를.

‘20년 동안 긴장과 고독 속에서 50(오십)이 되어버렸다. 허망과 질투, 좌절 그리고 침묵의 연속이었다. 과거가 되어버린 요즘, 앞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내 자신에게 미안하기까지 하다. 트렌드가 여러번 반복했고 한시적으로 체류하는 것 같은 미래를 또다시 예측하여 본다. 직업적인 고독 없이는 위대한 일이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요즘, 더욱더 고독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디자인을 하는 순간만큼은 흥분되고 더 큰 기쁨을 맛보게 되니, 워커홀릭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오십이 되면서 생기는 깊게 파인 주름살이 얼마나 훌륭한 인생의 페이소스를 나타내줄 수 있는지를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그래서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이라고 했던가…. 이번 컬렉션에 많은 후배들이 개인적인 이유로 참여하지 못했다. 하루빨리 그 친구들의 사정이 좋아져 다같이 남성복 중흥을 꾀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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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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