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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 Identity

중요한 건, 판매와 디자인의 가치를 절묘하게 조율하는 것이다. 대중을 상대로 한 거대 브랜드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이런 미묘한 줄타기의 고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국내 남성복 브랜드를 두루두루 거치며 고수의 반열에 들어선 본의 수석 디자이너 한상혁. 그가 말하는 내셔널 브랜드 디자이너로 사는 법.

UpdatedOn April 24, 2006

 오랜만에 남자를 만나 수다를 떨었다. 비록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의 카페는 아니었지만 즐거웠다. 이 남자의 직업은 디자이너. 그것도 내셔널 브랜드의 디자이너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서울 컬렉션부터 참가하고 있는 디자이너다. 당연히 감성이 풍부할 것이고, 나는 전혀 관심도 없는 별나라 얘기만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현실감각이 보통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디자이너인 동시에 회사에 소속된 봉급쟁이라는 걸 잘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본의 디자인실을 이끌어갈 수 있지만, 목표된 성과가 나지 않으면 정리 해고도 당할 수 있는 자리. 그래도 한상혁의 이력은 지금까진 꽤나 성공적이었다. 자신의 이상과 현실적 한계 사이에서 기막히게 줄타기하는 남자. 처음엔 몰랐는데 계속 보니 거짓말 조금 보태 <왕의 남자> 감우성과 판박이였다. 그런 말 수없이 들었다며, 그가 웃었다.

 

모든 이력의 대부분이 남성복 내셔널 브랜드로 채워져 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글쎄, 우리나라 현실에서 부모가 돈이 많거나 남다른 도전의식으로 뭉쳐 있지 않는 한, 디자이너가 되려면 대부분 의류회사에 들어가야 한다. 의류회사에서 디자이너를 뽑을 때 피팅이 가능하면 한결 수월하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작은 그랬지만, 남성복은 매력이 있다. 특히 내 옷을 내가 입고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물론 내가 만드는 옷이 전부 내 취향은 아니다. 난 본이란 브랜드에 소속된 사람이다. 당연히 본의 콘셉트를 지켜 나가야 한다. 그건 내가 이 회사에 출근할 때부터 지키기로 한 무언의 약속이다.  

예전에 당신이 몸담았던 닉스와 소베이직, 그리고 어바웃 등은 학창 시절 나도 즐겨 입던 브랜드다. 10년 동안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꾸준히 감을 잃지 않았다는 뜻인데, 트렌드를 놓치지 않는 비결이라도?

솔직히, 가끔은 만족스러운 디자인의 옷이 잘 팔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너무 속상해서 대중을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 옷 같은 스타일이 2년 안에 유행하곤 한다. 그렇다고 너무 내 눈을 낮추지도 않는다. 만약 내가 대중이 원하는 스타일을 시장에 잘 내놓았다면 그건 나의 일하는 방식 덕분이다. 나는 내 ‘나와바리’ 안에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잘 조합한다. 일종의 절충 과정이다.  

한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다. 디자이너 또는 샐러리맨으로서 그 나이에 그 정도 위치면 성공한 셈이다.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나?

글쎄, 내가 성공했나? 잘 모르겠지만 우선 질문이니 답하겠다. 대학 4학년 때 우연히 미치코 코리아의 경진대회에 참가했는데 입상했다. 그러고 나서 그 회사에 입사했다. 아무래도 피팅이 가능하고, 무난한 성격이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것 같다.

무난한 성격이 중요한가?

아무래도 회사는 조직이다. 그 조직에서 생활하려면 모난 성격보단 낫지 않겠는가?

야근도 많을 것 같은데.

많다. 하지만 확실히 신입사원 시절보단 적다. 지금은 개인의 사생활도 회사생활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땐 7시쯤이면 퇴근한다. 물론 시즌 땐 야근이 많다.

직업에 관해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만약 어떤 젊은이가 당신처럼 남성복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면 뭘 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며)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일단 남성복 의류회사에 들어가는 게 지름길인 것 같다.

그건 너무 쉽다. 회사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세상 아닌가? 하다 못해 일러스트 학원이라도 추천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일러스트는 솔직히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제일 중요한 건 상상력이다. 그림은 아예 못 그려도 된다. 선배들이 미리 준비해놓은 포맷에 자신의 상상력만 조금 곁들이면 되니까. 입사 1년 동안 웬만한 드로잉은 모두 배울 수 있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도….

디자인할  때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는? 특히 이번 FW를 중심으로 얘기해달라.

지난 SS 시즌과 이번 FW 시즌은, 결국 사랑이란 주제를 가진 연작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사랑은 대중적인 사랑이 아닌, 소외받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SS 시즌엔 야오이 쿠사마의 젊은 시절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큰 주제는 게이 등 사회의 약자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번 시즌엔 서번트 신드롬에 주목했다. 서번트 신드롬이란 장애인이 어느 한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내 경우와 비슷하다. 물론 내가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 - 문화적 코드를 공유한 사람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회사 내에서 관료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답답하다. 그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래도 그들은 다수다. 어떻게 보면 나는 소수에 속한다.

지난 시즌부터 컬렉션에 참가했다. 터줏대감(디자이너 브랜드)의 견제나 텃세 같은 것들을 느꼈나?

전혀. 오히려 많은 격려를 받았다.

내셔널 브랜드로서 컬렉션에 참가했다. 장점은 무엇인가?

우선 조직의 힘을 들 수 있다. 이건 비단 컬렉션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작업하는 여건이 개인 디자이너보다 유리하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어려운 모양의 단추를 만들고 싶다고 치자. 우린 수백 개를 한꺼번에 발주한다. 당연히 단가가 낮아질 수밖에. 하지만 디자이너 브랜드는 다르다. 고작 몇 개 때문에 그 단추를 만들 수는 없다. 또 컬렉션을 준비할 때도 나 혼자만 하는 게 아니다. 여러 명이 같이 고민하고 트렌드를 예측한다.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럼 단점 혹은 한계는?

글쎄, 내 생각에 한계란 없다. 우린 마니아층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는 브랜드다. 이건 절대 안 돼, 라고 규정 지은 것이 없다. 대중에게 어필하면 그만이다. 물론 나 역시 내 옷에 나만의 색채를 입히고 싶은 소망은 있다.

언뜻 이해가 안 된다.

알다시피 컬렉션을 하면 돈이 많이 든다. 본은 캐릭터 캐주얼 중 후발주자다. 한 발 앞선 지이크나 인터메조 등을 따라가려면 뭔가 새로운 게 필요했다. 그 일환이 바로 컬렉션이었다.

하지만 리스크가 만만치 않았다. 만약 혹평이라도 받는다면? 그건 우리 같은 내셔널 브랜드로선 치명타일 수도 있다. 또 돈 없고 빽 없는 내가 컬렉션을 한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이번 컬렉션에서 본의 기본 콘셉트는 지킬 것이다.

내 컬렉션이 아닌 본의 컬렉션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컬렉션이 아닌 본의 컬렉션이란 말은 잘 알겠다. 지난 컬렉션 얘기를 해보자. 모델들이 헬멧을 쓴 퍼포먼스가 재미있었다. 하지만 빅터앤롤프의 카피란 말이 있었다.

글쎄, 그건 겉만 보고 판단한 거다. 난 당시 노멀한 엘레강스에 약간의 파격을 주고 싶었다. 그 표현 방법으로 모델들이 헬멧을 쓴 퍼포먼스를 한 것뿐이다. 남들이 뭐라든 신경 쓰지 않는다. 빅터앤롤프가 나와 같은 의도를 갖고 비슷한 퍼포먼스를 했다곤 생각지 않는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그들의 표현 의도를 직접 물어보진 않았을 것 아닌가?

언젠가 당신 브랜드를 론칭한다고 가정할 때 어떤 남성복을 만들고 싶나?

남성복은 아니다. 난 유니섹스 브랜드에 더 관심이 많다. 무인양품이나 유니클로 같은, 싸고 디자인도 무난하지만 구태의연하지 않은 그런 브랜드를 좋아한다. 같은 옷을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소화해낼 수 있는 옷. 재미있지 않은가? L, M, S 3개가 아닌, 8개쯤의 사이즈를 가진 브랜드, 그래서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싶다.

당신이 디자인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실루엣이다. 본이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만들기 위해선 실루엣을 가장 먼저 확립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은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끝에 멋진 실루엣이 나오는 거다. 아직도 우린 과정 중에 있다. 컬렉션을 통해 그 과정들이 대중들에게 비춰졌으면 한다.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는?

글쎄, 요즘은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없다. 편애하지 않는다. 굳이 꼽는다면, 레이 가와쿠보의 경영 마인드, 마르지앨라의 감성, 빅터앤롤프의 상업적 코드를 작가주의 감성으로 잘 포장하는 기술 등은 조금 부럽다.

알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멋진 말을 해야 할까?(잠시 고민) 난 대학 시절 단팥빵과 우유를 좋아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사실 그 음식이 별로 트렌디하진 않지 않은가? 자기가 좋아하는 건 끝까지 밀어붙였으면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 일을 할 땐 넓이보다는 깊이가 더 중요하다. 팔방미인이라든지 멀티플레이어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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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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