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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의 축구론

지난 2월 19일 오후 1시 15분. 50파운드짜리 암표를 사서 겨우 본 토트넘 대 위건전은 2대 2로 끝났다. 이영표는 변함없이 풀타임 출장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2시간 뒤. 토트넘 핫스퍼 부동의 사이드백으로 훌쩍 커버린 이영표와 마주 앉았다. 공고한 그의 한 꺼풀을 벗기는 데 걸린 길고도 짧은 2시간의 기록.

UpdatedOn March 21, 2006

중요한 홈경기였는데 비기고 말았다. (멀리서였지만)표정이 만족스럽지 않아 보였는데, 오늘 경기가 영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 괜찮다. 축구인데, 뭘… 축구….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편이다.

(무척 단호하게)아니다.

좋다. 그럼, 그런 식의 말에 주로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런 말을 들으면 중학교 때 받은 IQ 테스트 결과가 생각난다. 85! 그 이야기를 항상 해준다. 내 IQ가 85였다고.

지금은 좀 올라가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IQ 테스트란 게 문제가 많기도 했고.

스스로 단점이 많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단점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다가)축구에 관해서?

(잠시 고민하다가)물론.

글쎄, 어떤 거 하나를 끄집어내기 힘들 만큼 나의 모든 것이 그렇다. 기술이든, 전술이든 내 마음에 안 들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렇다면, 그게 바로 단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무 많은 부분에서 그런 걸 느낀다. 어느 한 부분을 콕 집을 수도 없을 만큼.  

우리가 보기에는 거의 빈틈이 없다.

당신의 팬인 나는 아직도 꿈만 같다. 프리미어 리그팀의 한 포지션을 꿰차고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내가 선택했고, 힘든 길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에인트호벤 때와는 또 다른 행복을 느낀다. 에인트호벤에서는 유럽 축구에 완전히 적응하는 단계였고, 이곳에서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만족하고 있다.

실제로 토트넘 핫스퍼에서 프리미어 리거다운 관리를 받고 있다고 느끼나?

그렇다. 네덜란드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에서는 모든 클럽 시스템이 선수 위주로 진행된다.   

우리나라는 팀 위주로 진행된다는 이야기인가?

꼭 그렇진 않다. 무조건 외국이 좋다, 이런 식의 이야기라면 관두자. 한국도 충분히 좋은 게 많고, 실제로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게 많다. 이곳도 축구에 관한 모든 게 최고인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 더 좋은 시스템도 있다. 다만 전체를 봤을 때 영국 축구가 오래전부터 시작됐고, 잘 가다듬어져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선수 관리나 프로그램이 고도로 발달해 있다. 심지어 발렛 파킹해주고 가방 하나 들어주는 것까지.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아주 작은 것만 봐도 모든 게 선수를 위해 존재한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아까 한국적인 게 세계적인 것도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어떤 게 그런가?

음, 그건 문화 차이 때문일 거다. 여기는 선수와 감독이 수직이 아니라 수평 관계다. 그런 게 때론 부드럽고 편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안 좋을 때도 있다. 우리나라의 예절이나 서로에 대한 존경이 경기장 안에서든 연습에서든 좋게 발휘될 때가 많다.

어떤 ‘질서’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감독과 싸우는 일도 종종 있지 않나. 그런 걸 좋게 보면 자기 의사 표현이 되지만, 팀이나 어떤 집단 차원에서는 한국적인 정서가 조금 더 나은 것 같다. 좋은 쪽으로 경기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선발로 출장해서 풀타임으로 뛰었다. 마틴 욜 감독이 당신을 총애하고 늘 필요로 하는 이유는 뭘까?

선택이 나뿐이어서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팀에는 좋은 선수들이 너무 많다. 경기에 나가지 않는 선수들도 자국의 국가대표일 만큼. 어떤 선수가 나와도 제몫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핵심은 연습 때 가장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는 거다. 감독은 늘 그것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 감독은 항상 중립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선수를 편애하지 않는다. 연습 때 가장 좋은 컨디션을 보인 선수를 경기에 투입시키게 마련이다. 그것 때문이지, 날 편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신의 모범생 이미지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글쎄, 욜 감독은 네덜란드 사람이고 실제로 네덜란드 중위권 팀에도 있었다.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데려온 것일 테고.

생긴 것만 보면 욜 감독은 아드보카트와 좀 닮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타입의 코치인가?

부드럽고 유머러스하다. 강하고 부드러운 걸 잘 병행해서 팀을 이끌 줄 안다. 지금 성적(EPL 4위)이 말해주듯 유능한 감독이다.

게리 네빌처럼 뛰는 양이 많고, 궂은 일도 도맡아 하는 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자리인 사이드백은 여전히 매력적인가?   

그 포지션은 상대 입장에서 보면 이렇다. 골이 날 확률을 봤을 때, 기본적으로 가운데는 공간이 비좁다. 그래서 상대도 상대의 사이드를 무너뜨리려 하고, 우리도 공격할 때 상대의 사이드를 최우선으로 공략하게 마련이다. 그 정도로 수비에서 중요하다. 공격적인 면에서도 공격의 시발점이 되는 진지한 공간이다. 예전에는 사이드를 못하는 선수가 본다는 개념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 축구에서는 단 한 포지션도 그런 곳이 없다. 실제로 내가 그 위치에서 뛰고 있어서도 그렇지만, 특별히 재미있는 위치다. 수비도 공격도 할 수 있다. 체력적인 축구를 즐기기 때문에 조금 힘들긴 하다. 몸싸움도 많이 하고. 힘들 때도 많지만, 그걸 배우고 이겨내려고 왔기 때문에 당연한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화도 잘 안 내는 편이다.

아니다. 화가 날 때는 화낸다.

미도는 왜 그렇게 화를 많이 내는지 모르겠다.

그 아이는 원래 그렇다. 미도의 스타일이다. 화내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를 표현하는 거다. 미도가 그래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곳의 심판들은 어떤가?

좋다. 그런데 특별히 유럽 심판들이 한국 심판에 비해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건 있다. 유럽 심판이 하나 다른 건,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한쪽에서 실수했다고 치자. 그럼 이쪽도 한 번 봐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우리나라 사람 특유의 정이 작용한다. 이기고 있는 팀이 지고 있는 팀을 도와주고 싶은 분위기가 종종 있다. 결국 한 번 실수할 걸 두 번 실수하는 거다. 여기는 5대 0으로 이기고 있어도 패널티킥을 줘서 6대 0으로 만드는 게 예삿일이다. 그런 차이가 있지만, 질적으로는 심판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포백에서 스리백으로 전환할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사이드백으로서 준비할 사항이 다를 것 같은데.

스리백은 항상 뒤에 3명이 준비돼 있기 때문에 좀 더 공격적인 포메이션이 된다. 실제로 공격적인 시스템이다. 포백일 때 나는 공격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 누가 하나 나가면 공간이 비기 때문에 그 공간을 메워야 한다. 수비에 중점을 둔 포메이션인 거다. 스리백보다 포백이 수비가 더 많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스리백은 사실 수비가 5명이다. 스리백에서는 1명이 나가도 뒤에 또 누군가가 있다. 4명이 항상 존재하는 거다. 포백은 스리백에서 5명이 커버하는 공간을 3, 4명이 커버해야 하니까 그만큼 더 힘들다. 스리백은 수비가 적은 게 아니라 오히려 수비가 많은 거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이제 두 가지 모두 대처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혹시, 혹시 말인데, 토트넘에서 경기를 할 때 맨체스터의 박지성을 의식하는가?

아니다. 왜 의식하나?

상대팀으로 만났을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유럽에 나와서 한국 선수를 상대로 만난다는 게 흔한 경우도 아니고. 예전에 네덜란드에서 종국이랑 남일이랑 했고, 이번에 지성이랑 세 번째다. 네덜란드에서도 종국이가 오른쪽 윙, 내가 왼쪽 윙이어서 서로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일대일 상황인데도 다른 곳에 패스하고 그랬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가장 당신 마음에 드는 동료는 누구인가?

경기마다 다른데 나랑 맞춰야 할 사람은, 첫 번째는 수비수인 래들리 킹이고, 두 번째는 다비즈다.   

당신다운 대답이다. 그럼 경기장 밖에서는 누가 그런 친구인가?

다 친하다. 로비 킨과도 그렇고 미도와도 그렇다. 미도는 우리집에 와서 플레이스테이션도 같이 한다. 다 사이좋게 잘 지낸다.

역시 당신답다. 토트넘의 라커룸 풍경은 어떤가?

이곳은 축구가 그냥 축구가 아니어서 무슨 전쟁을 앞둔 분위기에 더 가깝다.

솔직히 당신이 공격에 더 가담했으면, 그래서 골도 넣고 그랬으면 좋겠다. 굳이 당신의 축구에서 공격과 수비의 비중을 나눈다면?

내가 수비수이기 때문에 첫 번째는 수비고, 그다음이 공격이다. 공격을 굳이 안 해도 되니까. 하지만 수비는 내가 안 하면 안 된다. 내가 공격적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해야 할 건 수비고 공격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단련된 건가?

아니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공격수였다. 지금은 그 욕구를 컨트롤할 수 있는 경험이 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에 대한 욕구가 없나?

축구에서는 공격만큼 재밌는 게 수비다. 공격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비는 수비만의 매력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다.

온종일 축구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축구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주로 무얼 하나?  

축구를 안 할 때는 거의 대부분 쉰다. 축구를 위한 휴식.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대부분 아내랑 아이와 지낸다. 영어 공부도 하고.  

토트넘 팬들 굉장하더라. 무서워서 혼났다.  

토트넘 팬이 좀 별나다. 홈경기마다 거의 매진되는 열광적인 팬이다. 3만8천 석인데 경기장이 작아서 못 들어올 정도다. 관록 있고 열정적인 팀이다. 그런 응원을 받는 팀에서 축구하는 건 축복이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나?

물론. 자부심을 느낀다. 단, 축구에 관해서는 말고. 한국이 월드컵 4강까지 갔지만, 여전히 도전자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인이란 사실에 대해서는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을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들었다.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좌우명은 아니다. 그 말은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항상 되뇐 말이었다. 월드컵이 끝난 뒤의 상황은 선수들에게 아주 위험했다. 월드컵 자체는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월드컵이 끝난 뒤에는 한국 선수의 인기가 필요 이상으로 높아졌고, 현실과 동떨어진 거품 속에서 누구든지 자기가 서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넘어지지 않는 법이다. 교만한 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인데, 월드컵 끝난 뒤의 분위기가 나를 포함해 어리고 연약한 인간들에게 너무 위험했다.

월드컵이 목전이다. 솔직히 우리나라 대표팀의 최대치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나?

거기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다. 어떤 이의 말처럼, 목표를 정하면 할 수 있는 선을 긋는 거다. 그 이상 할 수도 있는데 그 목표에 도달하면 멈춘다. 불가능한 건 없다. 어느 팀이든지 우승 확률이 나오지 않는가. 150대 1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는 거니까, 늘 가능성이라고 열어놓는다.

행여 우리가 또다시 4강에 진출한다면, 그래서 다시 누군가와 준결승전을 치른다면? 그런 생각 해봤나? 4년 전에 무척 아쉬웠을 텐데.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이런 생각은 한다. 축구라는 게 정말 재밌고 즐거운 건데 축구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팀, 동료, 팬이 있기 때문에 오직 즐기는 것만 갖고는 부족한 것 같다. 아무리 재밌어도 결과가 안 좋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비판도 따르고. 그런 것들이 축구를 더 이상 즐길 수만은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런 게 늘 아쉬웠다. 학교 다닐 때는 늘 즐거웠는데, 프로가 되고 나서는 즐기기보다는 승리를 생각하고 팬들을 생각해야 했다. 그런 게 더 이상 축구를 즐길 수 없게 만드는 것만 같다. 내 꿈인 축구 선수가 되어서 좋긴 하지만 그냥 즐길 수만은 없다. 자유롭지 못하다.

직업병 같은 거 아닐까?

언젠가는 자유로워질 거라 믿는다. 사실 내가 말을 안 하면 아무도 모른다. 그건 내 안에 있는 거다. 저 선수가 책임의식을 느끼는지,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그건 내가 컨트롤하는 건데, 여전히 미숙하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아주 잘하는 편 아닌가?

내가 즐길 순 있는데 남을 즐겁게 하는 건 좀 다르다. 한정적이다. 내가 잘하면 즐거움을 주지만 지면 즐거움이 아니라 짜증을 주는 거다. 나는 거기서 자유롭고 싶다는 거다. 특히 나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어서 더 그래야 한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오히려 더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결정되는 거면 마음 편히 따라야 하는데 그걸 잘 못한다. 내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다. 언제까지 축구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다. 안 될 수도 있다. 은퇴할 때까지 안 될 수도 있지만. 좀 더 애써볼 참이다.

아드보카트 감독이나 핌 베어백 코치는 우리나라 대표팀과 썩 잘 어울린다. 홍명보는 어떤가? 홍명보가 센터백으로 있었을 때와 코치로 있는 지금의 차이를 느끼는가?

명보 형은 오랜 시간 동안 있었고, 대표팀이 어떻게 흘러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가 코치로 합류한 건 대표팀에 큰 힘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

센터백 자리가 허전하진 않나?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다른 선수는 어떡하라고. 이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 아주 좋은 선수가 있는데 그가 떠나면 아쉽지만, 그 선수가 없으면 또 누가 온다. 인류의 스포츠 역사를 봐도 스타가 떠난 자리에 새로운 스타가 반드시 나타났다. 명보 형 자리에 아주 좋은 선수가 나올 거라고 믿는다.

가만히 들어보니, 당신은 철이 완전히 든 것 같다.

이제 스물여덟이다. 축구란 게 무척 힘든 거여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힘들다는 말을 상당히 많이 한다.

힘들다. 실제로 모든 선수들이 그럴 거다. 팬들에게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알고있는지 모르겠지만, 김동진과 조원희를 비롯해 다른 선수들이 당신 자리를 탐내고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축구는 컨디션 좋은 선수가 나가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 맘대로 된다면 1백 살까지도 할 수 있을 거다. 이 사람 정말 대표 선수구나, 라고 느끼는 선수가 있는데 그 두 선수가 꼭 그렇다. 축구 잘하는 선수는 많지만 오랜 시간 동안 정신적으로 그렇게 바른 선수들은 많지 않다. 충분히 자격이 있는 선수들이다.

그들은 프리미어 리그가 된 이영표 선수를 보고 배우려고 애쓸 것이다. 그나저나 독일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피레스나 지단을 상대해야 하는 운명이다. 대비책이랄까, 세워둔 계획이라도 있나?

이미 여러 번 마주쳤다. 그때마다 세계적인 선수임을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수비는 혼자가 아니라 팀이 하는 거다. 서로 돕고 조직적으로 마크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2002년에 이미 경험한 바 있다.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같이 하기 때문에.

당신을 여기서 이렇게 만나기까지 너무 힘들었다. 국내 언론에서 보이는 관심이 아직도 부담스러운가?

예전에는 기사가 내 의사와 다르게 나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웃음). 하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언론사가 가진 고뇌를 알기 때문에.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기 때문에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90분간 집중해서 일하는 직업치고는 많은 돈을 받는다. 당신의 능력이나 팀 기여도만큼 돈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만 없다.

나라면 다만 얼마라도 더 받고 싶어할 텐데…. 아무튼 연봉은 당신이 축구를 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몇 번째쯤인가?

글쎄, 한 4, 5번째쯤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4, 5번째보다 앞에 있는 것, 연봉보다 중요한 건 무엇인가?

첫 번째는 하느님. 축구란 걸 허락했으니까.

축구를 통해 하느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크다. 두 번째는 재밌다는 거다.

어릴 때부터 중요시한 거다. 또 하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의 삶이 중요하기 때문에 내 삶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 나머지 하나는 나뿐 아니라 축구를 통해 같이 즐거움을 느끼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위해서.

누구에게나 롤 모델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를 닮으려고 예전에 노력했거나 지금 애쓰고 있나?

마라도나를 참 좋아했다. 내가 중학교 때.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었을 때 당시에는 강팀이었는데 지금은 3부 리그로 떨어졌다. 어쨌거나 마라도나가 좋아서 항상 위에는 파란색, 아래는 흰색만 입고 연습을 했다. 나폴리팀의 유니폼 색깔이었다. 그것 때문에 연대에 가고 싶기도 했다.

제일 아쉬웠던, 그래서 다시 한번 했으면 하는 경기가 있을 거다.

아주 많다.

그중에서 이건 나 때문에 졌어, 이런 경기 말이다.

2002년 아시안게임 4강 때 패널티킥을 못 넣었다. 그래서 우리가 결승에 못 가고, 금메달도 못 따서 군 면제도 못 받았다. 와일드카드로 들어간 거였는데, 그 멤버 중에 월드컵을 뛰지 않은 선수는 실제로 군대에 다 갔다. 난 월드컵 때 면제받았지만. 그때 축구를 하면서 가장 아쉬웠다. 어릴 때, 초등학교 때는 무조건 울었다. 그때 5개 대회에 나가서 세 번 우승하고 두 번 준우승했다. 딱 두 번 진 거다. 그래서 두 번 울었다. 그때는 대회 나가면 무조건 우승하는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우리 팀이 잘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축구하면서 초등학교 것까지 다 합쳐 7, 8번 정도 운 것 같은데 아시안게임 4강전이 그중 하나였다. 날 울게 만든 경기 중 하나.

2006년은 이영표에게 어떤 1년이 될까?

글쎄. 음, 의미 부여까지는 아니지만, 2006년에는 좀 더 축구에 있어서 발전하고 싶다. 하이 레벨의 축구를 하고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축구하면서 나보다 잘하는 선수가 많다고 느끼나? 그래서 피곤하진 않나?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항상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무슨 고교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그때 내가 왜 떨어졌을까? 그러면서 그때 선발된 선수가 떠올랐다. 경쟁 상대로 삼으려면 청소년 대표팀에 있던 앙리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나는 왜 이 옆에 있는 선수들을 질투할까? 그럴 바에는 질투하지 말자. 내가 정말 톱 클래스 중의 톱 클래스가 될 수 있나? 그런 재능을 갖고 있나? 그렇지 않으면 시기하지 말자. 그게 어릴 때 가진 마음이었다. 지금은 주위에 잘하는 선수가 워낙 많으니까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경기 전에 최선의 준비를 다해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경기에 나를 잘 표현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팀의 승패를 결정할 순 없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열심히 하는 거 말고는.

그 뒤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다. 어쩌면 축구 선수도 흔한 직업일지 모른다. 하지만 프리미어 리거는 그렇지 않다. 지금 무엇 때문에 여기 있다고 생각하나?

하느님 때문에.

주신 거다?

그렇다. 한때 내가 열심히 노력했고, 노력한 만큼 얻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전에는 좀 달랐다. 대표 선수가 되기 전까지는 힘든 시간을 많이 겪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처음 대표 선수가 되었다는 거다. 올림픽 대표 6~7명이 대표 선수였다. 4학년 때 내가 주장이었는데 난 대표 선수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대학 때 다른 선수들은 쉬고 있을 때 나는 계속 열심히 했다. 중학교 때 콘을 들고 나가서 드리블 연습하고 줄넘기 하고 산도 넘었다. 그렇게 남들 쉴 때 10년을 해도 안 되는 거다.

다른 선수는 쉬면서도 되는데 나는 안 되는 거다. 그때 느꼈다. 노력한 만큼 열매를 얻는다던데,

그게 아니구나. 축구는 재능 있는 선수가 되는 거구나. 너무 큰 절망을 느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고 1, 2주 있다가 대표팀에 가서 테스트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가서 테스트 받고 바로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이 되었다. 그리고 3개월 있다가 A매치 대표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온 거다. 당시엔 공 들고 다니는 막내였다. 스물두 살이었다. 스물두 살이면 정말 빨리 된 거다. 그것도 불과 그 생각을 한 지 3개월 뒤에. 그때부터 하느님 믿기 전까지 2, 3년간은 그렇게 생각했다. 노력한 만큼 된다는 게 진리라고. 그런데 하느님을 믿고 나니까 그렇지 않았다. 내가 열심히 운동한 것부터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까지, 나를 이끈 힘이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물론 당신의 믿음을 존경한다. 하지만 우리 대화에 하느님을 가급적 등장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디까지나 축구 잘하는 건 당신이지 않나? 너무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를 낮추는 일은 믿음 없이는 힘들다. 내가 느끼는 겸손은 능력이 있는데 없다고 말하는 거다. 나는 능력이 없어서 없다고 말하는 거니까 솔직한 사람이다. 없는 걸 있다고 말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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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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