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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바야흐로 야구가 세상의 모든 이슈를 장악하고 있는 시즌. 3명의 필자가 야구에 처음 매혹당했던 시절, 그 기억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UpdatedOn June 29, 2011




태평양 돌핀스, 곽권희, 그리고 1989년
1989년 10월 11일. 고1이던 나는 그날도 수학 문제집과 연습장이 펼쳐진 책상 앞에 앉아 한쪽 손에 머리를 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를 괸 왼팔 옷소매 속으로는 이어폰 선이 길게 이어져 한쪽 귓속에 꽂혀 있었고, 그 이어폰의 반대쪽 끝은 공업 실습 시간에 직접 납땜해서 만든 주먹만 한 AM 라디오에 꽂혀 있었다. 납땜질이 험했기에 소리는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고, 주파수가 가장 잘 맞은 상태에서도 소음은 방송음보다 컸다. 하지만 혹시 내 귀 밖으로 흘러나온 소리가 엄마의 귀에까지 들릴까 한껏 볼륨을 줄여놓아야 했고, 그 속에서 들어야 할 소리를 골라내느라 미간을 구기곤 했다. 
그날 준플레이오프 3차전 중계방송이 있었다. 그때 내가 응원하던 태평양 돌핀스는 전신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프로 원년 기록을 시작으로 7년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꼴찌를 독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김성근 감독과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이라는 신인 투수 3인방을 중심으로 기적적인 돌풍을 일으키더니 정규시즌 3위에 오르면서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다시 준플레이오프에서 막강 삼성을 맞아 1승 1패로 맞서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3차전이 열리던 그날 역시 1대1로 팽팽히 맞서 있었고, 연장 10회 말 2사 만루의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한 뒤로 무려 3시간 49분이 흘러가고 있었고, 문밖의 어머니도 너무 오래 책상 앞을 지키는 아들을 향해 슬슬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스포츠를 그저 시간과 혈기만 잡아먹는 고약한 중독 증세로 여길 뿐이었던 어머니에게, 특히 야구란 시작했다 하면 서너 시간을, 그것도 일주일 내내 반복해서 통째로 잡아먹는 괴물이고 악질이었다. 그런데 해야 할 공부가 많다고 저녁조차 뜨는 듯 마는 듯하고는 방에 콕 틀어박혀 네 시간 가까이 파묻혀 있는 이유가 고작 야구 중계방송 때문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또 한 번 야밤에 닭 잡는 소리가 날 수도 있었다. 이제 정말 라디오를 꺼야만 했고, 내 손가락은 진작 라디오 전원 다이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태평양 곽권희의 타석에서 ‘딱’ 하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송인득 아나운서의 숨넘어갈 듯한 중계 멘트가 이어졌다. “쳤습니다. 크다, 크다. 센터 뒤로, 센터 뒤로… 아, 넘어갔습니다….”
‘넘어갔다’는 말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주저 없이 라디오 전원을 내리고 이어폰을 풀어 라디오 몸통에 둥둥 감은 다음, 다시 서랍 속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큰일 치른 사람 표정으로 기지개를 켜며 방문을 나서고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더니 배가 고프다’며 다시 밥 한술을 물에 말아 김치를 얹어 본격적인 저녁식사를 했다. 단타 하나만으로도 끝내기가 되는 순간 터져 나온 것은 틀림없는 홈런이었고, 더는 알아야 할 것이 없었다.

그 20년 뒤, 어머니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나는 ‘야구 작가’라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 역시 공부보다는 야구에 더 몰입한 결과였을 테고, 그렇게 억눌린 욕망 때문에 더욱 드세게 야구장을 그리워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야구 작가로서 나는 언젠가 1989년의 프로야구사에 관한 글을 써야 했고, ‘준플레이오프 3차전 10회 말 2사 상황에서 터진 곽권희의 극적인 끝내기 만루 홈런’에 대해 생생한 묘사를 해댔다. 하지만 곧 ‘1989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 끝내기는 홈런이 아니라 안타던데요…’ 라는 편집자의 전화를 받아야 했고, 그럴 리가 없다면서 뒤늦게 들춘 기록지에서 어이없게도 ‘곽권희, 10회 말 단타’라는 대목을 확인했다. 곽권희의 타구가 ‘넘긴’ 것은 담장이 아닌 중견수의 키였고, 3루 주자가 홈을 밟으면서 경기가 끝났기에 결국 기록에 남은 것은 단타일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단타’는 고물 라디오의 이어폰 선을 거치면서 내 머릿속에 극적인 끝내기 중월 홈런의 너무도 생생한 그림을 새겼던 것이다.
이제 전 경기가 TV로 중계되는 데다, 누구 눈치를 봐야 할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실황으로, 재방으로, 인터넷 동영상으로 수십 번은 돌려본 나지완의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 끝내기 홈런보다도, 있지도 않았던 1989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 곽권희의 ‘끝내기 홈런’이 내 기억 속에 더 생생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모든 걸 쓸어간다는 세월이 때로는 엉뚱한 곳을 깎아내 더 깊게 새기는 건 아닐까 생각해볼 뿐이다.
Words 김은식(야구 작가, <야구의 추억> <돌아오지 않는 2루 주자> <야구 상식 사전> 저자)

그때 그 LG
이번 시즌 프로야구에서는 LG 트윈스가 꽤 잘하고 있다. 노는 물이 상위권이고 1990년대 초반 신바람 야구를 리메이크하고 있는 듯하다. 좋겠다. 나는 LG의 서울 라이벌 OB 베어스 팬이었다. 1990년대엔 두 팀 라이벌전이 참 흥미진진하기가 깨알 같았지. 붙었다 하면 박진감 넘치는 명승부였고, LG에게만은 지면 안 된다는 강박증 때문에 팬들이 전부 로커가 되었다. 잠실벌을 찌르던 샤우팅 창법의 웅장함이란. 쩝. 그래도 상대 전적에서는 OB가 꽤 열세여서 OB 팬들은 그냥 LG 약 올리는 재미로 버티곤 했다. LG가 이겼는데도 ‘엘지 바보~ 엘지 바보~’라는 특유의 멜로디를 합창하며 경기장을 빠져나왔으니까. 그런데 2000년대 들어 LG가 정말 바보가 되더니 하위권에 알 박고 좀체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재난이 일어났다. 그동안 두산으로 이름을 바꾼 베어스가 상대 전적에서 역전까지 해버리고 나자 라이벌 의식도 없고 영 재미없어졌다. 이건 뭐 약 올리기 미안한 정도가 아니라 불쌍한 LG 팬들을 만나면 야구 얘기를 꺼내기에 앞서 몰래 눈물을 훔쳐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올해 LG가 바짝 선전하고 있다.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명언도 ‘쌩까고’ 아주 잘나간다. 박현준, 리즈, 주키치 등 선발진이 탄탄하고, 돌아온 이병규, 쿨가이 박용택 등 야구 센스쟁이들이 투수들을 딱딱 도와주고 있다. 더 이상 예전의 그 불쌍하고 힘없는 LG가 아닌 것이다. 이런 날을 학수고대하며 살아온 골수 ‘엘빠’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자, 그러니까 요 타이밍에 내가 하고픈 말은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LG 좀 까겠다는 거다. 지금 나는 베어스 팬도 아니고 히어로즈 팬으로 옮겨 3년째 맘고생 중이니까 뭐라고 까든 한 번만 봐주길. 꼴찌 팬 불쌍한 거 알지 않은가. 응?
아무튼 LG 까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일은 베어스의 전설이자 위대한 불사조 박철순 투수의 은퇴식 사건이다. 1997년 4월 29일. 젠장, 피똥을 싸도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말도 마라, 그날 우리 전설의 뒷모습 끝자락이라도 보기 위해 팬들이 잠실벌을 가득 채웠다. 나는 학교고 나발이고 ‘째고’ 야구장으로 달려갔다. 나는 가급적 삼루 응원석에 가까이 앉고 싶었지만 자리는 외야 구석탱이뿐이었다. 그날 어째서인지 LG 팬들이 더 많이 와서 내가 앉은 OB 측 외야에도 LG 팬들이 넘어와 있는 상태였다. 곰팀을 응원하다 보니 발이 느려졌다고 자책하며 LG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자니 좀 불안했다. 그래도 나는 박철순 투수가 마지막으로 등판하는 모습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아오, 근데 LG가 그날따라 왜 그렇게 야구를 잘하는 거냐고. 그 당시 워낙 만만한 팀도 아니었지만 너무 세게 때리더라. 좀 살살하지. 좋아하는 선수가 떠나는 마당에 경기 결과야 큰 의미가 있겠느냐만 이기면 좀 덜 슬플 것 같았고, 팀이 그의 은퇴식에 승리를 바쳐 마무리를 영광스럽게 만들어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단 말이다. 근데 내 주위 LG 팬들은 베어스가 못할 때마다 기뻐했고 LG가 득점할 때마다 개 난리를 쳤다. 그날 OB는 아주 큰 점수 차로 LG에게 ‘발렸다’. 꼭 박철순 은퇴식 때 이래야겠어? 하는 분노가 일었다. 너희들은 레전드에 대한 경의도 없냐. 박철순이 누군데. 눈시울을 시큰하게 만들 정도로 투혼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불사조 아니냔 말이다. 그가 그라운드를 떠나는 마당에 단지 페넌트레이스 1승의 재미에 급급할 뿐이냐. 어쨌든 그날 그렇게 털리고, 박철순은 떠나고, LG는 한없이 미워 죽겠고 야구 보다가 눈물이 다 나더라는 얘기다.

생각해보면 뭐, LG 선수들이 야구 열심히 한 게 뭐 잘못이겠냐 싶다. 야구계의 전설을 보내는 자리에서 경의란 최선의 경기, 그 자체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게, 야구니까. 그리고 매너 없는 일부 빼고 대다수 LG 팬들은 경기 뒤의 은퇴식 때 마운드에 키스하는 박철순 투수의 이름을 뜨겁게 연호해줬다. 베어스 팬이고 LG 팬이고 간에 잠실을 가득 채우던 그 소리에 진한 감동을 느꼈고 난 LG를 용서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 일 다 잊었으니까 LG 너희 올해 제발 플레이오프도 나가고, 오랜만에 우승도 하고 그래라. 멋진 투혼의 신바람을 보여주면 LG에 대한 애증도, 연민도 다 없어질 거다. 결론은 LG 파이팅!
Words 박상(소설가)

우리 얘기는 선동열로 시작해서
선동열로 끝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했던 여자는 유명 야구 선수의 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그 애와 난 같은 반이었다. 그 유명 야구 선수 아저씨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그해인가, 그 전해인가 은퇴했다. 그 여자애는 우리 반에서 제일 예뻤고 나는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미남이었다. 일등으로 미남인 애가 다른 반 여자애랑 사귀고 있었기 때문에 나랑 그 여자애가 사귀는 건 당연했다. 사귀잔 말은 안 했지만 우린 마음으로 많은 걸 말한 사이였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삼성 라이온즈 팬이었다. LG 트윈스 점퍼를 입은 애들을 봐도, 해태 타이거즈 필통을 들고 다니는 애들을 봐도 안 부러웠다. 그때 우리 집은 부유한 편이 아니어서 나는 ‘리틀 삼성 라이온즈’ 같은 데는 가입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장인어른이 몸담고 있는 클럽이니 나에게도 가족 같은 곳이지, 란 생각을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 당시는 해태 타이거즈의 시절이었다. 왜냐? 선동열이 뛰었으니까. 1990년이었나, 1991년이었나? 선동열이 공을 던진 다음 날이면 반 남자애들은 모두 선동열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선동열은… 엄청난 남자였으니까. “야, 우아” 이 정도만 말해도 다들, 이게 누구에 대한 이야기고, 이제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변함없이 선동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유명 야구 선수의 딸이자, 자타 공인 내 여자친구가 분명한 그 애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우리 아빠가 예전에 선동열한테 홈런 쳤거든. 우리 아빠가 훨씬 세거든.” 그러고 나서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는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선동열만 얘기했다. 계속,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갈 때까지. 그 애는 전학을 갔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나, 완전 별로인 남자 꼬마 애였군.

어릴 땐 역시 센 팀을 응원하게 된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지 중학교 1학년 때였는지 역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당시는 LG 트윈스 천하였다. 두꺼운 검은색 테가 햇빛에 반짝이던 선글라스를 쓴 이광한 감독 아저씨가 ‘자율 야구’를 들고 나온 때였다. 그땐 그게 무슨 권법의 초식 같은 건 줄 알았다. 1994년 LG 트윈스에 전설의 3인방,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이 입단한다. 셋의 인기는 지금의 그 어느 선수와도 비교가 안 됐다. 요즘 여자들이 현빈을 좋아하듯, 그렇게 좋아했던 것 같다. 당연히 셋은 야구도 정말 잘했다. 세 선수가 입단하기 전 해와 그 전해에도 LG 트윈스는 강팀이었지만 셋이 입단한 해 LG 트윈스는 우승했다. 역시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우승 기념으로 LG 트윈스는 잠실 운동장에서 청백전 형식의 자체 경기를 무료로 펼쳤다. 그때 처음으로 야구장에 갔다. 아빠랑 손잡고 지하철을 타고. 만날 일만 하느라 야구가 뭔지도 모르는 아빠였는데 나랑 같이 야구장에 가서 진로 소주를 한 병 마시고, 그 옆에서 나는 잤다. 사람이 너무 많았고 선수들은 누가 누구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남자애들은 스포츠를 통해 ‘정정당당함’을 배운다. 나는 이 글을 특히 야구 선수들이 보면 좋겠다. 이렇게 쓰는 건 촌스럽고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예전에 야구 하던 아저씨들은 용감했고 정직했던 것 같다. 그들은 오직 공과 배트와 글러브와 동료를 믿었다. 이기면 웃고 지면 울었다.
한국시리즈 최종전 9회 말, 마운드에 선동열이 서 있고 포수는 장채근. 선동열이 혼신을 다해 마지막 공을 던진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간 공을 장채근이 잡는다. 선동열이 달려가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 장채근의 품에 안긴다. 해태 타이거즈 우승! 이제 선동열 전 감독님은 그렇게 날렵하게는 못 뛸 것 같지만 순수했던 기쁨의 순간은 우리 모두의 역사고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런데 그때가 바람의 아들 이종범 형이 해태 소속 선수였을 땐가? 아직 학생이었을 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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