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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와인 한 잔

와인 애호가들은 봄에 어떤 와인을 떠올릴까? 그림 같은 풍경에서 즐긴 와인, 이탈리아 소도시에서 미식과 곁들인 와인, 일본 한 와인 바에서 맛본 새로운 와인. 이 계절 어떤 순간 마신, 잊지 못할 와인과 이야기에 대해 들었다.

UpdatedOn May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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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샤토 도시에르 로제 2020

김성국(조선 팰리스 총괄 소믈리에, 소믈리에 크루 ‘쏨즈’ 공동 창립자) 

재작년 봄, 프랑스 출장 때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수십 종의 와인 테이스팅, 데이터 수집, 수많은 미팅으로 피로가 겹겹이 쌓였다. 그러던 중 지중해 연안 도시 나르본을 방문했다. 앰배서더로 활동하는 도멘 바롱 드 로칠드 라피트의 샤토 도시에르 와이너리를 가기 위해서였다. 수차례 휴가로 찾은 곳이어서인지, 도착하자 설레는 감정이 밀려왔다. 세미나와 와이너리 투어를 마친 후, 테라스에 잠시 앉아 있었다. 이윽고 직원들이 소박한 식사와 함께 로제 와인을 내주었다. 별 생각 없이 한 모금 마셨는데 남부의 여유와 자유로움이 물씬 풍겨왔다. 차분하고 단정한 산미를 중심으로 금귤과 한라봉 껍질, 자몽, 라벤더, 로즈메리가 어우러졌다. 복합적인 향의 하모니가 포근한 이불처럼 부드럽게 몸을 감싸자 비로소 출장이라는 긴장이 풀리고 휴양 모드로 전환됐다. 그날 이후 매년 날씨가 따뜻해지면 가장 먼저 이 로제 와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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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로제 와인 중에서도 ‘파스쿠아 일레븐 미닛 로제 2020’을 선호한다.
자몽과 복숭아, 딸기와 장미꽃 향처럼 화사한 향이 입안을 깨운다. ”

02 파스쿠아 일레븐 미닛 로제 트레베네치에 2020

양윤주(와인 교육서비스업 ‘양쏨멀티와인’ 대표, ‘한국 소믈리에 대회’ 최연소 여성 우승자)

환절기에는 로제 와인이 생각난다. 일교차가 클 때는 신선한 향의 화이트와인을 마실지 묵직한 풍미의 레드와인을 마실지 고민되니까. 그럴 때 두 가지 특성이 모두 있는 로제 와인이 해결책이 된다. 여러 로제 와인 중에서도 파스쿠아 일레븐 미닛 로제 2020을 선호한다. 자몽과 복숭아, 딸기와 장미꽃 향처럼 화사한 향이 입안을 깨운다. 작년 봄 엄마와 떠난 이탈리아 여행에서 차갑게 즐긴 그 와인은 특히 좋았다. 베로나 마을의 ‘트라토리아 알 폼피에레(Trattoria al Pompiere)’에 갔을 때였다. 전직 소방관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티라미수 맛집으로 유명해 방문했다. 현지 강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서 맛있는 토마토 파스타와 곁들여서일까. 엄마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서일까. 이유야 뭐가 됐든 더없이 소중한 기억임은 분명하다. 와인을 마실 때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난다.

03 바디아 아 파시냐노 키안티 클라시코 그란 셀레치오네 2016

우수진(아영FBC 와인 파트 브랜드 마케팅 팀장) 

몇 해 전, 봄을 맞아 이탈리아 남부로 여행을 떠났다. 4월의 이탈리아는 듣던 대로 습도가 낮고 선선했다. 일정 중 풀리아 지역에 머물던 날 특별한 저녁을 먹으러 ‘그로타 팔라체세(Grotta Palazzese)’로 향했다. 바닷가 절벽에 자리한 자연 동굴 속 레스토랑으로 유명한 곳이다. 도착하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눈앞 장면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근사해서 무얼 먹고 마셔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마신 와인은 경치만큼이나 우아했다. 풀보디 레드와인임에도 해산물 요리와 조화가 훌륭했다. 짙은 체리와 삼나무, 약간의 스파이스 향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풍부하고 깊은 구조감도 인상적이었다. 동굴 속 테이블에 앉아 저녁노을, 파도 소리와 함께 즐긴 식사 시간은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때의 봄을 음미하고 싶을 때 바디아 아 파시냐노 키안티 클라시코 2016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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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솔레이유 루즈 쿠사카벤네 2023

함정현(일본 와인 전문 바 ‘비노야 코스모스’ 셰프)  

최근 솔레이유의 쿠사카벤네 와인을 접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처럼 첫입에 흙 향과 생포도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와인이다. 베리 계열 풍미와 솜사탕처럼 달콤한 향도 입안에 퍼진다. 날이 풀리니 더 손이 갔다. 취향에 맞아 바를 찾는 손님들에게도 종종 권했다. 국내는 일본 와인 시장이 작은 만큼 수입 와인도 적은 편이다. 해당 와이너리의 발주 수량이 갑자기 증가하자 수입사에서 연락이 왔다. 와인메이커들이 한국의 어디서 이렇게 자기네 와인을 소비하는지 궁금해한다고. 와이너리의 초대를 받고 한달음에 야마나시 현지를 찾았다.

솔레이유 와이너리는 부부 메이커와 직원 한 명이 소규모로 운영한다. 그래서 연간 생산량도 1500여 병으로 한정적이다. 시음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와인은 쿠사카벤네 2023. 머스캣 베일리 A라는 일본 독자 품종으로 만든 레드와인이다. 프랑스 보졸레 누보 와인처럼 짧은 숙성 기간을 거쳐 만든다. 일본 레드와인의 특징인 라이트한 보디감과 와이너리 특유의 개성이 담겨 있다. 포도나무와 두더지가 그려진 라벨 이야기도 재미있다.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포도를 수확하면서 자주 만나는 두더지를 라벨에 담았다고 한다. 자연친화적인 환경, 그곳에서 생산된 와인을 마시던 시간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05 쿠스노키 와이너리 피노 누아 2019

김선우(디저트 페어링 와인 바 ‘이로’ 소믈리에) 

근 몇 년간 일본 와인 퀄리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전반적으로 균형감 좋은 와인이 늘었고, 특유의 짭짤함과 감칠맛이 매력적이었다. 테루아에서 비롯된 것인지, 양조 기술이 좋아진 것인지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본으로 향했다. 그게 재작년 봄이다. 디저트 셰프이자 함께 바를 운영하는 아내와 유명한 일본 와인 전문 바를 돌아다녔다. 그중 ‘시로코(Sirocco)’ 바에 갔을 때 이 와인을 만났다. 블라인드 시음처럼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먹었는데, 충격적이었다. 스모키한 향과 향신료, 과일 향이 독특하지만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마치 봄꽃처럼 느껴지는 옅은 루비색이 봄기운도 불어넣었다. 곁들인 음식도 요리라고 하기 모호한 간단한 안주였다. 나가노현의 점보 표고버섯 치즈 구이에 시소를 올렸지만 궁합이 꽤 괜찮았다. 알고 보니 고품질 포도 생산지로 유명한 히타키하라 충적선상지에 와이너리가 있었다. 아쉽게도 그때 찾은 바는 현재 지인에게 넘겨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날을 계기로 아내와 일본 와인 수입사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현재 우리의 첫 입항 와인들이 통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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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피오 체사레 바롤로 1967

나기정(1400여 종 와인, 80여 개 테이스팅 탭이 있는 ‘탭샵바’ 대표) 

봄의 피에몬테는 특별한 분위기를 지닌 곳이다. 2011년 4월, 당시 재직하던 아영FBC MD로 피오 체사레 와인을 수입하기 위해 방문했다. 고요한 포도밭 언덕 위, 안개는 낮게 깔리고 공기는 서늘하지만 상쾌했다. 10년도 더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라 레이 나투라 바이 미켈란젤로 맘몰리티(La Rei Natura by Michelangelo Mammoliti)’에서 피오 체사레의 오너 피오 보파 부부를 만났다. 레스토랑의 따뜻한 응대 덕인지 까칠한 이미지의 부부와 함께하는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피오 보파 부부는 나를 위해 피에몬테 전통 요리를 주문해주었다. 안초비와 우유를 함께 끓인 소스에 신선한 채소를 찍어 먹는 음식이었다. 소박해 보였지만 지금도 ‘피에몬테’ 하면 떠오르는 메뉴다. 그때 피오 체사레의 1967 올빈 바롤로를 마셨다. 깊고도 단단한 구조감, 섬세한 산도, 보틀 숙성에서 나오는 뉘앙스가 기분을 좋게 했다. 10년도 더 지났지만 봄기운이 몰려오는 이맘때면 피에몬테의 공기, 피오 보파와 함께한 식사와 와인이 종종 생각난다.

07 피에르 이브 콜랭 모레 샤사뉴 몽라셰 프리미에 크뤼 모르조 레 페아랑드 2022

김민준(‘정식당’ 헤드 소믈리에, ‘2025 미쉐린 소믈리에 어워드’ 수상자 ) 

얼마 전 연인과 함께 와인을 마신 날이 떠오른다. 부산 여행 중 넓은 와인 숍과 와인 바가 있는 끌리마에 갔다. 끌리마는 소매가로 와인을 구입해 코키지를 지불하고 마실 수 있어 좋아한다. 수많은 와인 중에 뭘 마실까 고민하다가 ‘봄에는 역시 이 와인이지’ 하면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와이너리 이름을 줄여 ‘PYCM 와인’이라고 부르는 부르고뉴 샤르도네는 와인 애호가들이 최고로 꼽는 샤르도네 중 하나다. 생산자가 부르고뉴 지역의 독특한 테루아를 잘 표현하기 때문. 잘 익은 과일과 꽃의 풍부한 향, 은은한 허브 노트, PYCM 와인만이 지닌 매력적인 오크 향과 미네랄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섬세한 맛은 마치 계절을 음미하는 듯 봄의 정취를 배가한다. 끌리마 테라스에 앉았을 때 따스한 햇살, 시원한 바닷바람, 기분 좋은 와인의 산도까지 세 박자가 맞아떨어졌다. 봄에 사랑하는 사람과 꼭 마셔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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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김지수

202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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