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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K-팝은 발라드다

K-팝 가수들이 코첼라 무대에 오르고 그래미에서 상을 탄다. ‘두 유 노 BTS?’는 ‘아임 프롬 코리아’를 대신하는 인사말이 됐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생각한다. 가장 ‘K스러운’ ‘팝’은 발라드라고. 한국인의 얼과 혼이 담긴 그 장르. 발라드에 기대어 위안을 얻던 시절로 돌아가 그 매력과 진가를 살폈다.

UpdatedOn May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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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서 발라드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쩐지 망설여진다. 소개팅 자리에서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질문받았을 때 “저는 제육볶음 좋아합니다” 답하는 기분이랄까. 발라드와 제육볶음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두 가지 모두 누구나 좋아할 법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비롯된다. 음악 이야기를 할 때 발라드부터 꺼내면 이렇다 할 안목 없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처럼 보인다. 같은 이유로 나는 발라드가 과소평가받는다고 생각한다. 저마다 즐겨 듣는 플레이리스트는 다르겠지만, 우리가 마음 터놓고 고함지르고 싶은 심정일 때 찾은 건 늘 발라드 아니었나. 발매된 지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노래방 인기 차트 상단을 차지하고 있는 발라드 곡들이 이를 증명한다.

2004년은 슬픈 남자들의 해였다. 그해 1월, TV 광고에서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던 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노래를 들은 건 음악 프로그램이 아닌 뮤직비디오에서였다. 어느 부둣가에서의 추격전으로 시작한 뮤직비디오에는 설경구, 김윤진, 강혜정이 출연했는데, 웬만한 누아르 영화 부럽지 않은 규모였다. SG워너비의 첫 데뷔 앨범 타이틀곡, ‘Timeless’였다. 그 가사는 이렇게 끝났다. ‘날 아프게 했지만 울게 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고마워. 눈감는 그날 내가 가져갈 추억 만들어줘서.’ 당시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눈감는 날은커녕 ‘Timeless’가 어떤 의미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SG워너비가 처음 세상에 내놓은 4분짜리 노래는 그해 내내 나의 작은 MP3에서 흘러나왔다.

그 시절 대한민국 사람은 모두 죽을 만큼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독한 가사와 눈물겨운 멜로디의 발라드 곡들이 매달 새롭게 쏟아졌고, 음원 차트에서도 늘 상위를 지켰다. 그 절절함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함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TV에 소몰이꾼들이 등장했다. 2000년대 초반은 ‘소몰이 창법’의 전성시대였다. 소몰이 창법은 두성보다는 흉성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으로, 다른 창법보다 ‘우는 것처럼’ 들린다. 일부 가수들은 ‘다짜고짜 울어버리면 어떡하냐’ ‘대단히 대중적인 마취 작용’이라며 일침을 날렸지만, SG워너비 김진호를 필두로 소몰이꾼의 황금기가 열렸다.

다시 겨울이 돌아올 무렵, 또 한 명의 소몰이꾼이 나타났다. 2004년 11월.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장식했던 박효신의 ‘눈의 꽃’이다. 박효신은 ‘죽을 만큼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다 진짜 죽어버린 남자’를 위해 노래했다. 한국 드라마의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발라드가 나왔다. ‘눈의 꽃’ 이전에는 <올인>의 ‘처음 그날처럼’, <천국의 계단>의 ‘보고 싶다’, <파리의 연인>의 ‘너의 곁으로’가 있었듯이.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미사폐인’ 신드롬을 낳으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눈의 꽃’은 싸이월드 BGM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다운로드 70만 회를 기록한 곡이 되었다.

당시는 싸이월드 BGM으로 저마다의 감성과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용납되던 시기였다. 지금은 전 세계 각지에서 쏟아진 최신 곡을 배경으로, 근사한 일상을 쇼츠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멋이고 자랑인 시대다. 저마다의 개성과 표현이 존중받는 시대라지만, 어쩐지 내 진짜 속마음은 감춰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사실 오늘 힘든 일이 있었다고, 그 마음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한다고. 그 지질한 마음을 노래 한 곡에 담아 드러내고, 기꺼이 새로 바뀐 노래에 응답하며 댓글을 달았던 그때. 발라드는 저마다의 심경을 대신 헤아리는 분신과도 같았다.  


“차마 남들에게 터놓지 못할 감정과 고민을 어루만지는 게 음악의 몫이라면,
발라드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제 역할을 해왔다.”


2005년에는 밴드 버즈의 정규 2집 <Buzz Effect>가 나왔다. 타이틀곡은 ‘겁쟁이’. 지금 생각해보면 이 노래가 왜 그렇게까지 인기를 끌었는지 의문이다. 다름 아닌 가사 때문이다. ‘겁쟁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미안합니다. 고작 나란 사람이, 당신을 미친 듯 사랑합니다. 기다립니다. 잘난 것 하나 없는데, 염치없이 당신을 원합니다.’ 이 노래가 2025년에 나왔다면 ‘겁쟁이’가 아닌 ‘하남자’를 제목으로 써야 했을 거다. 하지만 순정남들의 심정을 대변했던 걸까. 앨범 제목처럼 버즈가 일으킨 효과는 대단했다. 2005년은 유독 발라드 히트곡이 많이 발표됐다. SG워너비의 ‘죄와 벌’, 윤도현의 ‘사랑했나봐’, 엠투엠의 ‘세 글자’, 김종국의 ‘제자리 걸음’이 모두 2005년에 나왔다. 버즈는 치열한 발라드 대국 속에서도 국내 가수 전체 음반 판매 3위를 기록했다. 버즈는 록 발라드를 새롭게 정의한 밴드였다. 그전에도 음악적으로 성공한 밴드는 있었지만, 버즈처럼 잘생기고 감미로운 밴드는 없었다. 윤도현 밴드에서는 윤도현만 돋보였지만, 버즈는 각 멤버가 팬덤이 있었다. 나는 오늘의 데이식스가 있기까지 버즈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교복을 입고 코인 노래방에 가던 무렵. 2000년대 후반 사춘기 남학생들의 마음을 울린 건 먼데이키즈였다. TV로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무대만 봤지만, 밤늦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먼데이키즈를 들었다. SG워너비가 ‘사랑 노래’를 불렀다면, 먼데이키즈는 ‘남자의 사랑 노래’를 불렀다. 제목부터 남달랐다. ‘이런 남자’ ‘착한남자’ ‘남자야’. 유독 남자가 들어가는 제목이 많았던 먼데이키즈 노래는 10대의 우리에게 ‘남자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뮤직비디오도 그랬다. 하석진, 정우가 주연을 맡은 <착한남자 + 남자야> 뮤직비디오는 진짜 남자들의 이야기였다. 두 남학생이 한 여학생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다, 종국에는 불량배들과 패싸움을 벌이고 서로 등을 맞댄 채 이마의 피를 훔치며 끝난다. 그 시절 남자들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진짜 목숨을 걸었다.

윤종신은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가수는 아니었지만, 음악을 가장 잘하는 뮤지션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간 2010년대 초반은 <슈퍼스타K> <온스테이지>에 힘입어 인디 뮤지션들이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발라드 가수 노래를 듣기보다 10cm, 옥상달빛, 제이레빗,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를 듣는 것이 멋으로 통했다. 하지만 유행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옛날 노래를 찾아 들었다. 그때 윤종신의 9집 앨범 <그늘>을 처음 접했다. 발매된 지 10년이 지난 앨범이었지만, 가사와 멜로디가 지닌 매력은 여전히 유효했다. 윤종신은 전작 <헤어진 사람들을 위한 >에서 이별 뒤에 허덕이는 이들을 위로하려 했다면, <그늘>에서는 이별에서 자유로워진 청춘의 일상을 그렸다. 그중 최고는 ‘수목원에서’. 떠나간 연인을 향해 고함치는 노래가 아닌, ‘푸른 날만 있도록 빌어줄게’ 응원하는 곡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떠나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구나. 이 노래를 들으면서 배웠다. 윤종신은 내게 가수가 아닌 선생님이었고, 20대 내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지켰다. 참고로 한 인터뷰에서 윤종신은 ‘수목원에서’를 자신이 쓴 최고의 곡 중 하나로 꼽았다.

성시경은 발라드를 가장 발라드답게 부르는 가수였다. 군대에서 두 번째 겨울을 보내던 2014년 2월. ‘이윽고’ 외마디로 시작하는 그 노래가 나왔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수록된 ‘너의 모든 순간’이다. 성시경은 드라마 종영 후에도 이 노래를 곳곳에서 불렀다. 그중 최고의 ‘이윽고’는 2017년 <듀엣가요제>에서 나왔다. 한 댓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런 반주 없이 퍼지는 ‘이윽고’는 마치 투명한 물병에 물감 한 방울이 퍼지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성시경은 구독자 209만의 먹방 유튜버가 됐지만, 그가 유튜브 시리즈 ‘성시경 노래’에서 부른 노래들은 대한민국 발라드의 보고다. AI로 목소리를 복제해내는 세상이 왔지만, 성시경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기계로 흉내낼 수 없는 감동이 있다.

지금은 ‘다시 듣는 시대’다. 발라드 전성시대는 지났지만, 클래식 명반을 젊은 세대가 다시금 불러 히트곡으로 만든다. <불후의 명곡> <싱어게인> <더 리슨: 우리 함께 다시> 등의 음악 프로그램에서 호출한 옛 노래들은 현재 유튜브에서 수백만 조회수를 올리고 있다. 오래된 곡들이 새롭게 주목받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간 잊혔던 사연이 함께 떠오르는 일도 있다. 최근 전 세계 시청자를 울려버린 <폭싹 속았수다> OST, ‘내 사랑 내 곁에’가 대표적이다. 홍이삭이 부른 ‘내 사랑 내 곁에’의 가사는 사실 잘못된 가사다. 사연은 이렇다. 처음 이 노래를 작곡, 작사한 오태호는 본래 ‘시간은 멀어 집으로’가 아닌 ‘멀어짐으로’라고 썼다고 한다. 당시 죽음을 앞둔 김현식을 생각하면 훨씬 무겁게 느껴지는 가사다. 이걸 김현식이 실수로 ‘멀어 집으로’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김현식의 목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에 앨범 수록곡 대부분을 첫 녹음 버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가 수십 년간 사랑한 노랫말이 사실은 실수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어째서인지 그 노래를 더욱 녹진하게 만든다.
이따금 생각한다. 우리한테 필요한 건 ‘쿨함’이 아닌 ‘솔직함’ 아닐까. 요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그 누구도 속앓는 이야기는 쉽게 하지 못한다.

옛 발라드를 들으면 ‘왜 이렇게 사랑 타령일까’ 싶지만, 태생적으로 발라드는 편지이자 일기이며 고백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가장 ‘한국적인 팝’이 발라드라고 생각한다. 차마 남들에게 터놓지 못할 감정과 고민을 어루만지는 게 음악의 몫이라면, 발라드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제 역할을 해왔다. 그렇기에 어디선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기꺼이 답할 수 있다. 발라드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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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주현욱

202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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