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둘이서 앨범을 만드는 건,
상대방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작업이었어요.”
지금 하는 인터뷰가 공개될 때쯤이면 <MINISERIES 2>가 나왔을 텐데요. 후속작을 3년 만에 공개하기까지 사연이 궁금합니다.
슬롬 ‣ 사실 <MINISERIES>를 공개할 때 이미 연작을 내도 될 만큼 데모곡은 완성된 상태였어요. 그러다 어느 날 밤에 혼자 <MINISERIES>를 듣는데 새삼 ‘잘 만들었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수민 누나한테 전화를 걸었죠. 그 후로 앨범 작업이 물 흐르듯 시작됐어요.
처음부터 연작 시리즈로 계획한 건 아니네요.
수민 ‣ 가능성만 열어둔 채 잊고 지냈던 거죠. 정말 전화 한 통으로 다시 시작된 거예요. 이번 앨범에는 전작에 수록되지 못한 곡도 있고, 아예 새롭게 만든 곡들도 있어요. <MINISERIES>를 들어보신 분들이라면 그 미묘한 차이를 들여다보시는 재미도 있을 거예요.
저는 수민 님 가사를 읽을 때마다 늘 녹취록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한테 전화로 들은 이야기처럼요. 그래서 드리는 질문인데 가사 속 내용은 진짜인가요?
수민 ‣ 전부 진짜예요.(웃음) 저는 제가 겪은 이야기를 가사로 써요. 가사에서 묘사한 상황은 다 제 경험이에요. 물론 표현을 위해서 조금 과장된 부분도 있죠. 그 과함을 덜어내려고 구어체를 쓰는 것도 있어요.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은 좋은 음악 재료가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MINISERIES>가 특히 그런 앨범이고요. 나이를 먹고, 감정을 잘 다룰 수 있게 되면 음악 만드는 게 더 편해지기도 하나요?
슬롬 ‣ 저는 한결 수월해졌어요. 제가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 중 하나가 ‘긴장감’이었거든요. 요즘은 긴장도 덜하고, 긴장감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어요. 그러니까 감정을 음악으로 풀어낼 때도 한결 편해지더라고요. 분명히 느껴지지만 이게 뭔지 모르는 감정도 있잖아요. 그걸 음악에 담을 때의 긴장도 있는데, 이제는 음악을 만들면서 ‘이 감정이 사실은 외로움이었구나 혹은 그냥 심심한 거였구나’ 알아가면서 흥미도 느꼈고요. 그만큼 음악도 더 재미있어졌어요.
그런 점에서 <MINISERIES>와 <MINISERIES 2>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뭔가요?
수민 ‣ 앨범을 만들 때의 기대감은 비슷했어요. 차이점은 3년 동안 각자 뮤지션으로, 한 개인으로서 보낸 시간이 있다 보니 여유가 더 생겼죠. 그만큼 더 좋은 소리, 더 편한 감정에 대해서 초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거든요. 조심성도 생겼고요. 많은 분들이 <MINISERIES>에서 저희의 의도를 잘 파악해주셨어요. ‘건강한 겁’이 생겼달까요?
슬롬 ‣ 저는 이번 앨범에서 프로듀서 역할을 좀 더 확고히 했어요. <MINISERIES> 때는 프로듀서 혹은 편곡자로서 역량을 뽐내고 싶었다면, <MINISERIES 2>에서는 ‘수민이 어떻게 하면 좀 더 예뻐 보일까’ 고민했죠. 결국 이 앨범의 주인공은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수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음악 밖에서 슬롬과 수민의 개인 일상에도 달라진 점이 있을 것 같아요.
수민 ‣ 일단 나이를 세 살이나 더 먹었고요.(웃음) 그동안 그 나이에만 겪을 수 있고, 겪어야 하는 것들을 경험했어요. 그만큼 음악 안팎으로 좀 더 어른이 됐다고 믿고 싶어요. 예전에는 음악을 그저 빨리 내는 게 중요했다면, 이제는 좋은 소리에 좀 더 집중하고 있어요.
슬롬 ‣ 저는 지난 3년 동안 이번 앨범을 만들 때 가장 많이 변했어요. 오롯이 둘이서 앨범을 만드는 건, 상대방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작업이었어요. 저는 자기 검열이 굉장히 심한 사람이었어요. 이런 조심성이 때로 일에 방해가 되고, 감정 낭비가 심했거든요. 수민은 저랑 정반대의 사람이에요. 덕분에 좋은 의미에서 차가워졌달까요? 내 역할이 뭔지, 나와 동료가 지치지 않고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또 무엇을 해야 될지 고민하게 된 시간이었어요.
작곡, 작사는 보통 어떤 순서로 진행됐나요?
슬롬 ‣ 반반이에요. 타이틀곡 중 하나인 ‘진짜 안녕’은 가사와 주제를 상의하는 동시에 곡을 썼어요. 사실 작업 순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보다 ‘수민이 어떻게 하면 돋보일 수 있을까?’가 중요했죠. ‘수민이 이 시대에 디바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거든요. 1980년대 여성 솔로 가수들. 굉장히 가창력이 좋고, 목소리만으로 아이콘이 된 아티스트들이 있잖아요. 가수로서 수민의 내실이 돋보이는 앨범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노래를 듣게 될 사람보다, 부를 사람을 먼저 상상하면서 작업한 거네요. 그런 점에서 싱어송라이터가 자화상을 그린다면, <MINISERIES>에서는 서로 초상화를 그려준 느낌이네요.
슬롬 ‣ 맞아요. ‘보통의 이별’이 특히 그랬는데요. 곡을 준비하면서 프랑스의 전설적인 샹송 가수 ‘프랑수아즈 아르디’, 브라질 록의 아이콘 ‘리타 리’를 많이 참고했어요. 옷을 사기 전에 거울 앞에서 옷을 대보듯, 선배 가수들이 가진 색이 수민한테도 잘 어울릴지 고민했죠. 분명 클래식하지만, 요즘의 느낌이 날 수 있도록 고민했어요.
저도 <MINISERIES 2>를 들으면서 ‘이 앨범 장르는 뭐지?’ 생각했거든요. 만든 입장에서 ‘이 앨범은 이렇게 느꼈으면 좋겠다’ 하는 점이 있나요?
슬롬 ‣ 세상에는 좋은 음악들이 많잖아요. 그 음악들을 회고해볼 수 있는 앨범이 되길 바랐어요. <MINISERIES 2>를 만들면서 1980~90년대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요. 그때는 지금처럼 음악이 쏟아지던 시대가 아니었거든요. 앨범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도 훨씬 길었고요. 그만큼 청각적인 영역에서 많이 신경 썼다고 생각해요. 요즘 음악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랐어요. 힙합을 처음 듣다 보면 샘플링 원곡이 궁금해지잖아요. 저희 앨범을 통해서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는 즐거움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두 분이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하니까 이번 앨범도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일을 잘하는 것만큼,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가 되는 것도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두 분에게 ‘좋은 동료’는 어떤 동료인가요?
수민 ‣ 저는 두 가지인데요. 제가 일하고 싶은 좋은 동료는 저랑 성향이 다른 동료. 작업을 하다 보면 서로 다툴 일도 생기잖아요. 서로 쓰는 언어가 달라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다르니까 배우는 것도 반드시 있더라고요. 그만큼 제 일상도 음악도 다채로워질 수 있고요. 저는 공감해주는 동료가 되고 싶어요. 흔히 말하는 MBTI로 저는 대문자 ‘T’거든요. 상대방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때로는 콤플렉스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요즘은 잘 말하기보다 잘 듣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슬롬에게 좋은 동료는?
슬롬 ‣ 저는 대문자 ‘F’인데요. 수민이랑 둘이서 작업하다 보니 저 역시 공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저는 반대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더라도, 불쑥 얼굴을 들이밀면서 공감하면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을 잘 지키면서 어루만져주는 동료가 좋은 동료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로 제안드리는 건데요. 쑥스럽겠지만 서로 칭찬 한번 해볼까요? <엽기적인 그녀> 스타일로.
슬롬 ‣ 우리 수민이는요. 어려서부터 노래를 참 잘합니다. 자신의 예쁜 모습을 굉장히 잘 알고 있고, 그 부분에 대해 얘기해주는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도 놓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누구와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배려심과 실력도 갖췄고요. 단순히 작업을 넘어서, 함께 일하는 동료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음악인이라고 생각해요.
수민 ‣ 우리 민우는요. 음악 안에서 우둔하게 잘 싸우는 사람이에요. 프로듀서의 삶이 가끔 고단할 수 있거든요. 그럴 때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우직함이 있어요. 또 하나는 남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 프로듀서는 상대방의 장점을 잘 알아야 좋은 곡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슬롬은 제가 아는 뮤지션 중에서 가장 잘 듣고 담아주는 사람이거든요.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진 도자기 그릇 같은 동료예요.
생뚱맞은 질문인데 프로듀서도 노래방에서 본인 노래 부르나요?
슬롬 ‣ 등 떠밀려서 ‘회전목마’ 부르고 65점 나온 적 있어요.
등은 누가 떠밀었어요?
슬롬 ‣ 동네 친구들. 음악 안 하는 친구들인데요. 노래방 갔는데 ‘너 히트곡 있잖아. 그거 불러봐라’ 해서 불렀어요. 그래도 호응을 잘해줘서 끝까지 불렀습니다.
수민 님은 먼저 나서서 부르기도 해요?
수민 ‣ 아니요. 평소에 라이브를 많이 하니까 노래방 가서는 제 노래 안 불러요. 그래도 등 떠밀면 부릅니다. 100점은 안 나오더라고요.
본인 노래로도 노래방 100점은 어렵군요. 무대에서는 어떻게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나요?
수민 ‣ 저는 늘 최소한의 동선을 선택해요. 무대에서 몰입을 많이 하는 편인데, 무대를 넓게 쓰면 집중력이 흐트러지더라고요. 호흡이 가빠지기도 하고요.
“수많은 기억 중에서도 반짝이고 다채로운 것이 추억으로 간직되잖아요.
음악을 만들려면 좋은 추억이 필요해요.”
이번 앨범으로 수민, 슬롬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은 곡을 하나만 꼽자면요?
슬롬 ‣ 저는 ‘개인사’ 고르겠습니다. <MINISERIES> <MINISERIES 2>의 색깔이 모두 녹아 있는 곡이에요. <MINISERIES> 발매되기 전에 구상했지만, <MINISERIES 2> 수록곡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완성했어요. 엉성하게 만든 소리를 지금의 제 귀로 만족감을 느낄 때까지 노력을 많이 했어요. 동시에 <MINISERIES> 때의 색깔이 옅어지지 않게 신경 썼고요. 그런 점에서 <MINISERIES> <MINISERIES 2>를 동시에 듣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곡이 아닐까 싶어요.
수민 ‣ 저는 ‘째깍째깍’. 롤러코스터 선배님들 좋아하거든요. 특유의 무디하고, 어딘가 섹시하면서, 도회적인 분위기를 정말 좋아해요. 그 느낌이 가장 많이 실린 곡이 ‘째깍째깍’. <MINISERIES 2>에 수록된 신곡 중에서 가장 처음 만든 노래이기도 해요. 모든 곡을 즐겁게 작업했지만, 제게는 특별한 곡이에요.
두 분 다 음악 잘하시잖아요. 좋은 음악은 어떤 음악이라고 생각하세요?
수민 ‣ 기억인 것 같아요. 저는 늘 제가 가진 추억으로 음악을 만들어요. 수많은 기억 중에서도 반짝이고 다채로운 것이 추억으로 간직되잖아요. 음악을 만들려면 좋은 추억이 필요해요. 청자로서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솔깃한 내용의 가사를 들으면 ‘이 사람 이야기인가?’ 하고 꼭 크레디트를 보거든요. 만일 그 가수가 쓴 가사면 그때부터 그 사람이 너무 궁금해져요.
슬롬 ‣ 뜬금없는 이야기인데 제가 정말 맛있는 김치말이국숫집을 찾았거든요. 최근에 계절 메뉴로 김치말이국수를 개시했는데 일단 물김치의 농도가 완벽해요. 국물 위에 떠 있는 참기름 향도 향긋하고, 쫄깃한 소면 아래 깔린 고슬밥은 꼭 작은 수제비를 떠먹는 것 같았어요. 너무 신나서 같이 작업하던 엔지니어랑 수민 데리고 저녁 먹으러 또 갔어요. 다들 맛있게 먹으면서 메뉴판을 막 구경했거든요. 그걸 보면서 생각했죠. ‘앨범을 이렇게 만들어야 되는데.’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한 가지 메뉴 먹고, 그 식당의 모든 음식이 궁금해질 때가 있잖아요. 좋은 음악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뮤지션으로 계속 일하려면 저만의 김치말이국수 레시피를 만들어야죠.
그 음악은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요?
슬롬 ‣ 사연과 애정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수민 ‣ 저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제 기억을 백업시켜요. 책장에 책 꽂는 것처럼요. 그러다 곡을 만들 때가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 걸어서 그때 그 일들을 같이 이야기해요. 제가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고, 친구들이 기억하는 제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 차이를 파고들다 보면 이야기가 다채로워져요. 그렇게 만들다 보면 재미있는 음악이 나오지 않을까요?
제가 준비한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끝나고 뭐 드세요?
수민 ‣ 김치말이국수 먹고 싶네요.
슬롬 ‣ 이 시간이면 거기 문 닫았어요. 제가 ‘완전 배달 식품’이라고 부르는 음식들이 있거든요. 음식물 쓰레기 안 나오고, 재활용품만 정리하면 되는. 작업실 가서 최근에 수민이랑 시켜 먹은 샐러드나 마제소바 먹지 않을까 싶어요.
수민 ‣ 맛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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