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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의 다이버 워치

블랑팡×스와치의 피프티 패덤즈 플라스틱 손목시계에 스위스 시계의 지난 70년이 들어 있다.

UpdatedOn December 0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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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70년 전인 1953년부터 시작된다. 시계 방수는 당시의 기술적 장벽이었다. 스위스의 소형 손목시계 회사 블랑팡이 현대적인 개념의 다이버 시계를 만들었다. 케이스는 더 튼튼해지기 위해 덩치를 키웠다. 잠수 시작 시간을 잘 확인할 수 있도록, 인덱스 역할을 하는 베젤은 한 방향으로만 돌았다. 양방향으로 돌면 설정해둔 시간이 틀어지기 때문이었다. 방수 성능은 당시로선 상당히 높던 약 90m, 프랑스에서 쓰던 단위로 환산하면 50패덤이다. 그렇게 블랑팡의 피프티 패덤즈가 태어났다.

1953년부터 30년이 지난 1983년 블랑팡의 운명을 흔들 일이 일어났다. 1970년대 스위스 시계 업계 전체를 궤멸시킬 뻔한 쿼츠. 혁명의 여파로 블랑팡은 1975년 문을 닫았다. 1983년 어느 야심만만한 비즈니스맨이 고가 시계 재유행을 예상하며 블랑팡을 인수했다. 그가 천재적 시계 마케터 장 클로드 비버다. 시계 업계의 다른 한편에서는 쿼츠 혁명에 대응하는 고강도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스위스 시계 제조업체는 복잡한 구조조정 끝에 1983년 대형 합병회사 ASUAG-SSIH를 설립했다. 이 회사의 첫 CEO가 니콜라스 G. 하이엑이다. 하이엑은 회사를 합병하고 현금 확보를 위해 저렴한 플라스틱 손목시계 회사를 만들었다. 그게 스와치다.

스와치와 블랑팡이 동시에 새 전기를 맞은 1983년 즈음 스위스 시계 업계가 재편성됐다. 키워드는 마케팅과 귀금속. 전통 강호에 더해 블랑팡, IWC, 예거 르쿨트르 등 1990년대에 인기를 끄는 고급 기계식 시계 브랜드가 세를 불렸다. 그동안 스와치는 전 세계로 판매되며 ASUAG-SSIH의 현금 흐름을 확보했다. 이 회사는 1985년 이름을 ‘스와치 그룹’으로 바꿨다. 이미 저가 시계부터 고가 시계까지 이르는 수직 통합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쌓던 중이었는데 굳이 ‘스와치’ 그룹이라 회사 이름을 정한 건 의미심장하다.

1983년에서 30년이 지난 2013년 한 번 더 혁명이 일어났다. 스와치 최초 기계식 무브먼트 ‘시스템 51’ 출시다. 이 무브먼트가 혁명인 이유는 개념이다. 그전까지 스위스는 시계의 기술적 우위를 잃은 자리를 신화로 메우며 버텼다. 그 신화의 이름은 ‘기계식 시계의 영속성’이다. 기계식 시계는 기계니까 잘 손질해주면 대를 이어서도 쓴다는 이야기였다. 시스템 51은 아니었다. 스프링이 풀리는 힘을 이용한 기계식 무브먼트의 구조만 같을 뿐 나사 대신 리벳을 박아 분해와 재조립이 불가능하다. 스위스 최대의 손목시계 제조사가 일회용 무브먼트를 낸 것이다.

그 10년 동안 시계 세계는 점점 빨라지기만 했다. 2016년 애플 워치가 출시되며 손목에 감는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일대 혁명이 시작됐다. 코비드-19가 전 세계를 덮쳤다. 그 타이밍에 시계 박람회 바젤월드가 1백 년 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올해가 2023년, ‘위드 코로나’ 원년이다. 시스템 51 무브먼트 발매 10주년. 스와치 탄생 40주년이자 장 클로드 비버의 블랑팡 인수 40주년, 그리고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 출시 70주년. 이 모든 요소가 우주의 기운처럼 시계 하나에 모였다. 블랑팡×스와치의 피프티 패덤즈다.

앞서 적은 모든 요소가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의 유전자다.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 디자인은 일종의 지적재산권 개념으로 스와치의 시계에 접붙었다. 스와치 그룹은 1991년 블랑팡을 인수했으니 이건 그룹 계열사 간 협업이다. 쿼츠 혁명을 거치며 스위스 시계는 마케팅을 접목한 귀금속으로 거듭났고, 스와치는 스위스 특유의 프리미엄 이미지를 플라스틱 시계에 접목하며 스위스 시계업계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이 모든 요소가 모여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가 탄생했다. 유서 깊은 디자인, 플라스틱 케이스, 일회용 기계식 무브먼트.

블랑팡×스와치 피프티 패덤즈의 거품이 빠진 11월, 나는 한국의 중고나라에서 정가보다 30%쯤 싸게 파는 신품급 블랑팡×스와치 피프티 패덤즈를 구했다. 만져보니 기분이 묘했다. 스위스 시계가 고군분투해온 지난 70년이 들어 있었다. 원고용으로 구경만 하고 재판매하려 했는데 실물을 만져보니 생각 외로 좋아서 시대의 유물처럼 보관할까 싶어졌다. 쿼츠 시대든 뭐든, 플라스틱이든 금속이든, ‘실물을 만져보니 생각보다 괜찮더라’가 스위스 시계의 영원한 경쟁력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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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박찬용

202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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