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LIFE MORE+

어느 노작가의 유작

소설가이자 번역가 안정효의 마지막 출간물이 하필 그레이엄 그린 작품이라니.

UpdatedOn August 03, 2023

/upload/arena/article/202308/thumb/54188-519084-sample.jpg

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민음사

요즘 세상에 안정효와 그레이엄 그린을 둘 다 아는 사람은 꽤 적을 듯하다. 안정효는 마지막 작품의 해설에서 1954년을 회상하며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출판업이 열악하여 무슨 책이건 5백 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며 화제작이 되고는 했다’고 적었는데, 지금 한국의 독자 중 안정효와 그레이엄 그린을 둘 다 아는 사람이 5백 명이 될까 모르겠다. 다만 유명도와 중요도는 비례하지 않으니 둘 다 지면에 실릴 가치만은 충분하다.

그레이엄 그린은 20세기 영국 대표 소설가 중 하나다. 1904년에 태어나 199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권 가까운 소설을 썼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의 소설 대부분이 영화화됐으며 그중에서는 <제 3의 사나이> 같은 고전 명작 영화도 있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원작 소설 작가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시작한 존 르 카레에게 큰 영향을 준 작가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현대 영미 문학 소설가 중 미국 백인 소설가가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그린의 작품이 덜 알려진 경향이 있다.

<조용한 미국인>은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 중에서도 명작이다. 배경은 1952년부터 1955년까지의 베트남. 주인공은 영국인 특파원 파울러와 현지 여성 후엉, 소설의 제목이 되기도 한 미국인 파일이다. 소설은 세 사람 각자의 사정과 진심과 가식 사이로 시대와 정치와 음모가 루미큐브처럼 얽혀 있다. 이 책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레이엄 그린은 이 책을 쓰고 미국 입국을 거부당했고 훗날 일어난 베트남전쟁을 예견했다는 평도 받았다.

그린의 책을 처음 읽으면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챕터에 따라 현재와 회상이 뒤섞인다. 등장인물의 대사는 실질적인 듯 상징적이며, 사실과 진실은 어둠 속의 인기척처럼 보일 듯 말 듯하다가 마지막쯤 그 면모를 드러내지만, 그건 풍선 터지는 듯한 충격파가 아니다. 번역가 안정효는 이를 두고 ‘줄거리는 구조일 따름이고, 그 구조 속에서 작가가 탐구하는 주제의 깊이는 피상적으로 흐르는 이야기 밑에서 묵묵히 저류의 힘을 발휘한다’고 표현했다.

구조 속에서 작가가 탐구하는 주제의 깊이는 인간의 미묘한 다면성이다. 삶은 ‘지대넓얕’과 ‘알쓸신잡’ 식으로 요약될 수 없고, 누구에게나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의 마음이 있다. 그린은 <조용한 미국인>에서 바로 그 회색 마음을 집요하게 그린다. 미국인과 베트남인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정체성과 베트남의 상황, 이를 바라보고 묘사하는 영국인이 보여주는 영국의 미묘한 우울감을 그릴 수 있는 건 문학뿐이다. 영화나 음악으로만 구현하는 쾌감이 있듯.

번역가 안정효는 영한 번역가 1세대다. 20대부터 영어로 소설을 썼고, 베트남전에 참전해 <하얀 전쟁>을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펴냈고, 총 1백28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영미권 문학에 이해도가 깊은 동시에 베트남전쟁을 겪은 한국인 번역가의 작품이니 <조용한 미국인>의 한국어 번역 수준 역시 무척 높다. 각주와 해설에도 그의 풍부한 경험과 세계관이 들어 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2023년 7월 안정효의 부고가 보도됐다. 고인의 마지막 작품이 <조용한 미국인>이 되었다.


  • 진흙 속의 호랑이

    오토 카리우스, 길찾기

    <조용한 미국인>의 주제 때문에 최근 출간된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서적을 모았다. <진흙 속의 호랑이>는 상대 탱크를 1백50대 이상 격파한 독일군 기갑장교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이다. 이런 책은 전쟁 옹호와 거리가 멀다. 그는 지휘관이 아닌 실행가였기 때문에 오히려 아주 실무적인 태도로 세계와 전쟁을 대한다. ‘주적은 정치가들이 결정하고 군인은 그 결정에 따를 뿐이다’라는 말에서는 직장인의 피로마저 느껴진다. 상세한 묘사와 정확한 정보 덕에 페이지가 탱크처럼 넘어간다.

  •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매슈 B. 리지웨이, 플래닛미디어

    매슈 B. 리지웨이는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해 더글러스 맥아더의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직에 올라 유엔군을 지휘했다. 전쟁을 실제로 겪고 지휘한 미국 장군의 경험담답게 감정적인 서술 대신 실질적인 정보와 경험이 담겼다. 미국 엘리트가 전쟁을 겪은 시점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재미와 의미가 있다. 가장 놀라운 건 모 서점 사이트에서 이 책을 구입한 20대 여성이 6.8%라는 점이었다(20대 남자는 0%). 요즘 20대 여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박찬용
Photography 박원태

2023년 08월호

MOST POPULAR

  • 1
    명절 후, 느끼한 속을 달랠 매운 음식 맛집 4
  • 2
    In The End, Color Touch
  • 3
    Hint of Scent
  • 4
    WayV, "저희가 구사하는 다양한 언어가 저희 음악의 스펙트럼도 넓힐 거라고 생각해요."
  • 5
    요즘 친구들의 섹스

RELATED STORIES

  • LIFE

    낭만 여행지의 작은 바 4

    1인 사장님이 운영하여 술맛까지 친근하다.

  • LIFE

    출장에서 살아남는 법

    직업 특성상 해외 출장이 잦은 이들에게 출장에서 살아남는 노하우를 물었다.

  • LIFE

    도쿄 브이로그를 따라서

    짧은 자유 시간 속 아이돌들이 브이로그에 기록한 도쿄 스팟 5

  • LIFE

    나트랑에 가면

    올해의 첫 여행지로 나트랑을 택했다. 여행의 취향이 분명해지는 경험을 했다.

  • LIFE

    서울 근교 불한증막 4

    설 연휴 묵혀두었던 피로 화끈하게 풀고 가야죠.

MORE FROM ARENA

  • VIDEO

    프레드 x 차승원

  • REPORTS

    반짝반짝 빛나는

    미인 대회 출신의 세 여자를 만났다. 눈이 부셨다.

  • LIFE

    손 내밀면 닿을 듯

    환상 속에만 존재했고 이름만 들어본 술의 맛을 바텐더의 입을 빌려 느껴봤다. 바에서 직접 사 마실 수 있거나 개인이 소장한 최고급 술 네 병에 대한 테이스팅 노트다.

  • LIFE

    Berlin

    에펠탑 찍고, 개선문 찍고, 인스타그램 맛집 다녀오고, 블로거가 추천한 아웃렛에서 알뜰 쇼핑하는 관광 코스 말고. 그냥 좋아서, 보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내 멋대로 도시를 즐기는 여행자들을 만났다. 시드니의 수영장 도장 깨기, 헬싱키의 사우나 투어, 베를린의 식물과 함께 사는 생활, 맨몸으로 뉴욕에서 운동하기 등. 자신만의 뚜렷한 취향을 주제로 도시를 깊게 파고드는 여섯 명과 이메일로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여행은 어쩐지 탐험에 가깝게 느껴졌다.

  • LIFE

    육식찬미

    하늘이 높아지고 입맛이 돌면 고기가 정답이다. 양질의 고기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식당 4곳.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