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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목소리

반복해서 듣던 음악에는 그 시절의 기억이 담긴다. 사랑하고, 사랑받던 시절 들은 음악들을 소환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보컬들이다.

UpdatedOn August 0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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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 링고를 동경한 첫사랑

K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컴퓨터를 했다. 그녀의 방이 너무 좁아서 침대와 컴퓨터 사이에 의자를 둘 곳이 없었다. CRT 모니터는 그녀의 머리보다 더 컸는데, 모니터에 달린 스피커에선 K가 선곡한 음악이 재생됐다. 벽에는 그녀가 좋아하던 브리트니 스피어스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왜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녀의 취향 품목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녀가 날 정말 좋아했는지 알 수 없긴 마찬가지. 그녀의 속은 미궁이었다. 헤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생각해봤지만 정말 모르겠다.

그런 K가 내게 남긴 유산이 있는데, 시이나 링고다. K는 섹스 전에 시이나 링고 2집 앨범 <승소 스트립(勝訴ストリップ​​)>을 틀었다. 입을 맞추고, 상황이 기승까지 전개되었을 때도 우산을 깜빡한 사람처럼 컴퓨터로 뛰어가 시이나 링고 노래를 틀었다.

2000년 시이나 링고의 음악은 당시 유행하던 얼터너티브록과 펑크록이 조금씩 섞인 형태였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그렇다. 얼터너티브록을 하는 여자는 다 멋있어 보이던 시절이다. K가 시이나 링고를 동경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K는 늘 멋진 여자이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내게 시이나 링고의 목소리는 오래 써서 날이 무뎌진 커터 칼 같았다. 위협적이지 않은, 낡고 쓸모없는 칼. 비음 섞인 허스키하고 날카로운 고음역대 음색이지만 무엇도 찢지 못할 것 같았다. 여러 번 찔러대야 피해자가 겨우 돌아볼 것 같은 칼이었다. 그러니 시이나 링고의 음색은 다른 목소리보다 더 간곡해야 하고, 애절해야만 했다. 다른 목소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비참함이 그녀의 노래에는 있었다. 노랫말을 하나도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녀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애걸한다고 생각했다.

간호사 복장을 하고 옆차기로 유리를 깨던 당돌한 모습을 보여준 곡 ‘죄와 벌(罪と罰)’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자기방어적인 기운을 느꼈다. 약한 사람이 센 척할 때 있지 않나. 그 모습이 K를 닮았다. 하지만 K와 내가 가장 좋아한 곡은 ‘깁스(ギブス)’였다. 이 곡에서 시이나 링고는 코트니 러브에 빙의한 듯 노래했는데, 코트니 러브처럼 거만하지 못했고, 그녀만큼 자유롭지도 않았다. 되레 절박한 호소에 가까웠다. 이 역시도 애걸이고, 비참이다. 우리는 시이나 링고의 칭얼거림을 들으며, 아무것도 찢지 못할 그녀의 칼날을 맞으며 사랑을 나눴다. 이듬해 K와 헤어지고 나서 생각했는데, 그건 조건반사 실험 같았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는 시이나 링고 목소리를 들으면, 한동안 K와의 섹스가 떠올랐다. K가 자신을 잊지 못하게 하려는 고도의 전략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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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진의 목소리는 실연을 달래주고

실연하고 배운 건 나도 구질구질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내게서 지질함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장혜진이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발표하고 10년 뒤. 당시 나는 일병이었고, J는 전화로 이별을 통보했다. 나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붙잡고 아무 말도 못했다. 내 입장을 전하고 싶어 휴가 때 J 집 앞에 찾아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럼 안 되는데, 괜한 짓이었다. J는 차가웠고 낯설었다. 나는 모멸감을 느꼈고, 그 이후로도 J가 왜 나를 떠났는지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술 마시고 전화했다. 뭔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J가 극대노한 것만 기억난다.

하여튼 그런 짓을 왜 하냐 싶겠지만 다들 한 번씩 지질해본 적 있을 테니 공감하리라고 본다. 이별 노래가 왜 그리 많이 불리겠나. 우리의 구질구질한 내면을 구겨줘서 그렇지. 슬퍼하는 와중에 생활관 라디오에서 장혜진의 ‘꿈의 대화’가 재생됐다. 침상 걸레질을 하던 중 눈가가 뜨거워졌다. 연속극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20대 초반 남자들만 모인 내무실은 순정과 폭력이 공존하는 수라다. 거칠게 행동하다가도 이별 노래가 나오면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특히 장혜진의 음색은 실연의 방문을 여는 열쇠였다. 원숙한 어른 여자의 목소리로 천천히 다가온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설움, 한이 서려 있었다. ‘마주치지 말자’처럼 빠른 템포의 기교 있는 R&B에서도 한이 드러나 귀 기울이게 된다. 그런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있다. 내가 이만큼 슬픈데, 슬프지만 참을게라고 어른스럽게 위로한다. 역설적으로 그런 태도가 억눌렀던 감정을 되살린다. 그녀가 중저음으로 담담하게 고백하면 숨을 멈추고 단어 하나 음절 한 마디를 쫓게 된다.

하지만 상처란 것이 지나간 일인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다가 아물지 않은 기억을 건드리면 기폭제가 되어 감정이 달아오르는 법. 장혜진의 노래가 그렇다. ‘1994년 어느 늦은 밤’은 차분하게 시작하지만 이내 애절하게 치솟는다. 고음을 내지르는 게 전부는 아니다. 고음과 중저음 사이에서 불안한 감정선을 유지한다. 억지로 붙잡고 있던 감정이 풀어져도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진 않는다. 실연당한 자의 자존심을 지킨다. 애절한 고백이란 그런 것이다. 한동안 장혜진의 노래를 들었다. J가 아무도 아닐 때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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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크롤이 만든 모던한 낭만

해야 할 일을 미루며 한량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 주어진 일과는 여자친구의 퇴근 시간에 맞춰 성수동으로 마중 가는 것뿐. 엄밀히 학생 신분이지만 백수를 지향하던 내가 그녀 눈에는 불안한 존재로 비쳤다. 음악 들으며 독서하는 생활을 즐기던 나는 그녀와의 연애보다 백수의 삶을 택했다. 우리는 덤덤하게 헤어졌다. 어른의 놀이였던 것처럼 쿨하고 깨끗하게. 우리는 연애를 한 거지 사랑을 한 건 아니었다. 내가 사랑한 건 여유롭고 규칙적인 생활이었다. 나는 손에 잡히는 책을 현실 도피하듯 읽었고, 재즈에 빠져 있었다.

그때의 재즈 보컬을 다시 들으면 방 안에서 청춘을 흥청망청 소비하며 낭만을 누리던 시절이 생각난다. 다이애나 크롤의 목소리도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는 매개체다. 노란 독서등에만 의지하던 밤, 다이애나 크롤의 관능적인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그녀의 목소리는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대척점에 있었다. 음색에 슬픔이 묻어나지도, 그렇다고 자조적인 것도 아니다. 여유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낙관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조금은 시니컬하고, 때로는 매혹적인 음색이 조화를 이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Cry Me a River’에선 곡의 감성을 촉촉하고 묵직하게 이끈다. 밤이슬이 내린 숲으로 천천히 잡아끄는 듯한 목소리다. 그녀의 허스키한 중저음은 클래식 재즈 트랙과도 잘 어울린다. 흑인 소울 감성이 돋보이는 ‘Autumn In New York’에 그녀의 시니컬한 감성을 입히면 세련미가 생긴다. 뉴욕의 모던한 감성이 두드러진다. 팝을 그녀만의 음색으로 해석하면 섹시하게 들린다.

그녀가 부른 ‘Just the Way You Are’와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에는 원곡과 다른 관능미가 있다. 중성적인 음색의 강점이 두드러지는 건 경쾌한 리듬에서다. ‘L-O-V-E’와 ‘Fly Me to the Moon’에선 산뜻한 피아노 연주와 두터운 보컬이 균형감을 이룬다.

하지만 백수 시절의 낭만을 소환하는 곡을 꼽으라면 ‘The Look of Love’다. 이 곡의 달콤하고 몽롱한 목소리는 여자친구를 상기시켰다. 곁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여름밤의 낭만은 계속되리라는 낙관도. 플레이리스트에서 이 노래가 재생되면 독서를 계속할 수 없었다. 공상을 하다가 꿈속으로 접어들곤 했으니까. ‘The Look of Love’는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던 노래, 내 청춘의 자장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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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부시를 주고받던 사이

늦은 밤이면 B는 메신저로 노래를 보냈다. 당시 우리는 안녕, 인사도 없이 불쑥 음원 파일을 보내야만 했다. 하고 싶은 말 대신,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노래를 주고받았다. 나만 알고 싶은 노래를 누군가에게 전송할 때는 그도 나와 같은 감성을 느끼길 바랐을 것이다. B로부터 종종 mp3 파일을 받았지만, 어떤 곡들은 지우지 않고 디스크에 남겨뒀다.

그중에는 케이트 부시의 ‘This Woman’s Work’가 있다. 케이트 부시의 목소리는 충격이었다. 첫눈에 반하듯, 듣자마자 그녀의 목소리에 매료됐다. 느리게 진행되는 피아노 연주 위로 청아한 고음이 위태롭게 진행된다. 피아노가 없더라도, 웅장하게 확장되는 악기가 없더라도 신비로운 그녀의 음색에 매혹되기 충분하다. 클라이맥스에선 곡을 강렬하게 이끌며 감정의 고저를 이리저리 휘두른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차원의 문을 연 것 같았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시즌4>에서 케이트 부시의 ‘Running Up That Hill’이 등장해 화제였다. 37년 전 발표된 곡이 역주행해 미국 음원 차트 1위에 올랐다. 독특한 드럼 비트와 신시사이저가 인상적이지만 ‘Running Up That Hill’을 특별한 곡으로 만들어주는 건 케이트 부시의 음색이다. 신비롭고 매혹적이며 관능적이며 날카롭다.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전자음악 같다.

하지만 B에게서 받은 파일 중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Wuthering Heights’였다. 그건 내가 가진 감성과 음악적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극단적인 뉴에이지 뮤지컬 넘버라고 생각했으니까. ‘Wuthering Heights’를 한 번만 들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곡은 트릭이 아니라 마법이다. 도입부의 히스테릭하고 극단적인 고음은 맑고 기괴하다. 그리고 감정이 고조된 상태를 지속하며 듣는 이의 감정도 극단으로 몰고 간다.

그녀의 목소리는 우리를 더 높고 아슬아슬한 절벽 끝으로 내몬다. 케이트 부시의 그로테스크한 음색은 불안한 동시에 아름답다. 그러고 보면 B가 새벽에 메신저로 케이트 부시의 노래를 보낸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케이트 부시의 주요 트랙들을 다시 들으니 B와 주고받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녀는 질문하고, 나는 대답하는 역이었다. 나는 왜 그리 무뚝뚝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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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조진혁

2022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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