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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itique

공정한 칼날

혈귀가 되면 강해질 수 있는데. 죽지도 않고. 그럼에도 나약한 인간으로 남아 기술을 정진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런 귀살대의 모습, 공정함을 선택한 친구들로 읽혔다. 시대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요즘, 온 힘을 다해 칼날을 휘두르는 귀살대의 칼끝에 가슴이 슬쩍 찔린 것만 같았다. <귀멸의 칼날>로 시대를 반추한다.

UpdatedOn April 08, 2021


어느 날 패배자가 되었다. 지는 건 익숙해서 좌절감에 무뎌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좀 서러웠다. 내가 왜 실패한 건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 무주택자의 서러움과 주식 투자의 위험을 성토하려는 건 아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서럽기는 하다. LH 사건과 같이 게임의 규칙을 어긴 사람들 때문에 패배자가 됐으니까. 매일 아침 시대의 불공정함을 느낀다. 좁은 공간에 쌓인 살림살이에 발등을 찧을 때부터, 문턱을 없앨 수 없는 임차인이라서, 주식 시황을 볼 때도 마음이 불편하다. 요즘 유행하는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는 능력 우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승리에 운이 따랐음을 자각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패는 내 탓이 아니며, 운이 따르지 않아서 그렇다고. 조건이 평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 거라고 한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나아질까. 지금 발가락 찧었는데? 영원히 문턱에 발가락 박으며 살아야 하는 건가? 함께 분노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귀멸의 칼날>이 어떻게 위로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귀멸의 칼날>은 뭔가 다르긴 달랐나 보다.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연재 기간은 4년에 불과하고, <원피스> 분량의 4분의 1에 불과한 전체 23권임에도 일본의 1억 부 클럽 만화 목록에 들었다. 단기간에 엄청난 파급력을 낳았다. 애니메이션은 어떠한가. 만화의 부족한 점을 애니메이션이 연출로 메웠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귀멸의 칼날> 애니메이션은 호평이 자자하다. 이 정도 트렌드라면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귀멸의 칼날>에 입문했고, 렌고쿠가 죽을 때 울었다.

<귀멸의 칼날>은 전형적인 소년 만화다. 성실한 소년(카마도 탄지로)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능력에 눈을 뜨고, 점진적으로 강해지는 상대들과 맞서 싸우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신선한 서사는 아니다. 설정도 익숙하다. 배경은 신선할 수 있겠다. 1910년대 다이쇼 시대로 서구 문물이 전통문화와 혼재한 시대상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대를 만든다.

그렇다고 혈귀를 서구 문명에 대입하지는 말자. 혈귀와 귀살대의 대립은 천년도 더 됐다고 하니까. 비슷한 힘을 가진 두 세력이 대립하는 설정은 격투물의 전통이고, 언제나 성공하는 공식이다. 각 세력의 개성 있는 캐릭터들도 볼거리다. 긴 전투 분량과 잔혹한 장면은 성인을 유혹하는 매력. ‘사이다’같이 빠른 전개도 몰입하는 요인. 짜깁기한 성공 공식 외에도 <귀멸의 칼날>이 갖는 힘은 따로 있다. 완전무결한 도덕성이다.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는 도덕적으로 순수하다. 귀살대 모두가 그렇다. 그 흔한 안티히어로가 없다.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는 주인공은 오랜만이다. 박애적인 주인공, 오염되지 않는 선한 심성의 인물들이 헌신한다. 귀살대는 악행에 분노해 싸우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지고지순한 인물들이다.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당연히 여긴다. 마치 개미 주주들을 위해 고민 없이 손절하는 바보 기관, 코로나로 힘든 임차인을 위해 1년 치 임대료를 안 받는 바보 건물주, 득남한 근로자에게 자기 월급을 양보하는 바보 사장 같다. 현실에 없는 박애주의에 마음이 동했다. 조금 울컥했다. 반면, 선택 상황에서 갈등하는 건 혈귀다. 혈귀는 나 같고, 내 주변 사람들, 합리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시대 가치 같았다. 귀살대는 그런 혈귀들의 목을 자른다. 단면이 아주 깔끔하게. 어쨌든 주인공을 포함한 귀살대는 무고한 사람들이 혈귀로부터 희생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음을 자처했다. 죽어도 귀살대의 뜻은 다른 귀살대원이 이어받아 계속된다. 이야기 전체에 흐르는 정서는 숭고함이다. 숭고한 서사는 오랜만이다. 만화는 책임과 헌신, 숭고함을 희화하지도, 무시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귀살대의 최상위 계급인 ‘주’들은 근력이 보통 인간의 8배라든가, 불꽃을 다루는 등 평범한 인간보다 강하게 태어났다. X맨 수준이다. 훈련해서 초월적인 검술을 익힌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특출나게 강하다. 그들은 자신이 강하게 태어난 것은 약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부모가 그렇게 교육하기도 했다. 그들은 특별한 능력에 의무감을 갖고, 사적 영역이 아닌 공공을 위해 사용한다. 또한 능력을 자신이 성취한 것이 아닌 타고난 것,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한다. 정리하자면 귀살대는 공공에 대한 책임이 부여된 능력주의 집단이다. 그리고 그것을 완벽히 이행한다.

나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사회적 책임과 희생을 이행한다면, 나는 실패했다고 느낄까? 설령 패배감을 느낀다 해도 큰 능력에 따른 보상을 탐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가 된다는 것은 단명한다는 뜻이니까. 만화에는 능력주의를 나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귀살대 시험에 탈락한 그들은 전투 후 뒤처리, 간호 등 후반 작업을 맡아 수행한다. 죽을 위험이 적고, 희생으로부터 자유롭고 안전한 직무다. 그렇게 살아가며 천천히 진급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귀살대에 입문한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와 동기들도 ‘주’만큼은 아니지만 남다른 능력을 지녔다. 역시 치열한 훈련을 바탕으로 급격히 성장한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인간이기에 하루아침에 괴력이 생기거나, 다른 이유로 특별한 혜택을 받진 않는다. 그들은 쌓은 실적만큼 진급한다. 적어도 귀살대에서는 ‘주’를 제외한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다.

귀살대의 책임적 능력주의에 반대되는 것은 혈귀의 개인적 능력주의다. 평범한 인간이 혈귀가 되면 괴력과 재생 능력, 영생 등 희한한 능력을 갖는다. 인간을 많이 잡아먹을수록 힘도 세진다. 혈귀는 힘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의 피, 약자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강해지고 약자의 희생을 양분 삼아 더 강해진다는 점은 부당하게 이익을 취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더 내어줄 피도 없다. 어쨌든 귀살대의 ‘주’가 능력을 타고났다면, 혈귀는 스스로 능력을 쟁취했으며 힘에 대한 책무도 부여받지 않는다. 혈귀는 자신의 능력을 공공이 아닌 사적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도 귀살대의 능력주의와 대척된다. 그래서일까. 혈귀는 등장할 때마다 자신이 성취한 능력을 자랑하기 바쁘다. 그것이 운명이 아닌 자신의 선택임을 자각하고, 약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 강해졌으면서 자신이 노력해서 강해졌다는 착각도 한다. 반면 혈귀가 되길 거부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남아 기술을 정진하는 귀살대는 공정해 보인다. 사실 나였으면 혈귀가 되었을 것이다. 성공하기 더 쉬우니까. 사다리 높은 곳에 오른 승자로 살 수 있다면 혈귀가 됐을 것이다. 현실은 그런 선택권조차 없다. 부정한 편법으로 성공할 기회를 거부하고 떳떳한 선택을 하는 건 <귀멸의 칼날>이 만화이기에 가능하다. 선량한 사람들이 노력해서 이기는 이야기는 판타지다.

<귀멸의 칼날>의 칼날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다. 혈귀들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악하게 태어난 혈귀도 있지만,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혈귀를 택한 이들이 많다.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는 그런 혈귀의 최후를 보면서 눈물 흘리며 마음껏 공감하지만 죽는 걸 말리진 않는다. <귀멸의 칼날>에서는 악인이 감정에 호소한다고 되살리거나 봐주거나 하는 거 없다. 사정이 딱해 봐주거나, 사회에 기여하는 경제력이 크거나, 혹은 유명인이거나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 대중의 정서에 반해서 등 감정은 판결에 고려되지 않는다. 감정에는 감정으로만 대응한다. 눈물에는 함께 울어줄 뿐이다. 정의가 차등되지 않고, 차별되지도 않는다. 흔들리는 법, 눈치 보는 법, 떼법이 아니다. 사연은 안쓰럽지만 행동에 대한 대가는 단호한 처벌. 지옥행이다. 집단에 속한 개인의 고민과 갈등, 집단과 집단 사이의 이념 갈등, 모호한 선악 경계는 <귀멸의 칼날>에 없다. 오직 권선징악. 칼날은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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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조진혁

2021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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