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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차에 헤리티지 담기

UpdatedOn August 19, 2020

전통은 열쇠인 동시에 족쇄다. 잘 사용하면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발전을 가로막는다. 자동차가 시대와 발맞추며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들,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전통은 시간이 흘러 쌓아 올린 역사만 의미하지 않는다. 몇십 년 된, 또는 몇 세대를 이어온 모델이라는 타이틀이 가치는 있지만 전통의 전부는 아니다. 팬층 또는 구매자에게 직접 와닿는 전통은 형태나 디자인, 특정 기술이다. 이런 것들이 오랜 세월 이어져야 전통 있는 자동차라고 여긴다.

전통 있는 모델로 보이게 하는 요소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안전 규제가 강화돼 디자인에 제약이 생기면서 전통적인 형태나 요소를 고집하기 힘들어졌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 또는 환경 규제에 맞춰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려면 전통으로 통하는 낡은 기술은 버려야 한다. 시장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한다. 전통을 유지하면서 새롭게 탈바꿈하기는 쉽지 않다. 파격적인 변신을 하려면 전통을 내려놓아야 한다. 판매량도 전통의 지속을 가로막는 요소다. 전통을 유지하면서 판매도 잘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쉽지는 않다. 판매가 잘 안 되면 브랜드가 휘청거릴 판인데 전통만 앞세울 수는 없다. 판매량이 적거나 브랜드 내에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모델이라면 전통을 고수하는 데 유리하지만, 판매량이 많은 핵심 모델이라면 무작정 전통만 지키겠다고 할 수도 없다. 팬층과 구매층이 일치하지 않는 점도 문제다. 구매력이 떨어지는 팬층이 전통 유지를 요구한다면, 전통을 고수해도 남는 것은 자존심과 명분뿐이다. 구매력 높은 계층의 변화 요구를 받아들이면 전통을 지키기 힘들지만 브랜드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통을 지켜야 하나 말아야 하냐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유행을 따르면서 전통을 유지하고 모두에게 인정받아 평판도 좋고 판매도 잘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런 모델의 대표는 포르쉐 911이다. 1963년 처음 나온 이래 지금까지 전통을 아주 잘 유지하고 있다. 아이콘화된 형태를 비롯해 정체성을 지키면서 최신 유행을 잘 녹여냈다. 911이 전통을 유지하는 데 평탄한 길만 걷지는 않았다. 엔진 냉각 방식을 공랭식에서 수랭식으로 바꿨을 때나, 개구리 눈 헤드램프 모양을 사슴 눈처럼 바꿨다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저항이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곁길로 새지 않고 전통을 잘 유지했다.

911 같은 차가 그리 많지는 않다. 전통을 지키던 차도 어느 순간 확 바꿔버리는 경우가 많다. 변화를 주지 않고는 새로운 모습을 원하는 시장 요구를 맞출 수 없어서다. 물론 이들도 전통의 끈을 놓지는 않는다. 여러 요소에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의미를 부여한다. 재해석을 시장이 받아들이면 전통의 혁신적 변화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따르지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억지 해석이라는 오명만 남는다.

전통적인 요소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모델은 변화에 대한 논란이 크다. 그만큼 팬층의 애정과 관심이 크다는 뜻이다. 최근 국내에 선보인 랜드로버 디펜더도 세대 변화에 따른 말들이 많다. 디펜더는 1948년 첫선을 보였다. 역사만 70년이 넘는다. 디펜더라는 이름은 1990년부터 쓰였다. 각지고 투박한 차체에 막강한 오프로드 성능을 갖춰 진정한 SUV로 인정받았다. 디펜더는 오프로드 본성을 강조하는 랜드로버 브랜드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표 모델이다. 디펜더는 군용, 농업용 등 특수 목적으로 많이 팔렸다. 일반 용도로는 주로 오프로드 마니아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소소한 변화는 겪었지만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하며 고유한 전통을 쌓아 올렸다. 디펜더는 랜드로버의 아이콘으로 통했지만 안전과 환경 규제의 벽을 넘지 못해 2016년 단종됐다.

2019년 3년 만에 2세대로 돌아온 디펜더는 모든 것이 싹 바뀌었다. 분신과도 같은 보디 온 프레임 구조는 모노코크로 바뀌었고, 기계식 부품은 전자식으로 대체됐다. 전통을 뒤엎었다는 불만의 소리가 곳곳에서 나온다. 무엇보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디자인이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지만 과거와 연결 고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박스형 차체는 유지하지만 세련되고 매끈하게 변한 모습이 과거와 딴판이다. 오프로드 주파력은 여전히 탁월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거칠고 야성적인 특성은 옅어지고 세련된 도심형 SUV 같은 성격이 짙어졌다. 이름만 디펜더지 2세대 모델이라고 보기 쉽지 않다. 디펜더의 변화를 반기는 사람도 있다. 그동안 오프로드 이미지가 너무 강하고 실생활에서 타기에는 알맞지 않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일반 SUV와 마찬가지로 도심과 오프로드에 모두 어울리는 차로 변했다고 좋아한다. 성능이나 장비 등도 현대화가 이뤄져서 요즘 시대에 맞다고 반긴다. 랜드로버 입장에서도 특수 목적용 자동차로, 한정된 시장을 노리는 모델로 명맥을 이어가기에는 부담이 클 터다. 새로운 구매층을 확보하고 판매를 늘리려면 변화는 피할 수 없다. 시장을 넓히려면 파격적인 변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만 충성스러운 팬들의 실망이 클 뿐.

변화는 정말 피할 수 없었을까? SUV 시장에서 디펜더처럼 험로용 정통 오프로더 이미지를 간직한 차로 메르세데스- 벤츠 G-클래스와 지프 랭글러를 들 수 있다. 오랜 세월 비슷한 모습을 이어간다. 변화가 없지는 않다. 장비의 현대화를 이뤘고 기계적인 부분은 요즘 시대에 맞게 바뀌었다. 그래도 이들이 전통을 유지하는 자동차로 꼽히는 이유는 겉모습 때문이다. 외관만큼은 과거 모습을 최대한 유지한다. 팬이든 아니든 누가 보더라도 G-클래스나 랭글러인지 단번에 알아차린다. 변화를 주더라도 적어도 전통을 대표하는 요소 중 하나는 유지한다. 전통을 유지하느냐 새로운 전통을 쌓아가느냐는 참 어려운 문제다. 차의 역사와 관념만으로 전통을 유지한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적어도 전통을 구성하는 대표 요소 중 하나는 끌고 가야 한다. 시장도 전통의 변화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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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조진혁
WORDS 임유신(자동차 칼럼니스트)

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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