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LIFE MORE+

방구석 작가 일기 에세이 편

고향에서 고향으로

UpdatedOn May 01, 2020

3 / 10
/upload/arena/article/202005/thumb/44888-412294-sample.jpg

 

알베르토 몬디

알베르토 몬디

방송인
코로나19 사태가 유럽으로 번지면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걱정됐다. 올해 초 알베르토는 오징어순대와 갈비찜으로 이탈리아에 한식 맛을 전파했다. TV에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소탈한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은 무사할까. 알베르토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달라진 일상에 적응해가는 축구광의 일상을 담담하게 전한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 나는 축구 중독자였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휴대폰으로 축구 뉴스부터 확인했고, 일하면서도 시간이 나면 주요 경기 하이라이트, 기자회견, 선수 인터뷰, 경기 전략 분석 영상을 보며 축구 감독이 직업인 것처럼 굴었다. 머릿속이 온통 축구뿐이었다. 연초 계획으로 1년에 책을 몇 권 읽겠다고 다짐했지만 하루 종일 내가 접하는 텍스트의 99%는 축구 관련 데이터였다. 그러다 코로나19로 인해 이탈리아 세리에A와 전 세계 축구 리그가 중단되면서 신문을 봐도 축구 이야기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며칠 동안 습관적으로 축구 뉴스 앱을 계속 클릭하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아마존으로 이탈리아어로 된 책을 구매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휴대폰이 아닌 종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일상생활의 혁명이 일어났다. 불경기로 인한 경제적인 손해, 재택근무, 무급휴가, 학교 및 어린이집 휴교, 아침부터 밤까지 끝없는 육아 등 질병과의 전쟁뿐만 아니라 전쟁 같은 현실 생활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코로나19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겪는 사람들 앞에 우리 일상의 어려움과 걱정은 사소한 것일 테다. 아인슈타인의 “모든 어려움 가운데 기회가 있다”, 나폴리언 힐의 “기회는 종종 불행이나 일시적인 실패의 모습으로 찾아온다”라는 말처럼 이번 일을 계기로 의미 있는 변화도 있다.

예정된 촬영 스케줄이 취소되면서 유치원에 입학했어야 할 아들 레오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아들과 노는 걸 좋아하기에 유치원에 가지 않는 레오와 하루를 보내는 것이 힘들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행복했던 우리의 시간은 점점 힘겨운 싸움으로 변해갔다.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잘 알겠지만 아이와 공원이나 놀이터에 나가면 두세 시간이 마치 10분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집에서 놀 때는 학창 시절 가장 싫어했고 졸렸던 수업 시간처럼 10분이 한 시간으로 느껴진다. 아이가 요새 꽂혀 있는 변신 자동차 로봇으로 하루 종일 똑같은 역할 놀이를 하다가 좀 더 창의적인 게임이나 놀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거실 중간 천장에 테니스공을 테이프로 고정하고 테니스나 야구 놀이를 했다. 택배 박스를 함께 색칠하고 자동차, 우주선이나 기차를 만들기도 했다. 색칠할 때 아이가 지루해하지 않도록 평소에 쓰지 않는 유성 매직펜, 마커 등을 주었더니 한 시간이나 넘게 집중을 했다. 또 많은 사람들처럼 아이와 함께 요리에도 도전했다. 이탈리아 뇨키 반죽을 하고, 빵도 만들었다. 더 건강하게 먹고, 요리하면서 레오와 놀 수 있는 일석이조의 귀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소소하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을 2018년 JTBC의 <날보러와요> 방송에서 시작했던 유튜브 채널 〈레몬TV〉에 1년 만에 올려봤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꾸준히 주 2회 업데이트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이 위기가 나에게도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요즘 해외에서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발 빠른 대처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의 상황이 심각한 가운데 많은 이탈리아 방송국과 라디오가 한국의 상황을 전해달라고 연락해온다. 그러다 한국 코로나 방역제도, 한국 의료제도, 한국 IT 기술, 한국 인터넷 환경 등 이탈리아 시청자에게 한국의 여러 모습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었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이라 느꼈다. 특히 어려운 시기를 보내며 더 나은 나라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한국 사람들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내 인생의 3분의 1을 보낸 한국이 이탈리아만큼 고향으로 느껴진다.

매일 똑같은 일상생활이 깨져 편하게 안주할 수 있는 컴포트존에서 벗어나면 처음에 힘들지만 결국엔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세상이 어둠 속에 있을 때 자기만의 조그만 빛을 모으면 세상을 다시 밝힐 수 있다. 코로나19로 희생된 분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 일상 속의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되새기며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Quarantine Diary 시리즈

Quarantine Diary 시리즈

얼마나 큰 행운인지

위로

사회적 거리를 두는 디제잉이란

응답하세요

맞은편 할머니

방구석 작가 일기 그림일기 편

코로나 시대의 사랑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GUEST EDITOR 정소진
EDITOR 조진혁, 이예지, 김성지

2020년 05월호

MOST POPULAR

  • 1
    뒷자리에서
  • 2
    끝의 시작
  • 3
    <아레나> 4월호 스페셜 에디션 커버를 장식한 세븐틴 조슈아
  • 4
    보테가 베네타 X 이영애
  • 5
    자연을 품은 스테이 4

RELATED STORIES

  • LIFE

    사카모토 류이치에게

    사카모토 류이치는 떠났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흐른다. 3월 28일. 사카모토 류이치의 1주기를 앞두고, 그를 보며 듣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질문을 건넸다. 오래된 서랍 속 편지 같은 이야기들이 돌아왔다.

  • LIFE

    만화책의 탄생

    <드래곤볼> <명탐정 코난> <몬스터> <꽃보다 남자> <주술회전>까지. ‘만화의 종가’ 서울미디어코믹스를 찾아가 만화책 한 권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듣고 왔다.

  • LIFE

    자연을 품은 스테이 4

    일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쉼과 안정을 찾고자 한다면.

  • LIFE

    당일치기 벚꽃 구경 어떠세요?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경기도 근교 벚꽃 명소 4

  • LIFE

    발리로 떠나는 이유

    떠날 수만 있다면 주저 없이 발리를 찾는 이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MORE FROM ARENA

  • LIFE

    CLEAN & BRIGHT

    몸도 마음도 더 깨끗하게.

  • LIFE

    베를리너가 만든 조금 다른 리커 4

    지금 베를린은 바야흐로 크래프트 스피릿과 리큐어의 전성시대다. 오랜 전통의 허브 리큐어, 숙성이 필요 없어 제조 과정이 간단한 진과 보드카, 럼 등의 증류주까지. 베를린의 향과 맛을 담은 술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 INTERVIEW

    뉴키드 우철의 도약

    스무 살 우철은 도약을 위해 작은 발자국들을 새기는 중이다.

  • INTERVIEW

    21세기 래퍼들 #KHAN(칸)

    힙합 문화의 미래를 이끌어갈 2000년대생 래퍼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귀감이 된 아티스트의 가사와 자신을 표현한 가사에 대해 질문했다.

  • INTERVIEW

    장사리에서 왔어요

    영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은 학도병을 소재로 한 전쟁 영화다. 겨울 해변에서 전투를 치른 네 명의 병사를 만났다.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