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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금물

이준기를 안다고 생각했다면, 조금도 모르는 것이다.

UpdatedOn September 1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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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헨리넥 톱은 보테가 베네타, 네크리스는 HR 제품.

검은색 헨리넥 톱은 보테가 베네타, 네크리스는 HR 제품.

달라 보였다. 볕에 잔뜩 그을린 피부, 돌처럼 단단한 얼굴, 낮은 음으로 짧게 울리는 목소리까지. 우리가 알던 이준기가 맞나? 마주 앉았을 때 그는 열에 들뜬 낱말들을 뱉다 이내 스르륵 눌변을 털곤 했다. “그러니까 또 사극이긴 하다.” 이 말은 이준기가 먼저 꺼냈다.

이준기는 곧 김규태 감독의 사극으로 돌아온다.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 이후 1년 만이다. 촬영은 모두 마쳤고 8월의 마지막 월요일에 첫 회가 방송된다. 그는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 왕소를 연기한다. 남을 믿으면 죽고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해야 살 수 있는 환란의 시대.

어머니가 불운의 징표라 낙인 찍은 아들이자, 상처를 안고 짐승처럼 살아온 남자다. 원톱은 아니다. 이준기는 이 부분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힘을 빼고, 한 발 떨어져서 넓게 볼 수 있는 자리이니까. 과거의 이준기는 무엇이든 1등이고 싶은 남자였다. 서른다섯이 된 지금은 모든 것에 조금 초연해졌다. 치열하게 달구었던 자신을 슬쩍 식히며 담금질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화이트 셔츠는 겐조, 재킷은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태닝을 했나?
작품 때문에 좀 그을렸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잘 어울릴 줄 몰랐다.
괜찮나? 하하.

가수에 비하자면, 정규 앨범 들고 컴백한 느낌이다. 1년여 만에 다시 한국에서 작품을 하는 거니까.
맞다. 한국에는 거의 1년 만에 <달의 연인: 보보경심려>(이하 <달의 연인>)로 얼굴을 비추게 됐다. 그래도 그간 쉬지 않고 일했다. 중국 영화에도 출연하고. <달의 연인>은 1월에 촬영을 시작해 6월까지 찍었다.

영화 <레지던트 이블: 더 파이널 챕터>도 있지 않나. 무려 밀라 요보비치와 함께 촬영했다.
나는 그걸 “<레지던트 이블>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밀라 요보비치와 영화를 같이 찍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작은 역할이었다. 카메오 수준의 특별 출연이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팬이기도 하지만, 실은 할리우드 시스템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경험 삼아 도전해봤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니까.

가까이에서 목격한 할리우드는 어떻던가?
시스템 자체가 생소해서 자극이 됐다. 나는 지금껏 치열하게 현장을 대하는 편이었는데, 그들은 프로페셔널함에서 오는 여유가 있더라. 그렇게 공유한 여유가 현장에 있는 모두를 편하게 만든다. 무척 좋았다.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이 배웠다. 촬영장에서 여유를 느껴본 게 오랜만이라 현장을 멀리서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이준기는 어떤 남자가 된 것 같나?
어떤 남자가 되기엔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갖지 못했다. 여행이나 연애도 하지 않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쉼 없이 어떤 일인가를 했다. 1년 전과 달라진 점이라… 글쎄. 더 재미없어진 것 같은데? 하하.

재미있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원래 개인적인 생활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시간이 주어져도 못 누린다. 일에 대한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강한 편이라 정신없이 몰두하다 보면 막상 시간이 있어도 뭘 하고 놀아야 할지 잘 모른다. 나를 위해 시간을 투자할 줄 모르는 거다.

오늘은 초연해진 이준기를 보고 싶었다. 이준기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당신을 치열하다고 표현한다. 이제는 좀 느슨하게, 풀어져도 좋지 않나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의 이준기는 예전과 많이 달라 보인다.
요즘 나도 그 생각을 한다. 그래서 최근에 선택한 작품들은 힘을 뺀 편안한 부분을 품고 있다. <달의 연인>도 원톱으로 끌어야 하는 드라마는 아니고. 실제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친구를 만나면 늘 그들을 웃겨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마음 편히 있다. 누구에게든 뭔가를 막 보여주려고 한다기보다, 슬쩍 풀어진 상태다. ‘무념무상으로도 살아보자. 여행도 한번 떠나보고’ 하면서.

그런 것도 하나? 혼자서 확 떠나보는 것.
외로움을 많이 타고 걱정도 많은 편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사실 감당이 안 된다. 분명 너무 외로워할 거다. 사람을 찾을 거다. 홀로 어딘가에 동떨어져 있다는 게 나에겐 또 다른 스트레스다. 물론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서 뭔가를 배울 수는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즐길 자신이 없다.

“일할 때는 외롭지 않다”고 말한 걸 어디에선가 봤다.
그렇지. 외로울 틈이 없다. 하하하.

<달의 연인>으로 복귀하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전작이 <밤을 걷는 선비>였고, <조선 총잡이>나 <아랑사또전>도 이미 하지 않았나. 그런 드라마 속의 이준기는 익숙하니까.
다들 또 사극인가 할 테지. 못마땅하게 여길 팬도 많을 거다. 작품 선택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사극은 제쳐두고 생각해야 하니까. 아쉬운 순간이 분명히 있다. 많이 고민했지만, 이번 작품은 여러 배우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만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크다는 게 좋았다.

사극의 정점인 왕 역할도 해볼 수 있고. 아직 왕은 안 되어봤거든. 비슷한 장르의 극에 거듭 출연한 것이 한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은 셈이 된다.

아직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보여줄 게 많다?
사람들이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이준기는 나쁜 짓도 못할 것 같다고. 욕도 못할 것 같다고. 항상 정의롭고 꿋꿋하고 꼿꼿한 캐릭터를 해왔으니까. 혹은 판타지에 가깝거나. 그런데 지금 말한 이런 인상을 깰 수 있는 작품은 많거든.

게다가 나는 하려고 마음먹으면 욕도 잘하고 잘 놀고 사람들과 허물없이 잘 지내니까! 물론 이 작품 이후로는 현대물로 돌아오는 게 큰 목표다. 아니, 목표가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하.
 

화이트 셔츠는 겐조, 수트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화이트 셔츠는 겐조, 수트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화이트 셔츠는 겐조, 수트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셔츠와 수트 모두 겐조, 반지는 HR 제품.

셔츠와 수트 모두 겐조, 반지는 HR 제품.

셔츠와 수트 모두 겐조, 반지는 HR 제품.

이번 <달의 연인>에서는 버려진 짐승 같은 사람으로 분한다. 훗날 왕이 되는 남자다. 역시 굴곡과 양면성을 품는다. 이준기는 왜 항상 엄청난 드라마가 있는 인물을 연기할까?
공교롭게 사극 장르를 많이 해왔고, 성장하는 인물이나 주변을 환기시키는 인물을 주로 맡아왔다. 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보고 싶은 욕구가 있다. 배우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일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판타지에 가까운 드라마 안에서 표현의 제한 없이 그려볼 수 있는 인물에 흥미를 느껴왔던 거지. 그런 나의 캐릭터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접할 때 짜릿했거든.

한 작품으로 다양한 것을 보여주는 일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사극이지만 한편으로 멜로이면서 판타지물이라든가. 하나의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그렇게 욕심 덩어리였던 거지. 다양한 걸 보여줘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다. 몸으로 하는 연기도 좋아해서, 액션 신이 많으면서도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내야 하는 캐릭터를 주로 했다. 그런데 너무 많은 걸 담아내려 하면 시청자는 지치기도 하는 것 같다. 당연히 지치겠지.

몸 쓰는 연기는 왜 그렇게 좋아했나?
내 특기이자 장기 중 하나를 몸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 몸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온다. 가장 몸을 잘 쓸 수 있을 때, 열심히 더 해보자 했던 거다. 그런 작품이 곧잘 들어오기도 했고.

이제는 단조로운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나?
그게 내가 요즘 바라는 거다. 많은 걸 보여주려던 마음은 없어졌다. 지금까지는 다이내믹하거나 파워풀한 것들을 꾹꾹 담아서 설명하는 캐릭터를 해왔다면 이제는 호흡이 길고 단조로운 캐릭터, 호흡을 가지고 노는 인물이 되어보고 싶다. 심심해서 관객이나 시청자가 가만히 관찰하는 역할 말이다.

이제까지 해온 게 아니라 몸이 근질근질할 텐데.
아마 그렇겠지. 하하. 그런데 나이를 먹다 보니까 사람을 바라보는 시야가 점점 넓어지더라. 인물에 집중하는 일에 흥미가 커졌다.

작품 바깥의, 일상의 사람에게도 관심이 많은 편인가?
맞다. 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먼저 여는 편이다. 적극적이다. 견제하지 않는다. 유쾌한 편이라는 이야길 듣곤 하는데, 사실 ‘내가 먼저 나를 보여줄 테니까 너도 너를 보여주겠어?’ 하는 뜻이 담겨 있는 거다. 어쨌든 나는 그 사람의 닫힌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 사람의 내면, 생각, 가치관 같은 걸 알고 싶어서 사람을 만나는 거니까.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다는 건 배우에게 요긴하겠다.

그렇지. 그리고 연기로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 건, 치유에 첫 번째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든 영화든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비싼 시간을 들여 보는 것 아닌가. 나는 사람들에게 가끔은 현실을 잊고, 현실에서 도망치거나 치유가 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다.

데뷔 초에 이런 말을 했었다. 무너지거나 좀 흔들려보고 싶다고.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어 크게 사랑받은 작품으로 본인을 각인시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어떤 것 같나?
흔들리거나 무너졌지. 배우로서의 삶도, 개인으로서도. 배신도 당해보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도 하고.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던 시절, 송사도 많지 않았나. 그때 비싼 값을 치르면서 인생을 조금 배운 것 같다. 힘들었다.

하지만 좋은 자극이 됐다. 그런 사건이 없으면 더 좋았겠지. 그러나 덕분에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좀 더 진정성이 생겼고.

배우로서도 마찬가지다. 흥행이 잘 안 된다든지, 캐릭터의 자기 복제를 한다는 평가를 받을 때라든지. 큰 실패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스트레스가 되거나 고민할 거리를 던져준 일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유연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모자라면 채우면 되지, 하면서.

긍정적이네.
원체 긍정적이다.

지금의 이준기에게 <왕의 남자>는 무엇인가? 까마득한 영광인가?
올림픽으로 치면 금메달 딴 것이 아닐까? 그런 작품으로 나를 처음 소개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준기한테 <왕의 남자> 말고 뭐가 있어?”라고 하지만 사실 <왕의 남자>만큼 잘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 여전히 나를 <왕의 남자>로 기억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도 꼭 한 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좋은 거잖아.

그 이후 이준기는 좋은 감독이나 작가에게 그다지 치우치지 않으며 온 것 같다. 누구에게도 편승하지 않고 걸어왔다고 할까.
나의 그런 부분이 팬들에게는 스트레스인 것 같더라. 왜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가냐 한다. 하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안 한다. 훗날 내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값진 경험이 됐다.

그리고 실은 누구나 다 좋은 감독 좋은 작가지. 난 그렇게 생각한다. 후회하지 말자. 안 되면 되게 하자. 나는 언제나 이 둘이 중심이다. 그래서 될 때까지 한다. 도전이라 생각되는 것에 자주 뛰어든다. 그냥 부딪친다. 그런 부분에는 겁이 없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이준기는 다소 콘셉트에 소모되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편이기도 하지.

그럼 지금보다 조금 더 일찍,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날것, 좀 더 생생한 것들을 할 수 있는 작품에 출연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이 딱 좋다. 왜냐하면… 내 얼굴에는 깊이감이 빨리 생기지 않더라.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이감이라면?
중후함이든, 뭐 그런 거. 세월이 묻으면서 농익는, 남자로서의 매력 같은 것 있지 않나. 감정이 깊어질수록 얼굴에 드러나는 성숙함 말이다. 사실 이전의 내 얼굴은 판타지물에 녹아들기 좋았던 것 같다. 나는 그걸 알았다. 그래서 오히려 날것, 생생한 것을 하는 것이 겁이 나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그런 부분에 아직 준비되지 않은 배우였다. 이제야 슬슬 그런 느낌이 나오는 것 같다. 이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시기를 놓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미 궁금하지 않은 배우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주연급 배우로 활동할 수 있는 상태이니까 아주 늦은 것 같지는 않다. 이제 서른다섯이 된 남자 배우로서 꺼내어 보여줄 것이 너무 많다. 이제 보여주고 싶다.

당신이 해온 것, 겪은 변화와 달리 이준기를 바라보는 앵글이 너무 정체돼 있었던 것 같다.

맞다. 아직도 과거의 나에 머물러 있는 앵글이 분명 있지.

여전한 것도 있나?
스스로 대견할 정도로 이 직업에 관한 중심을 잘 잡는 것. 확고하게.

어떻게?
배우는 대중을 상대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명확하다. 그런 사람이 지녀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게 배우의 첫 번째라고 생각한다. 성실한 것은 기본이고. 주변 사람들은 답답해 할 때도 많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크게 변한 것도 있는데. 아마, 이 글을 읽을 남자들은 다 결혼을 했겠지?

그렇지는 않을 텐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까? 서른다섯이 되니 이제 슬슬 가정을 꾸리는 것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남자가 너무 나이 들어 결혼하는 것도 매력 없는 것 같다. 나와 함께할 가족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려면 늦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언제 하지, 대체 언제 할 수 있을까, 큰일이네. 이런 고민이 슬슬 튀어나온다. 이제껏 내가 올바르게 살고 모범 답안을 채택하려 애쓴 이유는 미래 때문이었거든. 이제는 한 사람으로서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주 치열한 시절은 지난 걸까?
동년배 배우들 중에는 1등 해야지,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그런 것에 목표를 두지 않는다. 내면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지금만큼만 갖고 싶다. 지금이 딱 좋다. 주변의 관심과 텐션도 이 정도가 좋다. 모든 게 이슈화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보여줄 수 있는 상태. 이 정도만 유지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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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경진
photography 표기식
STYLIST 허은주
HAIR 김남순
MAKE-UP 신성은
ASSISTANT 김민수

2016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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