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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완판남 님

이 남자들이 입은 옷은 이제 단 한 장도 구할 수 없는 `완판` 상품이다. 여기서 냉정하게 평가해볼 것이 있다. 모두 판매됐다는 말은 누구나 입고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 관해.<br><br>

UpdatedOn September 03, 2009

업상 쇼핑 상담을 받는 일이 많다. 일종의 퍼스널 쇼퍼처럼 사람들은 투 버튼 수트를 살 것인가, 원 버튼 수트를 살 것인가를 비롯해 삼각 수영복와 사각 수영복 사이의 난감한 고민까지 나에게 해온다. 최근 의뢰받은 상담 중 제일 어이없었던 사례를 얘기하자면 먼저 귀 얇은 초등학교 동창의 가명부터 정해야겠다. 쉽게 A군이라고 부르겠다. 이제 막 패션에 눈을 떴고 옷 잘 입는 게 올해 최고 목표인 A군, 어느 날 <내조의 여왕>의 태봉이가 입은 조끼에 관해 물어왔다. “태봉이가 입은 조끼 봤어? 요즘에 잘나가는 애들은 진짜 저 조끼 입는 거야? 나 저거 살까 하는데 괜찮을까?” 물론 답은 ‘절대 아니다’인데, 말도 꺼내기 전에 내 입을 막아버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야, 근데 그거 벌써 다 품절이래. 아, 어디서 중고로라도 못 구하냐?” 귀는 화선지처럼 얇고, 줏대는 국수발처럼 가는 A군은 ‘태봉이 조끼’가 사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근데 분명한 건 ‘요즘 잘나가는’ 애들 중 절반도 저 조끼를 입지 않으며, 특히나 현재 9급 공무원인 A군이 입기에는 너무 튄다는 거다. 나는 우정을 중시하는 자로서 ‘아쉽다~’라는 말만 했다.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여기서 ‘우!’ 하면 모두 여기로 쏠리고, 저기서 ‘우!’ 하면 또 금세 그쪽으로 몰려가는 묘한 응집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TV에 나오는 몇몇 남자들이 브랜드의 매출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안타까운 건 사실이다. 왜냐, 나는 남자들에게 자신의 스타일을 가지라고 골백번 강조하는 패션지 기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자 연예인이 이렇게 판매에 영향을 미친 건 최근 일이다. 남성 패션보다 족히 10년은 앞서 있는 여성 쪽은 이미 어떤 드라마가 뜨느냐에 따라 길거리 풍경이 달라졌었다. 예를 들자면 이승연이 머리에 두건을 하고, 누드톤 립스틱을 바르고 나왔던 <신데렐라>(1997)가 인기였던 당시 길거리에 맨머리로 다니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가판대에선 ‘이승연 두건’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극중 이승연은 제주도에서 상경한 조금은 촌스러운 처자 역을 맡았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후 단발머리에 적색 립스틱을 바른 <미스터큐>(1998)의 악녀 송윤아가 인기일 때는 또 여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단체로 머리를 싹뚝 잘랐었다. 마치 <매트릭스> 속 스미스 요원 같은 단체 스타일 변신이 여자들에게는 익숙하다. 어쨌든 드라마를 항상 자기이입의 대상으로 삼는 여자들은 쉽게 캐릭터를 바꿔가며 중구난방 스타일을 한 지가 꽤 오래됐다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워낙 이런 역사도 길고, 옷 잘 입는 여자 배우들의 숫자가 많아지다 보니(심지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해외에까지 넓어져 그들의 롤모델은 국적을 초월하게 됐다) 스타일이 다양해졌다.

하지만 남자는 다르다. 패션에 대한 정보 채널이 부족한 남자들은 선별 과정도 없이 무조건 드라마에 나오는 스타일을 받아들인다. 더 심각한 건 그 배우들조차도 스타일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안타깝게도 <아레나>의 감식안으로 보자면 한국에 롤모델로 삼을 만한 남자 배우가 아주, 아주 적다는 거다. 또 A군처럼 드라마에서 잘나가는 젊은 CEO가 입었다는 이유로 그 옷을 무턱대고 신뢰한다면 문제는 더 커진다. 어떤 한 가지를 무한 신뢰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불러오기 쉽기 때문이다. A군은 지금 태봉이라는 배역에 빠져 태봉이가 입고 쓰고 타는 모든 것이 멋져 보이는 것이다. 한때 그런 짓을 해본, 10년 앞서 패션의 길을 걸어온 여자 선배로서 말하자면 그건 정말 자신의 스타일을 버리는 일이다. 완판남의 승전보가 많이 들려올수록 왠지 한국 남성 패션이 도태된다는 기분이 드는 건 지금 여기 편집팀에 있는 모든 기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특히 단발성 완판남들이 많은 걸 보면 우리는 분명 그 배우보다 그 배역에 빠져 있는 거다. 태봉이가 만일 뒷골목 양아치로서 저 조끼를 입었다면 분명 이만큼 이슈가 되진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니 제발, 완판남에 속지 말고 자신의 스타일을 갖자. 스타일 있는 인간이 돼야지, 버튼만 누르면 복제되는 스미스 요원이 되어선 안 된다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해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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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김민정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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