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FEATURE MORE+

그래요, 나 패션지 편집장입니다

사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다. `패션지 편집장` 하면 떠오르는 전형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UpdatedOn April 04, 2009

 

로 세일 기간에 하는 쇼핑이라는 게 그렇다. 

사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다.

‘패션지 편집장’ 하면 떠오르는 전형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처럼 에르메스 스카프를 핸드백마다 매달고 다니는 명품 아이콘도 아니고(목에 두를 것도 없는 마당에), 나카무라 우사기처럼 ‘너희가 명품을 아느냐’고 지껄일 주변머리도 없다. 익히고 또 익혀도 끝이 없는 명품의 세계를 지금도 꾸준히 학습 중일 뿐이다. 미국 드라마 <어글리 베티>에 등장하는 편집장처럼 우직한 비서를 뒀다거나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처럼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자식처럼 물고 빨고 사랑할 주제도 못 된다. 비서 대신 몰스킨 다이어리가 내 시중을 들고, 마놀로 블라닉 대신 김씨 성을 가진 아들을 한 명 키우고 있긴 하다. 맞다, 영화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에서처럼 유리로 된 사무실에 앉아 틈틈이 요가를 하는 여유는 갖진 더더욱 못했다. 서류와 잡지가 스스로 벽을 이룬 공간에서 뭉친 어깨 근육을 풀기 위해 날갯죽지를 들썩이곤 하는 게 다다. 기사 달린 자가용 뒷좌석에 앉아 나른한 목소리로 디자이너들과 허울 좋은 통화를 일삼는 팔자도 아니다. 그저 남들보다 좀 더 바쁜 관계로 운전이 좀 더 과격하고 목소리가 좀 더 우렁찰 뿐이다. 특기는 차선 변경과 끼어들기, 취미는 운전 중 전화로 컨펌하기라고나 할까.    

기대를 저버렸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영화 속 그것과 외모만 다를 뿐, 패션지 편집장으로 산다는 게 특별한 인간형으로의 변이라는 관점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그 특별함(?)을 감지한 낯선 이들은 때때로 내게 직업을 묻는다. 보통 이런 경우다. 
 
상황 1. 모월 모시 택시 안.
“관세청 사거리요.”
“강변북로 탈까요?”
“그래? 원더걸스 촬영 시간이 두 시간 밖에 안 돼? 아니요, 두무개 길로 가주세요.”
“그건 많이 도는 코스인데요.”
“괜찮아요. 돌더라도 가주세요. 그래, 그래… 그럼 헤어를 모두 바꿀 시간은 없겠어. 대신 의상은 바비 인형 콘셉트로 가면 어떨까?  강변북로는 이 시간이면 막히잖아요. 그래… 비비안 웨스트우드나 블루마린 같은 브랜드 룩 북 좀 보고 결정해봐. ”
“네? 네… 저, 근데 뭐하시는 분이세요?”

상황 2. 모월 모시 공인중개 사무소 안.
“깨끗한 곳으로 알아봐주세요.”
“이사 가능한 날짜는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특별한 조건은 없나요?”
“신발장이 깨끗하고 큰 곳으로 알아봐주세요.”
“네? 네… 근데 뭐하시는 분이신지?”

상황 3. 모월 모시 그릇 가게 안.
“사모님, 이 포트 메리온 세트 어떠세요?”
“….”
“세트로 하시면 20% 할인해드리고 있어요.”
“…”
“영국제품이라 티포트 세트는 정말 품질이 좋고요. 이 꽃무늬는 대대손손 물려줘도 될 만한 명품이예요.”
“저기, 검은색 국그릇은 없어요?”
“네?”
“무늬 없는 검은색 국그릇이오. 보다노바에서 나온 두툼한 커피잔 같은 재질로 만든 그런 거요. 스웨덴 제품 중에 있을 법도 한데….”
“아…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디자인하시는 분이세요?”

내가 희한한가? 난 그저 유행의 회귀를 믿는 바, 버리지 않고 쌓아둔 신발이 넝마 더미만큼 많았을 뿐이고. 그릇도 패션의 일부라 믿는 바, 내 스타일에 어울리는 걸 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고. 그리고 오랜 시간 패션 트렌드를 숙지한 바, 누구에게 어떤 브랜드의 옷이 어울릴지 정도는 집어줄 수 있는 지식이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게 특별하다면 패션지 편집장이란 특별한 취향으로 변이된 전문직 종사자 정도로 표현하는 게 좋겠다. 에르메스 스카프 대신 고무줄로 머리채를 동여 묶고 전사처럼 현장을 누비는, 당신이 상상했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가 아니라 <터미네이터>의 사라 코너에 더 가깝지만.
실망스러운가? 하하, 그렇다면 그건 영화와 드라마에 열중했던 당신 탓이다.


P.S
어려운 시절이다. 편집장에 대한 꿈을 가진 독자들의 편지가 부쩍 많아진 것도 시절 탓일까. 메일함을 뒤적이다 패션지 편집장의 삶에 동화 같은 환상을 가진 독자들이 많아진 것 같아 대략 내 일상을 적어봤다. 패션지 편집장으로 산다는 건 취향이 확실해지는 과정이지 취향에 맞는 모든 물건을 소유하는 삶이 아니며, 확실한 취향을 갖기까지 눈물 잘 날 없는 수련과 연마의 시절을 거쳐야 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디가 겪는 정도의 시련은 ‘좀 우습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에스엠라운지>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디지털 매거진

MOST POPULAR

  • 1
    우리는 시계다
  • 2
    Boy's Diamond
  • 3
    <더 글로리>의 자취
  • 4
    폴햄의 스무살을 축하해
  • 5
    봄비

RELATED STORIES

  • FEATURE

    오늘의 공예

    AI와 글로벌 대량생산의 시대에도 누군가는 입으로 유리를 불고 닥종이에 옻칠을 한다. 기술을 닦고 고민을 모아서 공예품을 만든다. 젊은 공예가의 공예품을 모으고 그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 FEATURE

    Special Thanks to

    <아레나>에 몸담고 있던 시기는 서로 다르지만 각자의 시간 동안 마음 깊이 감사했던 그대들을 향해 진심을 가득 담은 헌사를 보냅니다.

  • FEATURE

    17년이 흐른 뒤

    2006년 3월호, 표지는 주드 로, 키워드는 블랙칼라 워커. <아레나 옴므 플러스>가 한국에 처음 나온 해다. 그때 <아레나>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어떤 예언이 맞고 어떤 예언이 빗나갔을까. 거기 나온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동안 세상에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

  • FEATURE

    어느 어부의 하루

    겨울 동해 바다 위에서 문어를 낚는 어부의 하루를 따라갔다.

  • FEATURE

    2022 월드컵 복기

    크리스마스쯤 월드컵이 반짝였다가 새해가 되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선수들은 다시 리그로 돌아가 축구를 계속하고, 우리 주변에는 몇 명의 스타가 남았다. 또 무엇이 남았을까? 월드컵은 스포츠를 넘어 비즈니스 곳곳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카타르의 현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좋은 대답을 해줄 사람들을 찾아 직접 물어보았다.

MORE FROM ARENA

  • FASHION

    볼리올리로부터

    볼리올리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비데 마렐로(Davide Marello)를 구분 지을 수 있을까?

  • WATCH

    GREEN SHOWER

    잠시 걸어두고 천천히 살펴보세요.

  • DESIGN

    大字報 대 자 보

    브랜드의 정체성을 응축한 로고를 새겨 세상에 널리 알리다

  • FASHION

    세차장에서

    명랑한 스웨트 셔츠를 입고 반짝반짝 세차를 합니다.

  • INTERVIEW

    오후의 이진욱

    결과에 연연하지 마라.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가져봐야 버릴 수 있다. 이진욱이 햇살 좋은 화요일 오후에 남긴 말들.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