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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세상에 남자 복도 참 많지. 사주팔자에 일복은 많아도, 남자 복 많다는 말은 없었는데. 하지만 내 팔자가 휘황찬란까지는 아니더라도 갓 지은 쌀밥처럼 자르르 윤기가 도는 게 이 복 때문 아닌가 싶다.<br><br> [2008년 12월호]

UpdatedOn November 22, 2008

세상에 남자 복도 참 많지.

사주팔자에 일복은 많아도, 남자 복 많다는 말은 없었는데.

하지만 내 팔자가 휘황찬란까지는 아니더라도 갓 지은 쌀밥처럼 자르르 윤기가 도는 게 이 복 때문 아닌가 싶다.  

내 입으로 말하려니 혀까지 후끈해지지만… 그 복덩이 중 하나가 남편이다. 그는 유난떨며 일하는 황망한 아내를 보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다. 뭐 가끔 속아서 결혼했다는 말을 하긴 한다만. 그의 기구한 결혼 생활을 요약하자면 이 정도 되겠다. 밤만 되면 불나방처럼 파티장에 몸을 내던지면서 집 전기세를 단 한 번도 체크하지 않는 어이없는 여자와 사는 것, 공식 석상에선 환경 문제를 논하면서 침실 불을 켜놓고 출근하는 게 다반사인 나사 빠진 여자와 사는 것, 집에선 물 빠진 추리닝 한 장으로 365일을 버티면서 밖에서만큼은 최신 트렌드를 논하는 가식적인 여자와 사는 것, 밥해주는 횟수보다 밥 사달라는 횟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뻔뻔한 여자와 사는 것. 이런 나와 사는 지지리도 복 없는 나의 남편이 이달 <아레나>에 등장했다. 이지영 기자의 ‘패션지 편집장의 남편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칼럼에 인터뷰이로 말이다. 인터뷰 내용이야 어찌 됐든 나는 그의 아량을 먹고 책을 만든다. 이 절대적 사실을 두고 나는 그를 ‘복덩이’라 부른다.

나를 둘러싼 복덩이가 그 하나만은 아니다. 안팎 살림이 허점투성이니 한두 명의 복덩이로 나의 말랑한 안위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중 묵직한 복덩이 세 명만 공개하겠다. 박지호 피처팀장, 민병준 패션팀장, 오민수 마케팅팀장. 어쩌다가 오장육부가 욕심으로 가득 찬 나 같은 리더를 만나게 됐는지… 이들 역시 쉽게 살 팔자는 아닌 거다. 이달 표지 작업만 해도 그렇다. 여유라곤 일원어치도 없는 달거리 잡지를 만들면서 8명의 인사를, 그것도 올해의 남자라 할 만한 큰 인물들을, 모두 만나 인터뷰하고 촬영 하라는 배당표를 손에 든 순간 그들의 위산은 역류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 모두를 한날한시에 초대해 저녁을 대접하고 조촐한 시상식을 하기로 한 것도 나였으니, 그 스케줄 조율의 임무를 맡은 삼인방이 단체로 상소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하지만 근면한 복덩이 삼인방은 군말 하나 더하지 않고 대업을 완수하고자 산 넘고 물을 건넜다. 이외수 선생이 계신 화천으로, 김경문 감독이 계신 잠실 경기장으로, 생방송이 한창인 촬영장으로. 예를 다해 섭외하고 예를 다해 모시기 위해서.

극악무도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모셔, 안 되면 무릎이라도 꿇어!’라고 목울대를 나팔수처럼 울려댔다. 그뿐인가. 새벽에도 문자를 날렸다, 애인 잡아먹을 스토커처럼. ‘잘돼가나 제군들 흐흐흐 섭외가 안 됐는데 잠이 오나 흐흐흐 마감 안 되면 죽을 각오하게 흐흐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아침이 되면 그들은 말간 얼굴로 (질려서 창백해진 걸 수도 있겠다) 출근해 좋은 소식 하나씩 착한 제비처럼 물어다놓고 또 길을 떠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누군가는 정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고, 또 누군가는 교통사고 직후(지난달 기자들이 한 차에 탔다가 사고가 난 일이 있었다) 하루도 쉬지 못해 골병이 들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에겐 티 한점 내지않고, 또 말간 얼굴로 다가와 좋은 소식을 겹으로 놓고 갔다. 안다, 나도. 모델 한 명으로도 찍기 부담스럽다는 표지에 8명을 등장시키라는 게, 1페이지에도 열을 다해야하는 인터뷰 칼럼을 20페이지나 배당한게 얼마나 모진 일인지. 하지만 비정한 나는 또다시 소리친다. 안 되는 건 없다고, 다만 안 할 뿐이라고. 참, 매정한 사람이다, 나는.

여하튼 이달도 난 그들의 그늘에서 땀을 식혀가며 천금 같은 책 한 권을 뚝딱 지었다. 대문엔 복덩이들의 이름 대신 그들이 물어온 좋은 소식을 내걸었다. 매해 12월이 되면 독자들에게 인정받아 마땅한 그해의 남자를 찾아내 <아레나>의 얼굴로 만들겠다는 약속, 올해도 이들 덕에 지키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길도 있고 섬도 있다는데 나는 이들의 조력으로 다리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성실하게 물어다준 좋은 소식들로 독자와 소통하는 탄탄한 다리를 말이다.
한 해가 가는 이 마당에, 고맙다고 또 고맙다고 말해주련다.

P.S
작년 12월 에디터스 레터에 이런 글을 썼었다.

‘낯빛이 맑은 사람은 건강하다. 낯빛이 붉은 사람은 화가 많은 것일 게고 낯빛이 어두운 사람은 필시 우울한 게다. 가식이 없는 사람의 낯빛은 거짓을 모르니 당당할 테고, 편견이 없는 사람의 낯빛은 잔꾀의 술수를 버리니 담담할 테다. 생각의 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사람은 말이 짧아도 풀 먹인 광목처럼 담백한 기운이 묻어날 테고, 원칙의 칼을 찬 사람은 잡풀같은 미련의 부스러기들을 뽑아내니 그 얼굴에 정갈함이 배어날 것이다. 기호가 확실한 사람은 암고양이처럼 다가오는 은밀한 유혹의 잔을 거두니 그 낯빛에 자아의 표식이 선연할 것이다. 그리고 겸양한 자의 낯빛엔 구도의 고샅길이 오롯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얼굴은 살아온 날과 뇌관을 타고 흐르는 생각의 물에 대한 절대적 투영이라고 나는 또 그렇게 믿는다.’

2008년 12월호 표지를 보면서 당신은 <아레나>의 낯빛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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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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