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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 정욱준

정욱준이 트렌치코트의 본고장인 파리에 자신의 창작품을 들고 가겠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을 할 수 있었던 건 20여 년간 남성복, 그중에서도 트렌치코트만을 집중적으로 파온 집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그는 `주목받는 신인`의 위치를 넘어 세계 패션계의 핵심부에 가장 근접한 한국 출신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목전에 두고 있다.<br><br>[2008년 12월호]

UpdatedOn November 22, 2008

Photography 보리 Retouching 신호준 Set Styling 노제향 Feature Editor 박지호 Fashion Editor 민병준

“맞아요. 지난해 트렌치코트를 들고 파리 컬렉션에 가겠다고 했을 때 절친한 동료부터 사돈의 팔촌까지 말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죠. 그들의 논리는 단순했어요. ‘트렌치코트의 고향이 바로 파리인데 아시아에서 온 무명의 디자이너가 만든 코트를 누가 주목할 것 같아? 비웃음만 사지 않아도 다행이지.’ 하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아이템이 바로 트렌치코트인걸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충실한 기본기에 나만의 감각만 잘 덧붙인다면 세계 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거라고 봤어요. 결국 무모해 보였던 도전은 보기 좋게 성공했고, 준 지(JUUN. J)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죠.

아마 다들 보셨을 거예요. 당시 각종 매체를 장식했던 사진 한 컷 말이죠. 파리에서 첫 컬렉션을 무사히 끝마친 후 만면에 함박웃음을 띤 채 무대 뒤로 돌아오는 모습이 담긴 그 사진을 보고는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참, 간도 크다. 그 거대한 무대에서 떨리지도 않았어?’ 웬걸요. 사실 무대 인사를 나오기 직전 잔뜩 겁에 질린 터라 발걸음도 잘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조심스럽게 커튼을 젖히고 고개를 내미는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시선에 와 박히더군요. 순간 ‘아! 됐구나’라는 충만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데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어요.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웬만큼 무대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던 거죠.

그 이후의 행보는 사실 저도 실감이 잘 안 나요. 1년 내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허공에 붕 뜬 상태였다고나 할까? 가끔 어지럼증이 느껴질 정도로 아득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트렌치, 밍크, 재킷을 중심으로 영국 베르티스에 40벌을 보냈는데 한 달 만에 솔드아웃되었다고 하지, 홍콩 조이스에서는 제 작품들이 남성복 매장의 핵심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고 하지, 파리에서는 칼 라거펠트가 매장을 직접 방문해 제가 만든 수트를 사갔다고 하지. 참, 심지어 라거펠트는 어시스턴트 3명의 옷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떠났다더군요. 뭐, 제가 직접 매장에 가본 것이 아니라 관계자를 통해 전해 들었기 때문에 더욱 실감이 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니죠. 이 정도로 만족할 거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유럽 시장에서 이제야 ‘핫 뉴커머’의 위상을 획득했을 뿐인걸요. 굳이 비교하자면 그 해에 새롭게 등장한 신인 중에서 주목할 만한 5인 안에 들었다고나 할까요?

별다른 끈도 없이 ‘무대뽀’로 두드린 끝에 유럽 패션계의 주목을 얻어낼 수 있었던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무엇보다 기본 테일러링에 충실했기 때문이죠. 전 내셔널 브랜드에서 처음 일을 시작해 10년 동안 기본기를 쌓는 데만 집중했어요. 보통 디자이너들은 거리를 두기 마련인 ‘봉제 선생’들과도 무척 가깝게 지냈죠. 밑바닥에서부터 인내심을 갖고 패션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하나씩 익혀갔던 것이 결국 지금의 ‘준 지’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디어와 독창성,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테일러링은 도외시한 채 아방가르드한 겉모양에만 치중하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재기 발랄한 후배 디자이너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 요즘 추세는 참 반가운데,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이념적인 디자인은 오히려 덫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소도구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면 나중에 독이 된다는 사실도요.

글쎄요. 디자이너로서 최종 목표는 아무래도 유수의 브랜드 하우스에 영입되는 것, 아닐까요? 클래식 라인이 돋보이는 브랜드의 디렉팅을 해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죠. 굳이 꼽자면 헬무트 랭과 지방시? 글쎄요. 만약 제가 실패한다고 해도 그 뒤를 잇는 후배들에게 충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의미 있는 도전이라 평가받을 수 있겠죠. 그러니까 마흔을 넘어서야 감히 파리 컬렉션에 참가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난, 아직 출발점에 서 있을 뿐인 겁니다.”

Arena Says

디자이너 정욱준은 이렇게 말한다. “컬렉션 기간만 다가오면 지인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해요. 입으로는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데 막상 눈을 보면 딴 생각만 잔뜩 하고 있다는 거죠. 제가 좀 그래요. 컬렉션 기간만 되면 머릿속은 온통 옷에 대한 아이디어만 꽉 차 있고, 심지어 밤마다 옷을 재단하는 꿈까지 연달아 꾸곤 하니까.”
단 세 번의 컬렉션으로 세계 패션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루키로 떠오른 정욱준은 2008년을 그야말로 자신의 해로 각인시킨 채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다. 단숨에 전 세계 패션 매체의 편애를 받는 위치에 올라섰을 뿐 아니라 아테네 컬렉션과 러시아 컬렉션에 연달아 초대받았고, 린다 패로와 크리스&티보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성사시켰으며, 세계적인 편집매장들의 러브콜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다. 칼 라거펠트가 그의 컬렉션 피날레에 준 지의 수트를 입고 등장한 것은 그 하이라이트라 할 만하다. 한국 패션 디자인의 역사는 정욱준에 이르러 새롭게 쓰일 것이다. 그는 수십 년에 걸친 공략 끝에 세계 패션계의 주류로 올라선 일본 디자이너 그룹을 한국 패션계의 모범 답안으로 삼고 있다. “앞으로 한국의 패션을 전 세계에 알리느라 죽어라 고생만 할 것 같아 솔직히 억울한 마음도 조금 있어요. 그래도 나를 딛고 일어선 후배들이 언젠가 그 과실을 따 먹겠죠.” 그의 솔직한 속내에서 한국 패션계의 밝은 미래를 본다.

Profile 1992년 ‘ESMOD SEOUL’을 졸업한 뒤 남성복 브랜드 ‘CHIFFONS’의 디자이너로 입사하면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은 정욱준은 내셔널 브랜드 클럽 모나코, 닉스 등에서 디자인팀장으로 일하며 기본기를 쌓아왔다. 1999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론 커스텀을 론칭한 뒤 디자이너로서 역량을 인정받기 시작한 그는, 2008년 파리 컬렉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신예로 떠오르며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의 위상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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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Photography 보리
Retouching 신호준
Set Styling 노제향
Feature Editor 박지호
Fashion Editor 민병준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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