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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감독 김경문

살다 보면 그런 사람 꼭 있다. 말 한마디 따로 붙여보지 못했건만 푸근하면서도 따뜻한 인상 하나만으로충분한 믿음과 신뢰를 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내게는 야구 감독 김경문이 똑 그렇다.<br><br>[2008년 12월호]

UpdatedOn November 22, 2008

Photography 보리 Retouching 신호준 Set Styling 노제향 Feature Editor 박지호 Fashion Editor 민병준

“난, 그렇게 생각해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선수가 있다, 이 말이죠. 이를테면 꽉 찬 물컵과 같은 선수가 있는 겁니다. 뛰어난 자질에 똑 부러지는 성격까지 갖춘 천재과(科)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난 빈틈없이 철두철미한 선수들에게는 이상하게도 관심이 잘 안 갑디다. 뭐, 사람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닙니까? 모든 걸 100% 다 잘해내면 그게 신이지 어디 사람이겠어요? 평생 야구 감독이라는 외길을 걷다 보니 그런 확신이 더욱 굳어졌어요. 처음부터 완벽한 선수는 그야말로 극소수다, 굳은 의지와 성실성만 갖추고 있다면 평범한 선수라도 자신만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하모니와 팀워크를 우선시하는 그 사람의 됨됨이다, 이런 제 나름의 철학이 형성되더라는 겁니다.

지난해 에이스가 빠져나갔을 때에도, 올해 FA 자격을 얻은 주축 선수들이 팀에 잔류할지 아닐지 불투명해도 난 걱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과 평생 같이 갈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겠죠.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꼭 그렇게만 풀리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감독이란 주어진 여건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존재여야 합니다. 고참에게는 그에 어울리는 경력과 카리스마가 있듯, 젊은 선수에게는 또 그다운 잠재력과 과감성이 깃들어 있는 거죠. 그 수많은 변수들을 조합해 개인에게나 팀에게나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연금술사, 그게 바로 감독이라는 직업입니다.

허허. 역시 한국시리즈 5차전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군요. 그래요. 어떤 팬은 이렇게 한탄했다 하더군요. ‘투수 교체를 단행하지 않는 순간 승리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사라진 듯 보였다.’ 당연히 절대 아닙니다. 치열한 승부사가 아니면, 야구라는 세계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올해 6승 7패를 기록한 투수 김선우는 그 순간 올 시즌 최고의 피칭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7이닝 동안 고작 1실점을 기록하며 혼신의 역투를 펼쳤단 말이에요. 감독의 의무란 그런 겁니다. 선수가 광기 어린 눈빛을 띤 채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그냥 턱 믿고 맡겨주는 것, 아무리 속이 타들어가더라도 선수 앞에서는 여유로운 표정을 절대 잃지 않는 것, 당장의 성과를 재촉하기보다는 앞으로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말입니다. 그 순간 최선의 방책은 (김)선우를 믿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분명 감독의 믿음에 역투로 화답했고요. 그는 내년에 두산의 에이스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그 경기를 놓치더라도 선우가 에이스로서 자신감만 확실히 회복할 수 있다면 나중에 몇 배나 더 큰 가능성으로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거죠.

맞습니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는 ‘운’이라는 것도 큰 변수로 작용합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세계라는 뜻이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뚝심을 갖고 기다리는 겁니다. 베이징 올림픽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초에 동메달이 목표였고,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제 능력을 모조리 쏟아 부었습니다. 선수들끼리 눈빛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금세 알아챌 정도로 팀워크도 최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고요.

그 다음부터는 이제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인 겁니다. 그때부터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들을 믿는 것, 신뢰를 통해 원래 갖고 있는 능력의 120%를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 하나뿐입니다. 야구란 그런 겁니다.

‘복장(福將)’이라는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느냐고요? 뭐, 혹자는 실력 대신 운에 기대 승리를 쟁취해왔다는 듯한, 묘한 뉘앙스가 귀에 거슬리지 않느냐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던데 전 듣기만 좋던데요, 뭘. 사실 지금껏 순탄한 야구 인생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내가 ‘복(福)’을 받았기 때문 아닙니까? 미국에서 라면 한 박스 싣고 18시간을 꼬박 운전해가며 힘겹게 지도자의 자질을 닦던 순간에도, 우여곡절 끝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두산 베어스 감독’ 자리가 제 앞에 돌아왔을 때에도 과분한 ‘복’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겁니다. 앞으로의 바람이요? 그냥 그거 하나뿐입니다. 내가 받은 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 야구팬이건, 후배들이건, 어린이들이건 간에 ‘야구를 통해 인생의 희열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면 내 역할은 모두 완수했다고 봅니다. 아, 물론 그 전에 한국시리즈 우승은 반드시 이뤄내야겠죠. 저를 믿고 꾹 참고 있는 구단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말이죠, 허허.”

Arena Says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할 것 같은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를 연상시키건만 역시 최고의 승부사는 품새부터 남달랐다. 김경문 감독은 선수들의 훈련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서는 순간, 눈빛부터 매서워졌다. 더그아웃에 들어서자마자 배팅 연습을 하는 한 선수의 잘못된 자세를 단번에 잡아내더니, 심지어 10m는 족히 떨어진 곳에서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의 흐트러진 호흡까지 대번에 지적하는 게 아닌가. 역시 ‘한국 최고의 감독’이라는 수식어는 아무에게나 붙는 게 아니라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구단 사무실 한복판에 걸려 있는 액자 속 글귀, ‘Hustle Doo!’라는 슬로건은 김경문 체제 이후 두산 베어스가 최고의 야구단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를 압축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너네’들 마음대로 뛰어놀라고 자리를 마련해주고,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모든 건 내 탓’이라고 감싸주는 감독이 있는데 그 어떤 선수가 과감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Profile 1982년, 당시 최고의 명문 구단이었던 OB 베어스에 입단한 뒤 1990년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기까지 줄곧 ‘안방마님’으로 그라운드를 누벼왔다. 1년 후 다시 컴백해 선수 생활을 마친 뒤 지도자로 전향, 두산 베어스에서 코치와 감독을 연달아 맡는 등 팀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올여름, 가슴 뛰는 베이징의 신화를 창조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야구 감독으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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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보리
Photography 신호준
Set Styling 노제향
Feature Editor 박지호
Fashion Editor 민병준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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