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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입과 귀

김영하의 <퀴즈쇼>를 읽다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문장에 눈길이 갔다. `교회나 성당은 사랑에 빠지기 좋은 곳이다. 여자들은 평소보다 다소곳하며 남자들은 평소보다 의젓하다.` <br><br> [2008년 11월호]

UpdatedOn October 21, 2008

김영하의 <퀴즈쇼>를 읽다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문장에 눈길이 갔다.
‘교회나 성당은 사랑에 빠지기 좋은 곳이다. 여자들은 평소보다 다소곳하며 남자들은 평소보다 의젓하다.’
특별한 수사도 없는 이 문장에 공감돼 활자에 눈을 박고 가래 낀 늙은이처럼 킬킬댔다. ‘사랑에 빠지기 좋은 곳’이라는 단호한 표현에 그랬고, 평소보다 다소곳하고 의젓해질 수밖에 없는 중고등학생의 감춰진 속성을 재단한 그의 칼끝에 감탄하여 그랬다. 누구나 생각하고 누구나 본다. 하지만 그걸 찌꺼기 하나 딸려 올라오지 않는 최고 셰프의 칼날처럼 깔끔하게 표현하진 못한다. 그게 말이 아니라 글일 때는 더더욱.
그래서 난 이런 문장을 좋아한다.
일명 땟국물 뺀 문장.
포 떼고 장 떼고, 빨고 또 빨아서 땟국물 하나 없는 단정한 결론형. 거기에 관찰자로서의 필자가 가진 명료한 관점. 관점이 명료하지 않으면 문장은 공중을 부유한다. 가벼운 수사들이 문장에 날개를 달아주는 거다,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단호함에 대한 호의는 비단 문장에만 속한 건 아니다. 옷에도, 음악에도, 심지어 살림살이에서도 그러하다. 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나 레이 가와쿠보보다 이브 생 로랑이나 헬무트 랭의 단호한 라인이 좋다. 변덕스런 여자의 울음소리처럼 변형 코드로 훌쩍대는 알앤비 발라드보다 C, F, A 세 코드만으로 진행되는 록발라드의 남성적 울림이 좋다. 당연히 유머가 담긴 필립 스탁의 변형된 살림살이보다 이음매를 최소화한 이름 모를 핀란드의 세간살이가 좋다. 변조는 기본이고 코드가 많은 노래는 남녀 간의 사랑에 읍소하고, 퉁퉁거리며 내뱉는 단조로운 코드의 노래는 인생사를 말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울림 자체의 통이 큰 건 그래서 기교가 아니라 기본이다. 기본이라는 건 개개인의 확신과 철학이다. 그 역시 세월을 먹고 자라기도 하고 풀 죽기도 하지만. 그건 생로병사처럼 자연스런 일일 뿐이다.

책을 만드는 일은 집단의 단호한 확신을 월별로 기록하는 일이다. 사람의 확신이 월 단위로 표현된다는 건 때론 설익어서 때론 방창해서 때론 표현의 시간이 부족해서 위험하다. 단정하고 단호하게 의지를 집약하고 싶은데 말이다.
그래서 책 만드는 우리에겐 ‘입’이 필요하다.
검열과 검증의 말들을 귓불에 주렁주렁 매달아줄 솔직한 ‘입’이 필요하다.
그게 당신들이다.
그래서 이달 <아레나>는 당신들 안에서 ‘객원 마케터’라는 다소 거창한 타이틀의 ‘입’들을 솎아냈다. 점조직을 키워 수많은 문장들을 물어다줄 입들 말이다. 객원 마케터들이 1기를 넘어 2기가 되고 3기가 되고 10기, 20기가 되도록 <아레나>의 ‘귀’와 그들의 ‘입’이 닫히지 않기를, 그리하여 <아레나>의 ‘지금 철학’보다 ‘내일 철학’이 더 단호해질 수 있기를 기대했기에 벌인 일이다.


감기에 걸렸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 특히 이른 아침 바람에 든 감기임에 틀림없다.
물 없이 가루약을 삼킨 것처럼 눈이 시큰대고 기침이 사정없이 나면서 코에서는 숨을 삼킬 때마다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감기 바이러스가 슬쩍 몸에 올라타면, 바람처럼 이런 생각이 스친다.
아무 말도 말자.
그저 많이 듣자.

그래도 통할 사람들은 서로 다 통한다.
기자들을 거리에 내몰고 길거리의-그것도 지역을 5군데나 콕 집어주고-20대 후배들을 만나서 일대일 인터뷰를, 절대 사전 섭외 없이 해오라고 했을 때 확신이 있었다. 자막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스폰지하우스의 20대 청년들에게, 홍대 앞 카페에 삼삼오오 모여 소규모 전시 프로젝트를 논하는 어린 예술가들에게, 가로수길이 돈에 점령당하는 게 싫다며 호외보를 제 돈 들여 만들고 있는 젊은 선동가들에게 말이다. 그들이 들려줄 우회하지 않으며 치장하지 않은 문장들이 주는 공감과 자극에 대한 확신.

기자들에게 말을 접고 듣기만 하라고 했다.
주가가 붕괴되고 환율이 오르고 펀드가 반 토막 나고 자살자가 속출했대도 살 사람은 살아서, 그것도 누구보다 신나게 살아서 또 한 해를 즐겨내는 게 정답인 때이므로. 그들 청년들의 명쾌한 문장이 필요했다.
그들은 곧 우리의 독자들이었고
그 독자들은 우리의 귀를 열어 기를 주었다.
여로 모로 고맙다.
책을 사주고
책을 봐주고
책에 등장해주고
책 만드는 영감이 되어주니 말이다.
길에서 통한 사람들끼리
책으로 통한 사람들끼리
남은 날들도 잘해보자.

p.s 홍대 앞에서, 가로수길에서, 테헤란로에서, 경희대와 외대 도서관에서, 스폰지하우스에서 <아레나> 기자들이 건넨 불의의 인터뷰 제의(꽤나 난감하지 않았을까?)를 받았을 그대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당신들이 건넨 활어처럼 싱싱한 말들은 208페이지에 실려 있다.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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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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