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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밖에 할 게 없었다는 이 남자

보다 보다 “솔직히 재수가 좀 없나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배우는 또 처음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그 문장을 발화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배우` 김태우가 말이다.<br><br>[2008년 10월호]

UpdatedOn September 24, 2008

Photography 보리 Editor 박지호

뭐,그냥 처음부터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하자. 괜히 아까운 지면 낭비해가며 말을 빙빙 돌릴 필요가 있겠나. 나, ‘배우’라는 타이틀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부 그룹에 불만이 많다. 그 시작이 누구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에는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한 교본’이라는 정체 모를 유령이 떠돌기 시작했다. 사생활을 절대 노출시키지 말 것, 활동을 쉬는 동안에는 외부에 모습이 노출되지 않도록 꼭꼭 숨을 것, 항상 지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노력할 것, 무엇보다 인터뷰 때 ‘작품’ 이야기만 할 것.

맞다. 외국의 경우만 봐도 꼭꼭 숨은 채 살아가다가 작품에 임할 때만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대배우들 많다. 하지만 그들은 스타가 아닌, 배우의 길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CF든, 사회봉사 활동이든, 심지어 단란한 가정 생활까지 연기에 방해가 된다고 느껴지면 철저하게 배격하는 일도 흔하다. 이쯤에서 연기 재개를 위한 재충전을 CF 촬영과 동일시 여기는 일부 ‘대한민국 배우’들, 뜨끔해야 할 거다.

그렇다고 그 ‘지적’인 이미지를 활용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암살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미국 정부에 맞서 ‘반전 평화’를 주창하는 팀 로빈스, 어느덧 본업인 연기보다는 ‘환경운동가’라는 타이틀이 더욱 익숙해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등은 완벽한 지성으로 무장한 배우가 자신의 영역을 어디까지 넓힐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관객들에게 ‘인간 김태우’에 대한 정보는 실오라기만큼도 알려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야만 순수하게 내가 연기한 그 캐릭터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맘먹고 단단히 따져 묻고 싶었다. 도대체 대한민국에서 ‘배우’라는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이다. 하필 레이더에 포착된 이가 바로 김태우였다. 물론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전혀 없다. 올가을부터 세 편의 영화가 줄줄이 개봉하는 탓에 어쩌다 보니 인터뷰 일정이 딱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가 누군가. 그 유명한 홍상수 감독이 가장 총애하는 배우이며, 다른 건 몰라도 지적인 이미지만큼은 대한민국에서 수위를 다투고, 결혼한 지 8년이 지났건만 공개석상에서 단 한 번도 아내와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 없으며, 동년배 배우들 중 거의 유일하게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특한 빛깔까지 지녔다. 뭐, 치졸해 보일까 싶어 굳이 덧붙이지 않으려 했지만 빈틈이 전혀 없어 보이고, 지나치게 반듯하며, 인생에 큰 굴곡도 없었을 것 같은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들)’의 조건까지 완벽히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 남자, 강적이다. 전혀 ‘연예인’답지 않은 헐렁한 옷차림에 배낭 하나 덜렁 둘러메고 매니저도 대동하지 않은 채 촬영 시간에 정확히 맞춰 스튜디오에 들어오더니 모든 스태프에게 정중하게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메이크업을 받기 전,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방금 점심을 먹었다며 배낭에서 칫솔을 꺼내 정성스레 이빨까지 닦는다. 공들여 메이크업을 해주는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나. 순간 스튜디오 안의 여자 스태프들의 눈에는 하트 문양이 그려지고, 남자 스태프들의 팔뚝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 남자, 정말 만만치 않다.

당신은 공개석상에서 절대 사생활을 언급하지 않는 대표적인 배우 중 한 사람이다. 너무 까다로운 것 아닌가? 개인적인 비밀이나 스캔들을 캐겠다는 것도 아니고 김태우라는 배우를 더 잘 알기 위해 실제 생활을 조금 들여다보고 싶은 것뿐인데 말이다.

뭐, 꼭 숨겨야 할 대단한 비밀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난 지금껏 룸살롱 한 번 가본 적 없는 대표적인 ‘건전남’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생활조차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배우 경력에 마이너스가 되기 십상이다. 자, 당신이 오늘 인터뷰를 끝마치고 나서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치자. 나중에 내가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잔혹한 악역을 맡았을 때 오늘 얻은 이 호감이 영화를 보면서 단 1퍼센트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겠나? 관객들에게 ‘인간 김태우’에 대한 정보는 실오라기만큼도 알려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야만 순수하게 내가 연기한 그 캐릭터에만 집중할 수 있다. 내가 굳이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는 건 1차적으로는 바로 관객을 위해서다.

배우에도 여러 버전이 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과 가까이 호흡하며 일상생활에서 건져 올린 살아 뛰는 연기를 해내는 대배우들도 많다. 요즘 가만히 지켜보면 유독 새파란 배우들이 ‘배우는 영화 촬영이 끝나면 입을 딱 닫은 채 신비주의 콘셉트를 유지해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는 느낌이다.

그건 나도 불만이다. 특히 대규모 기획사에 소속된 젊은 배우들이 의도적으로 신비주의 콘셉트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사무실에서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일부러 그렇게 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배우라는 것이 현실에 발 딛지 못한 채 고결하게 공중에 붕 떠서 살아가는 존재여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어찌 보면 배우로서 내 능력이 부족해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처럼 한눈에 사람들을 사로잡는 뛰어난 외모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락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을 미치도록 웃게 만드는 능력도 없다. ‘입양’이라는 고귀한 행동을 통해 사람들을 감화시킬 만큼 통이 크지도 못하다.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연기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에너지가 부족해 숨이 가쁠 때가 많다. 에너제틱의 대명사인 누구처럼 극과 극을 넘나드는 연기 변신을 휙휙 해 낼 자신도 없으니 ‘배우 김태우’를 여백이 많은 흰 종이로 남겨두는 것이 최선인 거다. 관객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내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당신이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직업 중에 ‘배우’를 선택했는지 궁금해졌다. 어릴 때부터 배우의 끼가 넘쳐났던 건가?

하하. 설마.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난 낯을 심하게 가리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지금도 별로 잘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는 더 심했다. ‘멍게’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얼굴이 여드름투성이였으니까.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문득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가야 하나,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대충 2개월 정도 무척 심각했던 것 같다. 그때 문득 ‘배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배우라는 직업이 매력적으로 보였고, 많은 걸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아버지는 식사를 하시다 말고 숟가락을 집어던지며 고함을 질러대기까지 했다. “너처럼 못생긴 아이가 잘도 배우가 되겠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중에 대학에 진학해 연기를 전공하면서부터는 나만의 가치관이 더 확실히 굳어졌다. 다른 것 욕심내지 말고 내 페이스를 지키며 ‘마이 웨이’를 걷자는 것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생활 드러내지 않기’도 이때 확립된 원칙 중 하나다. 나는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좋은 작품을 보았을 때 감동을 받지, 한 배우의 톡톡 튀는 연기를 보고 가슴이 저려오지는 않는다. 가장 훌륭한 배우는 그 작품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하는 거다. 배우 혼자 튀면 영화를 망치기 십상이다. 뭐, 이런 원칙이 서서히 몸에 배기 시작했던 거다.

단순히 배우라는 직업을 ‘연기에 대한 열망’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명배우라 할지라도 사람일진대 인기나 명예에 대한 갈망,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돈에 대한 욕심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을 텐데.

흐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나, 솔직히 지금도 돈은 벌 만큼 번다. 물론 독하게 마음먹으면 훨씬 더 많이 벌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단순히 CF 몇 편 찍고 말 거라면 이 고단한 직업을 뭐하러 택했을까. 지금 당장 몇 푼 더 버는 것보다 연기에 더욱 몰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 거다. 결국 나에게 들어오는 작품이 더욱 다양해지고 많아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혹시 주변 사람들이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이야기하지 않나? 특히 남자들이 말이다. 너무 똑 부러지는 타입이다. 아까 메이크업을 받기 전, 열심히 이빨을 닦는 걸 멀찌감치서 지켜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더랬다.

솔직히 그냥 툭 터놓고 이야기해도 된다. 그 말은 같은 남자로서 무척 재수가 없다는 뜻 아닌가?(웃음) 뭐, 나도 대충 안다.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다. 그냥 생각한 그대로 기사에 써도 된다. 어차피 난 인터뷰 기사의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영화 속 내 모습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만 유일한 관심거리니까. 사실 요즘 조금 고민이 들긴 한다. 무섭다, 냉랭하다,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부쩍 많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운 후배들에게 물어봤더니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더라. “몰랐어? 형 앞에만 서면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보이질 않아서 무시무시할 정도야. 가끔 멍하니 딴 곳을 바라보는 형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멀어 보일 수가 없어.” 이런, 잘 들여다보면 나, 그렇게 냉랭한 놈 아닌데. 에잇. 그냥 나만 잘하면 되는 거지, 뭐.

“그 말은 같은 남자로서 무척 재수가 없다는 뜻 아닌가?(웃음) 어차피 난 인터뷰 기사의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영화 속 내 모습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만 유일한 관심거리니까.”

하하.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툭 터놓고 물어나 보자. 남자들이 당신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당신을 보면 왠지 모르게 굴곡 없이 평탄한 인생을 살아왔을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이질감이 생긴다는 뜻이다.

맞다. 별다른 노력 없이 평탄하게 일이 술술 풀렸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다. 반포에서만 학교를 다녔던, 흔히 말하는 강남 8학군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더더욱 그런 편견을 갖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신은 잘 모르지 않나. 고등학교 때 “이해를 못하겠어? 그럼 외워. 무조건 시험에 나오니까”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교사 밑에서 얼마나 큰 절망감을 느껴야 했는지. 당신은 모르지 않나.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연극 주연을 맡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무대까지 걸어 나가는 걸 도저히 하지 못해 한 달이 넘도록 집에도 못 들어가고 무대 위로 나갔다, 들어왔다만 그야말로 수억 번 반복했다는 것을. 당신은 이것도 모르지 않는가. 방송국 공채 탤런트로 뽑혔을 때 다른 동기들보다 매일 2시간 먼저 나와서 연습에 몰두했다는 것 말이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열심히 하지 마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이왕 할 거면 죽기 살기로 해야지. 그렇다. 내가 지금껏 힘들게 살아왔던 이유는 내 능력보다 욕심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음이 왜 이 모양일까, 얼굴은 또 왜 이렇게 평범할까, 연기력은 왜 여기서 멈춰 있을까 등 나의 콤플렉스는 노력만 하면 충분히 나아지는 것들이었다. 배우는 부족함을 오히려 장점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묘한 직업이라는 것을 지난 세월 동안 체득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반듯해 보이는 당신과 극단에 위치한 단어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바로 마약, 섹스 그리고 자살이다.

그런가? 솔직히 마약은 아예 해볼 기회조차 없었기에 잘 모르겠고, 섹스는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것 아닌가? 아니, 남자건 여자건 섹스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만약 싫어한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지. 자살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흔히 우리는 그 사람이 나약했던 거라고, 죽을 용기로 살아갔으면 되었을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죽음 또한 삶의 연장선이고, 사람은 누구든 순간순간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티베트, 그루지아와 같은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나?

흐흐. 혹시 나의 지식 수준을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인가? 그 옛날 앵글로색슨족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디언을 몰아냈던 것과 똑같은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지금의 세계는 철저히 힘 있는 자의 편이다. 티베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지만 유엔에서 적당히 항의하는 척만 하다가 결국 올림픽이 열리고 나서는 모두 잊히고 말았다. 이런 사례는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거다. 따지고 보면 미국산 수입 쇠고기 개방 사태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약소국인 우리나라가 미국의 요구에 철저히 굴종한 것이 핵심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나라에서는 당연하게 따내는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 금지 조항까지 덜컥 넘겨준 건 너무하지 않았나 싶다.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외국 유학으로 빠져나가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영어 몰입교육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대안을 내세우고, 사교육을 공공연히 조장하는 정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이제 그만하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머리가 다 지끈거릴 정도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아까 “솔직히 제가 재수가 좀 없나요?”라고 묻는 순간부터 느닷없이 당신이 가깝게 느껴졌다면 어떻게 할 건가?(웃음)

아, 어차피 난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기사를 쓸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니까.(웃음) 가능하면 당신도 이 인터뷰가 끝나는 순간 나에 대한 인상이나 평가를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새하얀 백지장과도 같은 상태에서 내가 등장하는 영화를 감상해주길 바란다. 그게 바로 배우 김태우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자 격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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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Photography 보리
Editor 박지호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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