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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색일기(四色日記)

누구는 그녀와의 짜릿했던 섹스 횟수를 적고, 누군가는 구상 중인 SF 소설의 시놉시스를 그려 넣기도 한다. 아, 물론 가계부로 활용하는 이도 있다. `일기(日記)`란 그날그날 떠오른 단상을 끄적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다. <br><Br>[2008년 7월호]

UpdatedOn June 22, 2008

illustration 차민수 cooperation 열린신경정신과(www.openwide.co.kr) cooperation 강한 피부과(www.kangskin.co.kr)

문득, 정신과에 가보고 싶어졌다

내 평생 정신과와 인연이 있을까 싶었다. 신경정신과라 하면 알코홀릭, 우울증, 자살 시도 등
암울한 단어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은…. 나쁘지 않았다.
당신도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방문해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Editor 박지호

내 나이 어느덧 서른 중반. 이제 나도 청춘의 고개를 넘어 슬금슬금 내리막길로 향하고 있구나 하는 회한이 느껴질 때가 가끔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새벽녘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일 수 없다는 것(체력이 안 되니까), 비좁은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라면을 시켜 먹으며 킬킬거릴 수 없다는 사실(어릴 때는 그렇게도 편안했던 낡은 소파가 이제는 어찌나 허리를 아프게 하는지), 무엇보다 절친한 선배 하나가 술에 취한 채 내뱉었던 “흐흑. 이제 야근을 조금만 심하게 하면 그곳이 꼼짝도 하지 않아”라는 멘트가 조금씩 이해가 가려고 할 때(오, 마이 갓! 그냥 ‘몬 말인지 알 것 같다’는 것뿐이다) 말이다.
뭐, 굳이 자위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도 나는 어설펐던 지난 20대보다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이 훨씬 좋다.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돈을 벌며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근사한 일이다.
하지만 직장 생활 9년차에 이른 요즘, 마음 한구석에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남는 게 사실이다. 남들은 용케 잘리지도 않고 회사 잘 다닌다며 대견해하지만 서른 중반을 넘어선 지금, 돌이켜보니 나에겐 남은 것이 거의 없다. 아파트 전세금도, 든든한 미래 설계도, 직장에서 확고한 위치도. 모두 불안하기만 하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요즘 들어 부쩍 불면증에 시달리는 밤이 많아졌다. 지인들과 차를 마시다 느닷없이 후회스러운 과거사 한 토막이 떠올라 대화 흐름을 끊기 십상이고, 늦은 밤 집에 홀로 앉아 TV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뭐, 직장 생활이건 개인사건 괴로울 땐 역시 선배를 찾아가는 게 최고다. 선배는 영원한 ‘후배의 봉’이니까. “이것저것 재지 말고 아무하고나 결혼해버려.” 이런 무성의한 조언은 그냥 패스. “내 손 꼭 잡고 교회에 같이 나가자. 주님의 은총 덕에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다.” 이런, 젠장. 당신 한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야!’라고 내게 침 튀겼던 그 사람 맞아? “우리 사촌 오빠가 신경정신과 의사인데 한 번 찾아가볼래? 그냥 대화만 나눠봐도 도움이 돼. 아니, 왜 ‘미드’ 같은 데 보면 외국 사람들은 다 정신과 주치의가 있잖아.” 빙고. 그래, 바로 이거다.
솔직히 내 평생 정신과에 갈 일이 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자살, 우울증, 알코홀릭 등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라는 편견이 있었던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선배의 권유를 받자마자 왠지 모르게 한 번 찾아가보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공짜로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고 했으니까. 1시간 동안 대화만 나눠도 진료비로 몇만원씩 청구된다는 풍문을 들었던 터라 더욱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마침 병원 근처에 사무실이 있는 친구가 있어 동행하기로 했다. 제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우군이 있으면 든든한 법이니까. 평소 유쾌 발랄하기로 유명한 친구 녀석이 먼저 검사실로 들어갔다. 그 이름도 거창한 ‘HRV(스트레스 정도)’ 검사라고 했다. 10분 넘게 양쪽 손과 다리에 전극을 부착하고도 희희낙락하던 친구는 검사가 끝나자마자 의사와 상담을 하기 위해 진료실로 들어갔다. 조용히 검사 결과를 뽑고 있던 간호사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저 분 보호자이신가요? 상태가 심각하네요.”
움찔했다. 평소 친구들 모임에서 항상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주도하던 그는 우울증은커녕, 스트레스 한 조각 없을 것 같은 녀석이었다. 이어지는 간호사의 말. “평상시 스트레스를 안고 사는 탓에 교감신경이 많이 상하셨네요. 지금은 두통이 있고, 소화 계통이 잘 작동하지 않거나, 허리가 좀 아픈 정도겠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심장 근육에도 이상이 생길 수 있어요. 두뇌 활동에 문제가 생기는 건 물론이고요. 약 좀 드시면서 자율신경계를 조율해야겠는데요.”
차마 친구 녀석에게 상담 결과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궁금한 마음에 그냥 직접 의사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현대인의 60%가 미세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친구 분이 특별한 게 아니에요. 방치해두면 약물 치료를 해야 하는 단계까지 가버리게 되죠. 며칠 전에 제가 직접 받아본 검사 결과와 비교해볼까요? 그래프를 보면 ‘순간 스트레스’는 제가 훨씬 더 높죠? 먹고 사는 건 쉽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환자들의 하소연을 듣고 있노라면 뒷골이 당겨올 정도로 열받을 때가 많거든요. 왜 하필 이런 직업을 선택했을까 하고요.(웃음) 다만 저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자, 선생님은 어떠신지 한 번 알아볼까요?”
의사의 말투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친구와는 달리 나는 의사의 나지막한 질문에 내 생각을 답하는 ‘PAI(우울증 정도)’ 검사라는 것을 받았다. 정확히는 내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는 지난 기억을 일깨우고, 지금 나를 가장 답답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를 복기하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의사의 질문에 수동적으로 “예, 아니오”로 대답했다. 하지만 편안하게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다 보니 슬금슬금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결국엔 의사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렸을 때 약속 장소가 어긋나 가족들이 나만 남겨두고 고기를 먹으러 간 적이 있어요. 착각한 건 부모님이었지만 나만 된통 혼나고 말았죠. 억울한 감정이 꽤 오래갔던 것 같아요. 몇 년 동안이나 당시만 떠올리면 가슴이 아릿할 정도로 억울했으니까요. 참, 내가 지금도 고기 먹을 기회를 놓치면 유독 억울해하는 건 유년기의 트라우마 탓인가요?”
다행히 내 트라우마의 근원이 ‘고기’였던 것은 아니다(만약 그랬다면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엄격했던 집안 분위기 탓에 할 말을 무조건 꾹 참고 자랐기에 큰 고민이 생겨도 혼자 끙끙대는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것이란다. 스트레스에 민감하고, 남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는 걸 싫어하며,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이를테면 프레젠테이션 발표장)에 서면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은밀한 내면 심리까지 의사는 모두 파악해냈다. 의사의 말투가 다시 유쾌해졌다.
“뭐, 선생님의 케이스는 아주 일반적입니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스스로 모든 걸 판단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존심이 무척 셉니다. 다만 이 자존심이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되죠. 문제를 알았으면 이제부터 풀어 나가면 됩니다. 믿을 만한 사람 누구에게라도 조금씩 속을 털어놓아보세요.”
너무나도 감동을 받아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렸다면 솔직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진 건 사실이다. 여기까지 읽어내려온 당신, 정신과에 한 번 가보시지 않겠는가? 원한다면 내가 한 번은 손잡고 데려다줄 수도 있다. 그 의사, 내가 데려온 환자에게는 첫 진료비를 받지 않겠다고 하더라. 물론 나에게 떨어지는 ‘뽀찌’ 따위는 절대로 없으니 의심 따위는 품지 않으셔도 좋다.

황색 잡지를 추억하다

황학동 벼룩시장에서는 희자매의 낡은 LP판도, 손으로 채널을 돌려야 하는 낡은 텔레비전도
구할 수 있다. 헌데 그곳에서 우연히 낡은 잡지 하나를 발견했다.
Editor 이기원

주거지와 비교적 가깝다는 점, 소품을 구한다는 이유 등으로 황학동을 자주 배회한다. 그날도 촬영용 소품을 구하기 위해 골목골목을 이 잡듯 뒤지고 있었다. 발품만 잘 팔면, 운 좋게 보석들을 발견할 수도 있는 곳이 황학동이다. 청담동의 명품 매장에는 없는 아주 소소한 즐거움이 묻어 있는 것이다. 한참 걷는데 걸인처럼 보이는 어떤 남자가 멍석을 깔고 이런저런 물건들을 꺼내놓는 광경이 보였다. 뭔가 싶어 봤더니 옛날 잡지들이었다. 바닥에 깔린 수십 권의 책들 사이에는 <보물섬>류의 소년 만화지, <선데이서울> 같은 성인지, 심지어는 초창기의 <보그> 같은 패션 잡지들도 눈에 띄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기웃거리는데 화들짝 눈이 커졌다. 그 속에 오래된 포르노 잡지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그렇게 된 건지도 알 수 없는, 표지까지 뜯겨 나가 너덜너덜한 그 책의 페이지들 사이에선 가슴이 풍선만 한 백인 미녀들이 약이라도 한 듯 퇴폐적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종이 질이나 사진의 퀄리티는 요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남루했지만 나는 오래전에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는 심정이 되어 그 책을 불쑥 집어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아이가 어디서 나올까?’라는 질문에 ‘컴퓨터에서 다운받는다’라고 대답한다지만,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에스, 이, 엑스라는 단어만 들어도 얼굴이 울긋불긋 꽃대궐이 되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봤던 포르노의 콘셉트는 백설 공주였다. 아름다운 백설 공주는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왕자의 도움을 기다리는 대신, 싸구려 분장을 한 일곱 난쟁이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상대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키치적인 설정이었지만, 그때야 누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성숙한 여체의 아름다움과 질퍽한 성행위는 성장기 남아에게는 꽤나 ‘꼴릴 법한’ 일이었다.
이후 학년이 조금씩 올라갈수록, 반에는 항상 소위 ‘장 뽀르노 반담’ 식으로 불리던 공급책들이 생겼다. 대체 어디서 저 방대한 라이브러리를 수집해오는 건지 궁금할 정도로 녀석들은 잡지며, 비디오테이프를 싸들고 오곤 했다. 물론 나 역시 그 가련한 어린 양 중의 하나였다.
한낮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서 다시 보는 누런 잡지들은 독특한 쾌감을 선사했다. 너무 쉽게 가져서 더 재미없는 것들, 너무 쉽게 볼 수 있어서 오히려 더 무감각해진 포르노물의 진정한 매력이 거기 있었다. 상인에게 5천원을 주고 산 그 책을 집에 안고 가면서 느꼈던 흥분은 어린 시절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 시절이 너무 그립다는 말이나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제 막 생식기가 거뭇거뭇해질 소년들은 이런 추억을 더 이상 갖지 못할 것이다. 녀석들은 텔레비전 화면을 코앞에서 봐야만 했던 흥분과, 부모님에게 들킬까봐 음량도 최소한으로 맞춰놓고는 언제라도 비디오 데크의 전원을 뺄 준비를 하면서 보는 스릴을 모른다. 쉽게 볼 수 있고, 또 쉽게 버릴 수 있으니까. 그날 밤 나는 야릇한 상상 대신 아주 편안한 자세로, 낄낄거리며 그 잡지책을 뒤적였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애초부터 발 냄새의 원인이 거울에 비친 거대한 내 모습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면 호들갑 떨지 않았을 거다.
그것도 모르고 난 계속 발만 바라보고 있었다.

Editor 성범수

내 몸 최하단부 그러니깐 접지면에서 이상 징후가 포착된 건 재작년 겨울쯤이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난 어디서든 당당하게 신발을 벗을 수 있었고, 발 냄새로 공간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놀림거리로 만들 수 있었던 승리자의 입장이었으니까. 하지만 불행히 내게도 발 냄새가 강림했다. 그후 내 주변의 모든 역한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라도 시달리듯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음식점에선 위풍당당할 수 없었다. 구수한 청국장집이라면 환영이었지만. 책상에 앉아 발 밑의 분위기를 자주 탐색하고, 지하철같이 줄줄이 앉아 있어야 하는 곳에선 다리도 꼬지 않았다. 상대방의 코와 내 발을 멀리하는 것, 그게 내 치부를 들키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물론 항균 샤워폼을 사용하며, 땀과 반응해 냄새를 만들어내는 세균을 제거하는 데도 열을 올렸다. 해결할 수 있을 거란 큰 기대는 없었지만 효과가 전무한 듯 보였다.
갑자기 찾아온 냄새의 원인을 찾는 게 중요했다. 난 원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아니, 사실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원인을 찾아 나선 병원에서 수술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극단적인 선택을 원했기 때문이다. 신림동에 위치한 강한 피부과의 한충섭 원장은 밀폐된 발에서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나를 달랬다. 이 모든 수난과 근심의 시대를 끝내고 싶어하는 내게 그는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면 수술을 택해서 안 된다고 말했다. 신경 차단 수술을 받으면, 수술 후 신체 다른 곳에서 땀이 증가하는 보상성 다한증이 유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땀 때문에 보송한 피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인데, 수술을 통해 땀을 차단하면, 메마른 피부로 인해 쓰라린 고통이라는 부작용을 얻을 수도 있다는 거다. 시술을 받은 환자 일부는 차라리 발 냄새가 났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불만을 토로할 정도라고
한 원장은 설명했다.
수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한 내게 그는 드리클로라는 다한증 치료제를 권했다. 드리클로는 자기 전에 발이나 겨드랑이같이 땀이 많이 나는 곳에 바른 후 아침에 일어나 씻어버리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 하는 제품이다. 난 상담을 마치고 곧장 드리클로를 구입했다. 처방전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약품이라는 건 부작용도 없다는 거겠다. 조금 따가울 수 있다는 주의가 있었지만, 내겐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발을 씻고 회사로 향했다. 그날 하루 난 특별한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고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되다니 좀 허무했다. 하지만 문제는 매일 밤 계속 발라줘야 한다는 귀찮음이었다. 난 다시 병원을 찾았다. 바르는 제품으로 치유가 안 될 경우엔 전기이온 영동요법이 차선책이라 들었으니까. 전기이온 영동요법은 발 냄새 치유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여겨졌다. 특히 별다른 부작용이 없다는 말이 마음을 흔들었다. 치료 효과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나 매일 20~30분씩 약 10회 정도 치료받으면, 대개 한 달 정도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실제 체험을 해보려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가장 약한 치료법인 드리클로를 사용하고도 효과를 본 입장에서 매일매일 바르는 게 귀찮다는 이유로 전기이온 영동요법을 시술받을 순 없었으니까. 그리고 몇 달 전 친분 있는 한의사에게 들었던 얘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뚱뚱해지면, 땀이 더 많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 내 몸에 살이 한창 붙기 시작하면서 발 냄새가 짙어졌다는 연관 관계를 그제야 알아챈 거다. 발 냄새에 대한 강박으로 ‘단시일 내 냄새 제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터라, 땀이 많아진 근본적 이유는 잊고 있었던 거다. 더운 여름날 주변을 둘러보시라. 체격이 큰 사람이 마른 사람보다 땀이 많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급성장한 몸의 크기가 원인이었다니, 마음 한편이 다시 무거워졌다. 얼마 전 역류성 식도염이란 병명을 받아들었다. 위산이 역류해 만들어내는 병으로 이것도 몸무게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치료를 위해선 다이어트를 하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종합검진에서 지방간과 콜레스트롤 수치에 대해 주의 경고를 받았다. 내 몸은 총체적인 난국이다. 딴 생각하지 않고 매일 밤 드리클로를 바르기로 했다. 잊지 않고 약을 바르는 것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하루살이 환경운동을 꿈꾸다

환경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고 싶었다. 환경보호를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장서고 싶었다.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처럼. 그러나 그건 마음뿐이었다.
나는 환경에 대해선 관대하지 못한 개인주의자니까.

Editor 이현상

우리 에디터들은 ‘환경문제’ 에 대해서는 거짓말쟁이임이 확실하다. 독자들에게 환경을 돌보자며 계몽 캠페인을 펼치고, 환경론자를 인터뷰한다. ‘로하스족’에 대해 열심히 설파하고 독자들에게 그렇게 하기를 권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환경에 대한 고민이 없다. 단적인 예로 지난봄 에디터들이 의기투합해 일회용 컵을 줄이자는 취지하에 맘에 드는 머그컵을 하나씩 구입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내 자리를 중심으로 반경 5미터 내에 그때 구입한 ‘명품’ 머그컵을 사용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나마 책상 위에 올라 있는 머그컵의 일부는 예쁜 폴 스미스 연필을 꽂아놓은 연필꽂이 신세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 지금도 내 책상 위엔 물을 떠 마실 때마다 가져다놓은 종이컵이 산더미고, 책상 옆 쓰레기통에는 열 글자도 채 쓰이지 않은 A4 용지가 수두룩하다. 빛 좋은 개살구다.
7월호 기획을 하던 도중 서울 환경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환경보호를 위한 그 어떤 것도 실천을 해보지 않은 나, 머릿속에 자극을 주고 싶었다. 내 책상에서 사라진 머그컵을 다시 되돌리고 싶었다. 영화제 기간 중 볕이 따스하던 어느 날 ‘1일 사표’를 내고 상암 CGV로 발길을 돌렸다. 사전 검색으로 보고 싶었던 다큐멘터리 몇 편을 골라 표를 구입해 자리에 앉았다. 팝콘을 먹는 시간까지는 괜찮았다. 간간이 넘어가는 콜라의 톡 쏘는 맛도 좋았다. 하지만 밋밋한 스크린에서 대화도 없고, 스펙터클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 건 곤욕이었다. 설령 대화가 나온다 해도 우리와 친숙지 않은 제3세계 언어다. 다섯 편의 영화 가운데 세 편을 졸면서 봤다. 암만 내용이 좋으면 뭐하나. 관객을 끌어들이는 스토리와 감동이 없는 것을. 환경 영화랍시고 몇 편을 감상한 후 나에게 남은 건 ‘환경영화제 콘텐츠’에 대한 불만 정도였다.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 또 쌓인 종이컵을 보고 문득 든 생각. ‘과연 종이컵 대신 머그컵을 사용하는 것이 환경을 위해 좋은 일인가?’ 종이컵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옳은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머그컵을 사용할 때 우리가 사용하게 될 주방 세제를 생각한다면 수질 오염 문제가 생긴다. 컵을 헹굴 때마다 주방 세제를 사용한다면 그 양도 무시 못할 테니까. 종이컵을 사용한다면 지금 당장은 쓰레기통으로 가겠지만 난지도에서 언젠가는 썩어 흙으로 돌아갈 테니 차라리 종이컵을 그냥 사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란 엉뚱한 생각 말이다.
비슷한 생각은 집에 돌아와서도 꼬리를 물었다. 현관문을 열고 싱크대 앞을 쳐다본 순간 보이는 일회용기로 만든 탑. 하루에 한 통은 마셔 없애는 2리터들이 제주도산 ‘생수’통, 갓 지어냈다는 맛있는 ‘일회용 밥’그릇, 태평양 심해에서 잡아 올린 참다랑어 캔, 잠이 안 와 홀짝대던 맥주 캔이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위태위태했다. 일단 우리 환경도 저렇게 위태로울 거란 생각이 들어 모조리 분리수거함에 내다 버렸다. 그것들을 줄이기 위한 방법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 ‘밥’을 해먹기로 한 것. 자취 생활 초기 구입한 1인용 일제 밥솥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밥을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밥 한 끼 먹기 위해 벌여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던 거다. 식재료를 구입하려고 해도 혼자 먹기엔 양이 많았고, 설사 찌개 하나를 끓인다 해도 다 먹지 못하고 버릴 것만 같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변기에 남은 찌꺼기를 버리는 건 수질 오염의 큰 주범이 될 게 분명하고. 밥솥은 고스란히 뚜껑 한 번 열리지 못한 채 다시 수납장 속으로 들어갔다. 이 또한 종이컵처럼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버렸다.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취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부모님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신기하게도 영화제를 다녀오고 3일이 지나자 환경 문제는 어느샌가 나의 고민 대상이 아니었다. 밀린 취재거리가 산더미였고,
만나서 술 마시고 놀아야 할 대상들이 줄을 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느라 되새긴 환경에 대한 고찰도 원고를 털어내는 순간 바로 잊히겠지. 역시 나는 환경 문제에 대해선 이기주의자가 맞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illustration 차민수
cooperation 열린신경정신과(www.openwide.co.kr) cooperation 강한 피부과(www.kangskin.co.kr)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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