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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돌려다오

골목은 단지 좁은 길이 아니다. 골목은 집 앞에 있다. 집 외에, 안전한 범위의 최소 영역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어야 한다. 정말 그럴까? ‘골목’조차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다리를 다치니, 약자가 돼보니 알겠다. 우리 사회의 수준이 맨살을 드러낸다.

UpdatedOn June 02, 2014

야구를 하다가 그만 십자인대가 찢어지고 말았다. 주말에 열린 사회인 야구 리그에서였는데 첫 번째 경기, 첫 번째 타석에서 사구(四球)로 걸어 나간 후 그만 사단이 났다. 만용의 결과였다.
당시 나는 한창 텍사스 레인저스 추신수 선수의 활약상에 푹 빠져 있던 차였다.

1번 타자로 선발 출전해 선구안이 좋은 추신수처럼 사구로 1루에 나간 나는 꼭 추신수가 된 것 같았다. 사회인 야구의 수준이라는 게 그렇다. 선수 출신이 아니다 보니 투수의 투구 컨트롤이 속된 말로 엉망진창이다. 사구를 얻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내가 선구안이 좋은 양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2루 도루에도 성공했다. ‘나는 추신수처럼 빠른 발을 가졌다’고 속으로 의기양양했지만 실상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사회인 야구 리그에서 포수가 2루로 제대로 송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2루 도루는 무조건 성공이라고 보면 된다. 우쭐했던 나는 우리 팀 선수의 짧은 중전 안타 때 2루에서 3루를 돌아 무리하게 홈으로 파고들다가 슬라이딩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것이다. 경기 시작 5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즉시 병원으로 가 MRI 촬영을 했고, 무릎 십자인대가 찢어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한 달 가까이 오른쪽 무릎에 보조기를 착용한 채 반(半)깁스 상태로 생활하고 있다. 움직이지 않고 안정을 취하면 좋으련만 일 때문에 마냥 그럴 수만은 없어 아무래도 집 밖으로 나도는 경우가 많다.

다리가 성치 않으니 외출해서 돌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모르겠다. 무릎에 오는 충격을 줄이겠다고 뒷좌석에서 다리를 펼 수 있는 택시를 이용하다 보니 교통비만 하루에 몇만원씩 깨지는 날이 허다하다. 돈 좀 아껴보겠다고 가까운 곳은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평소라면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이동하는 것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1kg이 넘는 보조기를 차고 다니니 걸음걸이가 급격히 느려질 수밖에 없어, 과장해서 말하자면 거의 도보 여행 수준이 된다. 더군다나 절뚝이는 모양새가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통 모습이 아닌지라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도 감내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런 시선이 못내 어색하고 20분 이상 걸어야 지하철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지만, 적응의 문제지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힘든 건 다른 부분이었다. 지하철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골목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 좁은 곳을 도로처럼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 때문이었다. 그전에도 자동차들이 골목을 활보했지만 인식하지 못하다가 다리가 불편해지자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시선이 바뀐 거다. 무릎이 성했을 때는 걸음걸이가 자유로워 쌩쌩 달리는 자동차를 무의식적으로 피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자동차가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피하기 위해 급하게 서두르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다.

사실 골목이라고 부르기도 좀 모호하다. 언제부턴가 바닥 위에 자동차들을 위한 안내 표지를 페인트로 칠해놓았고 동네 주민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동차들이 점령한 중앙을 피해 양 가로 다니기 시작했다. 자동차 두 대 정도가 간신히 다닐 수 있는 폭이다 보니 아찔한 사고도 종종 일어나고는 했다. 동네에 꼬마들이 많은 편인데 슈퍼마켓에서 군것질거리를 구입하고 기쁜 마음에 문밖으로 뛰어나오다가 지나가는 자동차에 치이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놀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위험이 내게 닥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더 정확히는 골목을 질주하는 자동차들에게서 내가 위협을 느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모든 운전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몇몇 급한 운전자는 보조기를 찬 다리 때문에 걸음이 느려 잘 피하지 못하는 내게 경적을 울리거나 옆으로 스치듯 위협하며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욕이 목까지 차오르다가도 내가 마치 도로 한가운데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등골이 오싹해진다. 습관처럼 골목이라고 부르지만 자동차도로나 다름없는 동네를 걸으면서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반문하게 된다. 더군다나 아래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런 위협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위협을 목격하면, 아니 겪으면 정말 할 말을 잃게 된다. 사실 나야 얼마 지나 보조기를 풀면 큰 문제는 없을 테지만 아이들은 좀 다르지 않나.

아이들에게 골목은 놀이터 같은 곳이다. 우리 동네처럼 주택이나 빌라가 밀집한 곳은 아파트처럼 따로 놀이터가 없어 골목에 나와 노는 아이들을 종종 목격한다. 남자아이들은 공을 차거나 자전거를 타는가 하면 여자아이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만면에 웃음을 꼬리처럼 단 채 서로 잡겠다며 뛰어다닌다. 부모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거나 줄넘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꽤 흐뭇해지기까지 한다.

나의 유년 시절과 비교해 골목에서 노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이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광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워낙 자동차들이 골목을 차도처럼 달리다 보니 아이들이 오랜 시간 골목에서 놀지도 못할 뿐더러 그런 위험을 잘 알고 있는 부모들 역시 자식들에게 바깥 활동을 웬만해서는 자제시키는 것이다. 그런 환경을 개선해야 하는 건 어른, 그중에서도 부모들이지만 어찌된 건지 그들이 도리어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건 아닌지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 계기가 있었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택시를 잡으러 골목과 연결된 도로로 나가던 중 공놀이를 하는 남자아이들을 보게 됐다. 공이 내 쪽으로 흘러왔는데 평소 같았으면 헛다리짚기 스킬로 아이들 앞에서 개인기 좀 자랑하다가 돌려줬을 텐데, 다리 때문에 그러지를 못했다. 반대편에서 공을 줍겠다고 아이들이 내 뒤의 공을 가지러 오다가 신경질적으로 울린 자동차 경적 소리에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내 눈을 의심한 건 그 자동차의 뒤 유리에 붙은 스티커였다. ‘아이가 타고 있어요.’

아이를 보호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아이를 위협하는 건 대체 뭐하는 짓인가 분노하는 것도 잠시, 결국 이것이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만감이 교차했다. 세월호 참사 때문에 더 그러했다. 아이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어른들이 자신만 살겠다며 아이를 희생양 삼는 부조리는 그저 진도 앞바다만의 상황이 아니었다. 좁은 골목조차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지 못하는 어른들의 이기심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를 침몰하는 배로 만든 결정적 원인이 아니었던가.

사실 골목을 아이들에게로 돌려주는 것,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의외로 쉽다. 자동차를 골목 안까지 몰고 오지 않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빨리 빨리’ 문화로 대변되는 한국적인 상황에서 이에 동참할 이가 얼마나 될까. 약간의 불편조차도 감내하기를 꺼리는 게 작금의 어른들이 보이는 이기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아이들을 볼 면목이 없다.

기업은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겠다고 계속해서 자동차를 생산하고, 정부는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며 안전에 대한 배려 없이 자동차 생산 관련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뿐인가, 남들 다 갖는 자동차 나도 갖겠다며 경쟁적으로 구입하다 보니 도로에서 제 속도를 낼 수 없어 골목으로 들어오는 차량이 하나둘 늘기 시작하고 그 결과, 골목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대가를 아이들이 받아야 하는 이 악순환의 구조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나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더더군다나 자식도 없지만 이 사회의 기성세대로서 생명을 위협받는 아이들을 보며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문명의 이기(利器)에 눈멀고 귀 닫은 이기(利己)적인 어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이번 세월호 참사나 지하철 2호선 추돌사고로 증명된 바, 우리 사회의 안전 불감증은 거의 제로 상태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안전한 사회를 조성할 수 있을지 막막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전 국민이 경각심을 갖고 하나하나 고쳐 나아가야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절실하다. 어떻게? 우리 주변을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작은 부분부터 하나하나 고쳐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시스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골목을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것, 내가 무릎을 다쳐 골목의 위험성을 직접 체감하다 보니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굳이 골목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주위에 수두룩하다. 아마 그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을 거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웃으면 어른들 또한 행복해진다는 거다. 안전과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동차 없는 골목에서 마음껏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며 행복해지고 싶다. 안전한 한국에서 아이들과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다.

Words: 허남웅(대중문화 평론가)
Editor: 김종훈
Illustration: HEYH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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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Words 허남웅(대중문화 평론가)
Editor 김종훈
Illustration HeyHone

2014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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