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모자 패션은 파리지앵들이 알아둘 필요가 있다.” 1889년, 프랑스 교육부로부터 조선에 파견돼 6주 동안 머물렀던 프랑스의 탐험가이자 민속학자 샤를 바라가 잡지에 기고한 내용이다. 그의 ‘조선 기행’은 1892년 프랑스 잡지 <Le tour du monde(세계 일주)>에 실린 후 책으로 발간됐는데, 조선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그의 의견이 모두 호감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복에 대해서만큼은 긍정적이었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한복은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예복으로 남아 있었다. 일상과 동떨어진 한복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 당시 패션계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디자이너들이 비공식 스케줄로 한국에 영감 여행을 왔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후 구찌, 질샌더, 셀린느, 랑방 등 해외 컬렉션에서 한복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들이 속속 등장했다. 서양식 패턴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비정형적 패턴을 비롯해 여름 한복 소재 중 하나인 은조사를 떠오르게 하는 오간자, 버선코처럼 신발 앞이 살짝 들린 구두 등 한복적 요소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후에도 2011 S/S 캐롤리나 헤레라 컬렉션에서 한복과 갓을 모티브로 한 컬렉션을 선보였고, 드리스 반 노튼은 2012 F/W 시즌 컬렉션에 김혜순 한복 디자이너가 쓴 책 <아름다운 우리 저고리>에 실린 저고리 패턴을 사용했다. 이렇게 은은하게 스며들던 한복 유행에 부스터를 장착하게 한 것은 역시 미디어의 힘! 모두가 기억하는 2019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 방영 당시 서양의 힙스터들이 갓에 열광했던 사건이 있었고, 그룹 BTS 멤버 슈가가 2020년 5월 발표한 ‘대취타’ 뮤직비디오에 곤룡포(조선 임금이 집무 시 입던 정복)를 입고 등장해 다시 한번 전 세계에 한복의 매력을 각인시켰다. 당시 슈가는 화려한 산호 반지, 오팔 가락지, 비취를 조각한 팔찌, 상투관까지 전통 장신구로 완벽하게 스타일링했다. 모두 전통 장신구 브랜드 나스첸카(Naschenka)의 제품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 조명된 한복이 미니멀하면서도 드레시한 이미지가 강했다면 최근에는 더 과감해진 것이 특징이다. 한복을 어떻게 입어야 한다는 ‘정석’에서 탈피해 더 자유로워졌고, 컬러나 디테일도 대담하고 화려해졌다. 고무적인 것은 ‘보는 한복’에서 ‘입는 한복’으로, 과거에 안주하는 옷이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는 옷으로 재탄생하며 한복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변화의 중심에는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있다. 해외에서 주목받으며 돌체앤가바나가 발탁해 후원하는 것으로도 화제인 한국 디자이너 박소희가 이끄는 브랜드 미스소희(Miss Sohee)는 2022 F/W 시즌 컬렉션에 한국 전통 민화에서 받은 영감을 주저 없이 풀어놓았다. 박소희는 할머니 집에 있는 전통 자수와 민화가 그려진 책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며 드레스 위에 까치, 호랑이, 사슴, 나비, 파도, 모란, 해, 달, 별, 구름 등 정겨운 한국적 모티브를 자수로 잔뜩 채웠다. 미스소희의 지극히 한국적인 민화 컬렉션은 1년 10개월 만에 정규 2집으로 컴백한 그룹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에서 지수가 입고 등장해 전 세계의 K팝 팬들을 열광하게 했다. 지수는 네일까지 한국 전통 공예 소재인 자개로 스타일링해 한복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극대화했는데, 이는 평소 블랙핑크 멤버들의 네일을 담당하는 유니스텔라의 박은경 대표 작품이다.
김영진 한복의 세컨드 브랜드 차이킴(Tchai Kim)은 드레스처럼 아름다운 한복을 선보이며, 한복을 일상복으로 입고 싶게 만든 주인공이다. 디자이너 김영진은 남자들이 입는 무관용 관복인 철릭을 여성용 드레스로 만든 ‘철릭 드레스’를 비롯해 가슴 아래에 주름을 잡아 플레어처럼 퍼지게 만든 ‘연안김씨 저고리’, 치맛단을 걷어 올려 페플럼처럼 로맨틱하게 연출한 ‘거들허리치마’ 등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복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철릭 드레스는 인스타그램 피드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한복이 얼마나 일상 속에 아름답게 스며들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깔끔한 단발머리에 한복을 입고 로저 비비에 구두를 매치한 디자이너 김영진의 모습 또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한편 리우앤비우(RIU&VIU)는 조선시대 가죽 신발 ‘당혜’를 모티브로 수제화를 만들었다. 시작은 신발이었지만 이후 신발과 함께 매치할 수 있는 의류를 선보이고 있다. 대한제국 시대의 두루마기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테 코트’, 높은 신분의 여성이 격식 있는 자리에 갈 때 입었던 당의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위 셔츠’ 등이 대표 아이템. 리우앤비우의 디자이너 김예지는 “직접적으로 한복 모티브를 가져다 쓰는 것보다 한복을 입는 행위를 유도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철학에 따라 한복과 서양 복식의 요소를 과감히 섞고 일상복으로 입기에도 무리 없는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이 밖에 MZ세대 디자이너들이 직접 창업해 일상에서도 힙하게 입을 수 있는 ‘모던 한복’을 제안하는 하플리(HAPPLY), 리슬(LEESLE), 리을(rieul) 등의 브랜드가 인기다. 이들은 전통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재킷, 후드 티셔츠, 팬츠 등 스트리트 감성의 한복을 선보이며 동시대 여성들의 취향을 저격한다. 이들은 왕성한 에너지와 추진력으로 한복을 전방위적으로 알리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리을의 디자이너 김리을은 최근 영국의 맥라렌과 협업해 차량 전체에 산수화를 그려 넣은 슈퍼카를 선보였다. 외관뿐만 아니라 전통 자개 소재로 포인트 디자인을 넣은 기어 박스, 손잡이, 센터 페이샤 주위 패널 등 인테리어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방탄소년단 지민을 비롯해 마마무, 아이키 등 K팝 스타의 한복으로 유명해진 전북 로컬 브랜드 리슬은 지난 9월 말, 한복 브랜드로는 최초로 밀라노 패션 위크 무대에 올라 전 세계에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이처럼 뜨거운 한복 열풍의 백미는? 바로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이하 V&A 박물관)에서 열리는 한복 전시다. 170년 역사를 지닌 런던의 대표적인 박물관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공예 박물관인 V&A 박물관에서 <한류! 코리안 웨이브(Hallyu! The Korean Wave)> 전시가 열리고 있는 것!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 한국 드라마, 영화, K팝, K뷰티, K패션으로 이어지는 전시로 패션 섹션에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한복을 시작으로 영조 대왕 도포, BTS의 RM이 입은 백옥수의 오버코트, 블랙핑크 제니가 입은 조선왕조 궁중 보자기에서 영감을 받은 전통 무늬 재킷, 차이킴과 기로에(Guiroe)의 한복 등을 선보인다. 전시는 9월 24일에 시작해 2023년 6월 25일까지 이어진다.